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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독립운동사. '중국에서의 무정부주의 운동. 03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07 2020-07-18 17:50:57

03편,

 

 

 

***  " 중국에서의 무정부주의 운동 "..

 

 

중국 내의 한국독립운동 속에서 애너키스트그룹의 단체가 조직된 것은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1924년 4월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으로 기관지 『정의공보』를 발행하였다. 李會榮에 대해서는 李丁奎, 앞 책, 「友堂李會榮先生略傳」참조.
 
 
 
또 한 갈래의 운동은 1924년 북경민국대학(北京民國大學)의 한국과 중국학생들이 조직한 흑기연맹인데 이 중에는 한인학생 유기석(柳基錫), 심용해(沈龍海)가 있었다. 특히 이 대학의 흑기연맹은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는데 유기석은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대결하기 위해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기저로 해서 자신의 귀납적 유물론을 제시했다.
이 한·중학생이 연합한 북경민국대학의 흑기연맹은 1925년 봄부터 채원배(北京大總長), 장계(民國大이사장), 이석증(北京大교수), 오치휘(北京大교수) 등 신세기파의 중국 무정부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아 방종오(方宗鰲)주간의 『동방잡지(東方雜誌)』(中文)를 발행하여 애너키즘을 보급했다.
 
 
유기석, 심용해 등이 1926년 9월 크로포트킨 연구그룹을 만들고 1928년 10월경에는 그 밖에 정래동(丁來東), 오남기(吳南基) 등이 중심이 되어 애너연맹을 조직 『이튿날』을 간행하였다.
 
1928년에는 적어도 다음 세 갈래의 애너키스트단체가 있었다.
 
 

1. 1928년 4월 천진(天津)에서 조직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으로 신채호가 여기에 가담하였다.
 
2. 1928년 5월 남경(南京)에서 조직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으로 서기국 위원에 이정규, 적천계래(赤川啓來), 모일파(毛一波), 왕수인(王樹仁) 등이 있다.
 
3. 1928년 10월에 조직된 유기석, 심용해 중심의 북경 연맹.
 
 
일본의 첩보자료 참조.. 朝鮮總督府警務局(조선총독부),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최그의 조선치안상황)는 유기석 중심의 북경연맹에 대해서 서술하면서 “북평(北平)에 있어서 유기석 일파의 재중국 한인무정부연맹이 있으나 아무런 활동이 없고”라고 하여 3의 북경연맹이 이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1928년 4월에 한·중·비·일·대만(臺灣)·안남(安南) 등 동방 각국의 애너키스트 대표들이 천진에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 신채호는 대만인 임병문(林炳文 ; 북경은행 관리국 근무)과 협의하여 국제위체를 위조할 계획을 세웠다. 신채호는 중국인으로 변장해서 일본의 고베(神戶)를 거쳐 모지(門司)에서 배를 타고 5월 8일경 대만에 도착하여 기륭항(基隆港)에 상륙하기 직전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호송된 것이다. 애너키즘에는 자유연합의 새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강권의 부정을 위해 사기·암살 등 비합법적 방법이 정당화되었기 때문이다. 신채호는 이를 통해 자금을 만들어 상해와 남경에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기 위해서였다.
1929년 2월의 국제위체사건 공판정에서 신채호는 이 거사의 목적이 “동방연맹결성 자금과 잡지를 발간하여 동지를 규합코자 한 것이요. 참조.. 『東亞日報』(동아일보),
 
 
1929년 2월 12일자.라고 답변했다. 두번째 공판 심리 과정에서 “동방연맹이 기성국체를 변혁하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공산국가를 건설할 것인갚라는 재판장의 질문에는 “모르오”라고 부정적인 답변을 하고 “무정부주의로 동방의 기성국체를 변혁하여 다같이 자유로이 잘 살자는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신채호는 기성국체의 변혁을 인정했다. 이 심문에서 신채호는 ‘자유 노동 사회’라는 말대신 ‘자유로이 다같이 잘사는’ 자유사회의 건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주목된다.
 
