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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독립운동사..04편.) 간도를 ‘조선적화’의 근거지로
Korea, Republic of 돌통 0 225 2020-07-19 18:05:51

04편..



간도를 ‘조선적화’의 근거지로..



코민테른 기관지 『공산주의 인터내쇼널』은 1934년 12월 1 일 제 33·34 합본호에 「만주에서의 반제전선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장황한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의 제13항은 단일적 항일인민전선과 재만약소민족을 논한 것으로서 간도에 한족자치구(韓族自治區)의 설정, 한족혁명당(韓族革命黨)의 수립을 지시하고 있다.

참조 : 金正明編(김정명편), 『朝鮮獨立運動』(조선독립운동) (共?主義運動篇)(공산주의운동편) (東京:原書房(동경 원서방), 1966), p. 885.


이에 의하면 반일민족독립을 위해서는 민족부르죠아지까지도 포함한 항일단일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그렇다면 1930년의 5·30간도폭동 때 제시했던 중공당 연변당부의 민족주의 배격노선과는 전략사상을 달리하고 있다. 이 문제는 중공당의 좌경모험주의적 이립삼 노선이 후퇴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당시는 스탈린의 코민테른 지배에 의해 국제공산주의운동이 모스크바의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중공당의 이립삼 노선 후퇴는 코민테른의 국제노선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일제는 『공산주의 인터내쇼널』(제33·34 합본호)에 게재된 「만주에서와 반제전선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일제에 대한 배면(背面) 공격 및 극동적화(極東赤化)를 위해 고심초사하고 있는 증좌로 분석했고, 특히 제13항에 대해서는 “간도를 조선적화(朝鮮赤化), 조선민족독립의 근거지로 만들고자 한다”는 분석을 하고 있다.


이 13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인·몽고인·만주인에 대한 일제정책의 본질은 중국국민과 재만 각 약소민족과의 반일단일 전선을 무너뜨리고 반일공동투쟁에 대한 약소민족들의 상호원조 관계를 저해하려는 데 있다. 일제군부는 약소민족을 사주하여 중국민을 반대하는 투쟁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

간도에 있어서 일제군부는 파렴치하게도 일본이야말로 재만 조선인의 보호자이며 만주사변의 목적은 장학량 군벌의 압박하에서 조선인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인 것처럼 선전하면서 간도에 ‘조선민족자치구 창설’ 등의 구호를 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재만 약소민족에 대한 우리의 정책은 무엇인가? 이미 2년전 중공당 중앙서신 가운데 ‘공동의 적-일본제국주의에 대한 공동저항을 위해 재만 중국인·조선인·만주인·몽고인 등 피압박민족의 단일전선 수립’이란 구호를 제기한 바 있다. 이 정책의 정당성은 실천을 통하여 확증되었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일반적 구호로 제약되어서는 안되고 일층 구체화된 것이 요구되고 있다.


우리의 재만당(在滿黨) 단체는 간도에 한족자치구 창설을 위해 진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간도에서의 일본군지배 및 만주국을 여 하히 타도할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한인 및 중국인의 단일적 항일전선을 수립하는 수밖에 없다. 고로 공산주의자는 ‘야만 일본군의 지배를 타도하기 위해 중국인 한국인의 단결 및 간도한족자치구 설립’이란 구호를 제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재단체는 중국인 한국인의 단일전선 실현에 기초하여 현존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제2군 및 그밖의 반일 유격대를 한국의 독립획득을 임무로 하는 중한연합항일군(中韓聯合抗日軍)으로 개조하기 위해 제 방책을 강구하고 있는 바이다.

간도에서의 현 국면은 현행 중공당조직을 확충할 뿐 아니라 혁명적 중한노동자·농민을 더욱 당내로 끌어들여 한국항일민족혁명당(韓國抗日民族革命黨)을 수립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새로운 당의 가장 주요한 임무야말로 일제 반대, 한국의 민족적 독립획득을 위한 투쟁이다. 이 새로운 당의 창립자는 공산주의일 수 있고 또한 이어야 한다. 이 당은 간도에서의 한국 항일단일전선의 당으로 될 것이다. 이 대열에는 문호를 개방하여 일제의 식민지적 예속을 원치 않으며 민족적 독립획득을 위해 투쟁하려는 모든 한족민중이 몰려오도록 해야 한다.