 
또한 남경동방연맹의 이정규도 상해에서 체포되어 1928년 10월 국내로 압송되고 이석규도 구금되었다. 이정규의 공판에서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기관지 『탈환』지에 게재한 논문 「탈환의 제일성(第一聲)」 「혁명원리의 탈환」과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의 기관지 『동방』에 기고한 「동방무정부주의자에게 고함」의 논설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 논문들은 조선의 혁명을 고취하고, 동방 각 민족의 애너키스트 동지들의 단결을 호소한 글들이었다.
 
 
1929년 7월 시야(是也) 김종진(金宗鎭)是也(시야) 金宗鎭(김종진)은 1920년 말경 北京(북경)으로 李會榮(이회영)을 찾아서 평생 애너키즘운동에 투신한 인물이다. 1921年(년) 李始榮(이시영), 申奎植(신규식) 등의 소개로 雲南軍官學校(운남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마침내 만주로 가서 金佐鎭(김좌진) 장군과 애너키즘운동을 전개했다.
 

李丁奎(이정규), 『是也 金宗鎭傳』(시야 김종진전)참조.
 
 
은 만주로 가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신민부(新民府)의 김좌진(金佐鎭)장군을 애너키즘으로 개종시킴과 동시에 신민부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재만한족총연합회로 개편했다.
1920년대 만주의 우리 독립군 정부인 서간도 중심의 참의부(參議府)와 길림(吉林)의 정의부(正義府) 소만(蘇滿) 변경 일대의 신민부의 삼부의 정립 시대를 거쳐 1928년부터 삼부통합운동이 전개되면서 이 통합과정에서 그해 12월 ‘혁신의회(革新議會)’가 결성되고 공산주의운동이 점차 확대되었다. 이에 중공당(中共黨)의 이입삼(李立三) 노선은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극좌적 모험주의를 자극하여 삼부 등의 한국 민족주의운동을 위축시키고 김좌진장군에 대한 중상모략까지 일삼게 되었다.
 
 
김좌진장군은 1927년부터 기왕의 민족주의적 독립노선에 회의를 느끼고 점차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어갔다. 만주에서의 일본군 세력의 확산과 공산주의운동의 대세 가운데서 김좌진 등 신민부도 반공노선에 서면서 이념면에서 볼셰비즘과 대결할 수 있는 진보적인 사회사상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이 적색독재(赤色獨裁)를 반대하고 자유연합을 조직원리로 한 애너키즘이었다. 김종진은 김좌진과 자유연합적인 무정부주의의 독립노선으로 나아가는 데 합의하고 김야봉(金野蓬), 이달(李達), 이덕재(李德載), 이붕여(李鵬汝), 엄형순(嚴亨淳), 이준근(李俊根), 밀산(密山)의 이강훈(李康勳), 김야운(金野雲) 등 동지를 규합하여 해림(海林)소학교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김종진 자신이 그 책임위원이 되었다.
 
 
 
1929년 김종진이 주동이 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독립운동의 방향을 어떤 주의,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보다 200만 재만동포의 생존권 보장에 중점을 두고 농민의 경제적 협동체로서의 농촌자치조직과 교민 교육의 강화에 힘쓰는 운동계획을 제기했다.
 
따라서 이 연맹의 기본 강령은 다음과 같다. 참고..  韓國無政府主義運動央編纂委員會,(한국무정부주의운동앙편찬위원회) 앞 책, pp.323~324 ; 河岐洛,(하기락) 『奪還』(탈환)(螢雪出版社), (형성출판사),p.108,
 
 
“기본강령” 1에서는 “애너키사회의 구현”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1. 우리는 인간의 존엄과 개인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는 무지배  참조.. 韓國無政府主義運動史編纂委員會,(한국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을 참조하여
이 無支配(무지배)사회는 애너키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사회의 구현을 기한다.
 
 
2.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각인은 자주 창의와 상호부조적 자유합작으로써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기한다.
 
 
3. 각인은 능력껏 생산에 근로를 바치며, 각인의 수요에 응하여 소비하는 경제질서의 확립을 기한다.
 