이상 『코뮤니스트 인터내쇼널』지에 게재된 「만주에서의 반제전선에 대하여」라는 내용의 한국독립운동 관계부분을 장황하게 검토한 이유는 이 글이 그 후의 중공당노선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고 따라서 만주에서의 한인독립운동전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1935년 7월 25일 제7차 코민테른 대회가 모스크바에서 개막되어 8월 25일 폐막되었다. 이 대회에서 중공당 대표 왕명(王明;본명은 陳紹禹)은 코민테른사에 유명한 ‘식민지·반식민지 제국에 있어서의 혁명운동과 공산당의 전술’이란 연설을 했다. 왕명은 이 연설의 두번째 부문인 ‘반제통일전선의 수립·확대·강화-식민지·반식민지제국에 있어서의 공산주의자의 주된 임무’를 통해 공산당의 반제통일전선 전술을 소개했다.

참고 : いいだもも編譯(주꾸미편역),( 『民族·植民地問題と共?主義』(민족식민지문제공리주의) (コミンテルン全資料解題)(코민테른전자료해제) (東京:社會評論社(동경사회평론사), 1980. 9), pp. 236~262.


이 연설문은 중공당의 항일구국강령으로 알려진 세칭 「8·1선언」의 원본으로 간주될 뿐 아니라 식민지·반식민지의 공산당들의 반제통일전선의 총방침으로 되어졌다.012 郭華倫, 『中共史論』 第3?, p. 68.
共?國際第七次大會在莫斯科擧行期間, 王明一面是中共國防首席代表, 與康生等代表中共出席七次大會, 一面又是共?國際主席團委員, 書記處書記, 主管植民地半植民地國家之共黨工作, 因而他在七大會議中, 代表植民地半植民地的共黨和中共作了 「論反帝統一戰線問題」的 報?, 這一報?是中共 「八一宣言」的 藍本及抗日民族統一 戰線的指針, 同時又是各植民地半植民地共黨反帝統一 戰線的總方針

해석 : 곽화륜(郭華倫), 『중공사론(中共史論)』 제()3?, p. 68.
공()?국제제칠차대회재막사과거행기간(國際第七次大會在莫斯科擧行期間), 왕명일면시중공국방수석대표(王明一面是中共國防首席代表), 여강생등대표중공출석칠차대회(與康生等代表中共出席七次大會), 일면우시공(一面又是共)?국제주석단위원(國際主席團委員), 서기처서기(書記處書記), 주관식민지반식민지국가지공당공작(主管植民地半植民地國家之共黨工作), 인이타재칠대회의중(因而他在七大會議中), 대표식민지반식민지적공당화중공작료(代表植民地半植民地的共黨和中共作了) 「론반제통일전선문제(論反帝統一戰線問題)」적() 보()?, 저일보(這一報)?시중공(是中共) 「팔일선언(八一宣言)」적() 람본급항일민족통일(藍本及抗日民族統一) 전선적지침(戰線的指針), 동시우시각식민지반식민지공당반제통일(同時又是各植民地半植民地共黨反帝統一) 전선적총방침(戰線的總方針)


번역 : 중국공산당사론》 제3권, p. 68.
공산 국제 제7차 총회가 모스크바에서 거행하는 동안 왕명은 일면이었다중국공산당 국방수석대표는 강생 등 대표들과 함께 7차 총회에 참석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공산국제주석단 위원, 서기처 서기로서, 식민지반식민지국가의공당 업무를 주관하였다. 따라서 그는 7대 회의에서 식민지반식민지를 대표하는 공당과 중공에서 반제통일전선 문제를 논하는 보를 하였다. 이 보언은 중국공산당 81선언의 통일항일선 및 민족통일전선을 대표하였다


중공당의 8·1 선언은 제7차 코민테른대회의 인민전선전술 채택과 더불어 중국에서의 항일구국투쟁을 선언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곧 「위항일구국고전체동포서(爲抗日救國?全體同胞書)」

참고 :  王健民(왕건민), 『中國共産黨史稿』(중국공산당사고) 第三編(제삼편), pp. 42~45.를 말한다.


중공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중앙정부는 국민당정부의 5차에 걸친 토벌작전으로 말미암아 강서성 서금(瑞金)에서 쫓겨나 소위 2만 5천리 장정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도중 1935년 1월 준의회의(遵義會議;貴州省) (준의회의 귀주성)에서 중공당권은 진소우(陳紹禹)로부터 모택동(毛澤東)으로 넘어갔다. 8·1 선언은 중공이 극도의 궁지에 몰려 연안(延安)으로 패퇴하는 도중에 발표되었다.

8·1 선언에는 중국내의 모든 약소민족에 대한 열렬한 호소가 내포되어 있다. 곧

중국내의 모든 피압박민족(蒙·回·韓·藏·苗·搖·黎·蕃) (몽회한장묘요려번) 의 형제들이여 ! 다같이 궐기하여 일구(日寇) 및 장적(蔣賊)의 압박을 용감히 물리치고 중국소비에트정부와 동복각지(만주)의 항일정권을 단일적 전국적 국방(國防)정부로 조직하고 홍군(紅軍)과 동북인민혁명군 및 각지의 반일의용군을 한덩어리로 하는 전중국적 항일연군으로 조직하라 !


8·1 선언으로 통일전선의 전면화를 요구하게 되자 만주에서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조직을 항일연합군 조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동북항일연합군은 1930년대말에 이르기까지 3로(路) 11군(軍)에 달하는 방대한 조직을 확보하게 되었는데 제1로군 사령관은 양정우(楊靖宇), 제2로군 사령관 주보중(周保中), 제3로군 사령관 조상지(趙尙志) 등 모두 중국인이었다. 한인대원은 제1로군에 가장 많았는데, 김일성(金日成)·최현(崔賢)·임춘추(林春秋)·오백룡(吳白龍)·서철(徐哲) 등이 속해 있었고, 제2로군에는 최용건(崔庸健)·이학만(李學萬)·강신태(姜信泰)·강건(姜健) 등이 속해 있었으며, 제3로군에는 김책(金策)·이인근(李仁根) 등이 속해 있었다.


중공당은 1934년 12월 1일 『코뮤니스트 인터내쇼널』지가 만주에서의 단일적 반제통일전선을 요구한 다음해 1935년 8월 7일, 제7차 코민테른대회에서 왕명(王明) 연설을 통해 중공당의 통일전선 전술을 보고했고 그것을 8·1 선언으로 전국화했지만, 간도지방에 단일적 한국항일전선으로서의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했거나 한족자치구(韓族自治區)를 특별히 설립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중공당의 통제하에서 한족의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농민협회(農民協會)·반제동맹(反帝同盟)·동만특별위원회(東滿特別委員會) 등을 조직했다.


이같은 조치는 중국 당국에 대해 자치권을 요구했던 반일적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와 연변자치촉진회(延邊自治促進會)의 구역조직에서 보는 민족자결주의와는 대조적 인상을 받게 된다. 물론 위의 양자는 1931년 9월 이전의 일이고 그후 만주에서의 한국독립운동 단체는 좌익은 중공당조직에 흡수되었거나 이에 불복(不服)인 자는 한국내와 중국 관내 및 소련내로 분산해 갔고, 우익진영은 만주를 떠나 상해 한국임시정부를 찾아 중국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만주에는 오직 중공당만주성위의 한인연군에 속하는 한인대원만이 남게 되었다. 그것도 1930년대는 만주에서 활동무대를 유지할 수가 없어 궤멸상태에 빠지게 되자 간신히 시베리아로 피신하고 말았다.


이상..                  0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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