이 강령에서 무지배사회의 구현은 애너키 사회 즉 자유·평등이 보장된 반강권적인 자유연합의 사회이며, 3의 “각인은 능력껏 생산에 근로를 바치며, 각인의 수요에 응하여 소비하는 경제질서”라고 규정한 것은 공산제적인 사회주의 경제체제인데 경제체제에 대한 정확한 검토없이 제시된 이상주의적 표현에 불과하다. 그러나 당면 강령에서는 재만동포들의 항일반공사상·계몽 및 생활개선 계몽과 주로 경제적 생활향상에 역점을 둔 자치합작적(自治合作的) 협동조직(協同組織) 참고..   韓國無政府主義運動史編纂委員會,(한국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325.이었다.
 
 
김종진과 김좌진이 합의하여 신민부를 개편하여 재만한족총연합회를 만들었는데 이 개편은 독립군 정부로서 신민부가 그 조직 대강에 명시한 바와 같이, 재만한족의 정치적 경제적 향상·발전을 도모하는 데 그 목적을 둔 자치단체로 변모한 것을 의미한다.
개편된 한족총연합회는 기왕의 삼부나 공산당을 포함한 동만(東滿)의 독립운동단체가 재만교민에게 권위주의적인 권력기관으로 군림한 데 대해 인보상조·자주자치의 애너키즘적 자유연합의 원리를 살린 점에서 만주 독립운동단체의 새로운 변모이기도 했다. 그리고 1930년 8월 초에 간부회에서 공천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총연합회위원장 김좌진 부위원장 권화산(權華山) 농무위원장 겸 조직선전위원장 김종진 한청암(韓靑岩) 교육위원장 전명원(全明源) 정신(鄭信) 군사위원장 이붕해 박경천(朴耕天) 각부차장 이달·김야봉·김야운·이덕재·엄형순

 

 

 

강석천(姜石泉)

 

 

이 간부진용으로 보아 한족총연합회는 그 조직원리와 사상이 애너키즘적 민족주의이며 중요부서에 김종진·이을규 등 애너키스트가 있어 날로 강화되는 공산주의운동에 대항하여 민족주의계 독립운동이 애너키즘으로 무장하여 대결한 점에서 애너키즘 운동은 독립운동에서 반강권주의가 바로 반볼셰비키, 반공노선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이 한족총연합회가 사회개량주의로 전환된 반공노선이며 재만동포의 생활향상에 역점을 둔 농민운동으로 전개된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 1월 20일 오후 4시 김좌진은 공장 수리를 지시하러 나갔다가 공산당원 김봉환(金奉煥 ; 일명 金一星)의 조정을 받은 박상실(朴尙實 ; 金信俊)의 권총저격으로 피살되었다.
 
 
재만공산주의세력은 재만무정부주의자연맹 뿐만 아니라, 한족총연맹회를 테러폭력으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는 1931년 7월 이 단체에 잠입하여 총연합회의 간부인 차장 이준근과 김야운을 저격하였고 연맹 농무위원장인 김종진을 납치하여 행방불명『東亞日報』,(동아일보), 1931년 9월 11일자. “是也 金宗鎭(시야 김종진)(31세)氏(씨)는 지난 8월 26일 中國 中東縣 海林驛(중국 중동현 해림역)부근에서 총살을 당했다고 한다. 가해자는 朴來春·李自湖·李益和(박래춘,리자호,리익화) 등 3명으로 主義上(주의상) 충돌일 듯하다.” 이 기사에서 “主義上(주의상) 충돌”이란 애너키즘과 볼셰비즘의 충돌을 의미한다.닫기이 된 것이 그의 최후였다.
 
 
1931년 여름 애너키즘연맹은 만주 기지에서 철수하고 1932년 11월 이회영도 실지회복(失地恢復)의 뜻을 품고 만주로 들어갔다가 대련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최후를 마쳤다.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에서의 애너키즘운동은 이회영에서 시작되어 그의 최후로 끝난 감이 없지 않다.
 
 
 
이상..              0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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