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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독립운동 역사.. 04편.. (노농쟁의의 전개 양상과 의의)
Korea, Republic of 돌통 0 242 2020-07-19 18:26:00

04편..



노동쟁의의 전개 양상을 추적하고 의의를 규정하는 작업은 해당 시기 및 지역 노동 상태를 점검하고, 노동쟁의 성패의 과정과 원인을 살핌으로써 당시 노동자와 지도부의 지향점, 더 나아가 해당 시기 노동운동의 성격까지 규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노동쟁의라는 사건에만 매몰되면, 노농단체나 노농운동의 성격 분석에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어느 세부 주제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사례로 출발하여 구체적인 모습을 살려내되 전체적 관점에서의 전망과 비교, 의미 부여가 절실한 부문이 바로 노농쟁의 관련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 직종별로 볼 때에 가장 많이 연구된 것은 부두노동자의 쟁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 대상 기준으로 가장 이른 시기를 다룬 연구는 한말 부두노동자의 형성 및 생활 상태를 바탕으로 목포항 부두노동자의 노동운동을 살핀 연구이다. 이 연구는 당시 급격히 붕괴되던 봉건제도와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던 일본자본주의의 침탈 속에서, 가장 기본적인 임금투쟁, 반십장운동, 반일패운동 등으로 부두노동자들이 저항한 것이 결국에는 일본자본주의에 대한 저항과 민족적 저항의 성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강조하였다. 즉, 기본적으로는 ‘노동자-자본가’의 계급관계에서 기인한 저항 운동이었으나, 결국 ‘조선-일본’이라는 민족적 모순에 저항한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시기의 쟁의가 조직의 미비라는 근본적인 한계로 인하여 어떤 통일된 이론의 제시와 실천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이후 투쟁의 시작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았다. 비슷한 시기 인천항 부두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조선신보』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본 연구도 있다. 이 연구는 목포에서 발생한 부두노동자의 파업이 개항기 최초의 노동쟁의라고 규정하는 통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1892년에 이미 두량노동조합이라는 노동조합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이 파업까지 진행했다는 『조선신보』의 기사를 활용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그 시점을 출발로 하여 1940년대까지에 이르는 인천항의 부두노동자 파업을 통시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반면 리종현은 1921년의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을 최초의 총파업으로 규정하고, 여러 교류와 접촉이 가능한 항만이라는 환경에 의해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높아졌기에 가능했던 쟁의였으며 이 파업이 이후 노동운동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여러 쟁의나 파업 중에서도 연구자들로부터 가장 주목받은 노동쟁의는 원산총파업이다. 일제 식민지기 중 가장 큰 규모이자 장기간의 파업이었기에, 이 사건에 대한 연구는 상당수 찾아볼 수 있다. 북한의 연구에서는 부두 노동자를 다룬 다른 연구와 마찬가지로, 원산 지역의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이 지역에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일찍 전파되었고 이것이 이 지역의 노동운동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본 반면, 남한 측 대부분의 연구는 1920년대 전반적인 노동운동의 성장과 원산지역의 경제적 특성 등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의 연구는 원산총파업에 대한 기본적인 전개과정과 의의를 분석한 연구가 주를 이룬다(윤정희, 1974 ; 이철우, 1984 ; 이민호, 1988 ; 유현, 1990). 이들 연구에서는 원산총파업의 의의에 대해 단순 노동쟁의를 넘어선 민족투쟁이었으며 인텔리나 소수 지도자가 아닌 노동자 대중이 투쟁 전선에 나섰다는 점, 이 쟁의 이후 공장 산업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비합법적·혁명적 노동운동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점, 산업별 조직 원칙의 필요성이 부각된 사건이었다는 점 등을 지적하였다. 더 나아가 원산총파업을 계기로 노동운동이 급격히 고양되었으며, 총파업의 실패가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전개의 조건을 성숙시켰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이밖에 원산총파업의 실패 과정을 추적하여 당시 노동자조직의 특징과 파벌적 한계를 분석한 연구가 있으며, 총파업이 원산상공회의소와 일제 당국에 의해 치밀하게 계산된 음모라는 주장을 제기한 연구도 있다. 또 원산총파업을 평가할 때에 지역의 구체적 조건과 지역노동운동의 경험, 해당 지역 노동자 계급이 성장 정도 등을 고려하기 위해 원산이라는 도시 자체의 역사와 교통 및 운수 체제, 산업체제 등 도시 인프라의 구성 과정을 검토하고, 그를 바탕으로 노동자 계급의 형성과 총파업 무렵의 계급 구성과 노동자의 상태를 검토한 연구도 있다. 반면 원산총파업이 가지는 기존의 의의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총파업 실패로 인해 “온정주의의 마지막 영역이 남김없이 파괴되었다”거나 “이전의 조직적 규율과 단결, 강인한 투쟁성, 계급적 자존심 및 혁명적 낙관주의 대신에 상호 대립과 경쟁, 무기력과 비관주의가 노동 계급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는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일면을 서술한 연구도 있다. 이 연구는 원산총파업의 영향이 항일 무장 투쟁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밖에 고무노동자의 노동쟁의를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경우도 있다. 이 연구에서는 1930년 평양고무공장의 파업을 분석하면서 이 파업이 반일민족해방투쟁이자 적극적인 무장투쟁으로 나아가는 혁명적 성격을 지닌 것이며 그것이 논문이 발표되던 당시에도 “사회주의 경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에 비해 고무 산업의 변화와 공장의 운영 상태를 바탕으로 하여, 고무 노동자의 생활 상태와 노동 조건을 분석하고 각 지역의 쟁의를 정리한 연구도 있다. 특히 이 연구에서는 고무 노동자 특유의 연대를 위한 다양한 노력에 주목했다. 예를 들어 같은 작업장 안에서 남성과 여성, 숙련공과 미숙련공 사이의 연대, 공장 간의 연대, 지역 연대, 외부 조직을 통한 지도와 지원 등에 주목하여 당시 고무노동자의 노동운동이 가지는 의의와 가능성을 조명했다.


고무노동자 등 공장의 소비재 생산직 노동자에 대한 연구에서 돋보이는 점은 산업적인 특성상 여성 노동운동을 조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식민지기 노동운동 연구에서 여성사적 관점 및 젠더적 관점으로 진행된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 면에서 고무노동자에 대한 연구는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연구로 1930년대 전반기 고무 제품 제조업과 제기산업에서 여성 노동운동을 살핀 연구(서형실, 1990)가 있다. 이 연구는 비록 1930년부터 1934년까지의 짧은 기간과 평양이라는 한정된 공간만을 살펴보고 있지만, 가정이라는 개별 공간에서 여성의 노동력이 가지는 의미를 토대로 여성 노동력에 대한 차별이 가지는 사회적 함의 및 영향을 정치하게 분석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또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가 기혼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특정 이해관계를 공유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고 보았다.


또 부산지역의 고무공장과 방직공장 여성 노동자의 쟁의를 연구 대상으로 하여, 당시 노동자들의 임금, 고용환경, 노동시간, 노동통제 등을 바탕으로 1920~30년대 간의 노동쟁의 사례를 분석한 연구도 있다. 이 연구에서는 쟁의시 제시된 각종 요구 사항에 여성들의 구체적 삶을 규정해 주는 조항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근거로, 적색노조와 여성 노동자들과의 관계가 밀접하지 않았으며 여성들이 노동단체의 지도층으로 참여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각종 파업 분쇄책에도 남성 노동자가 아닌 여성 노동자가 끝까지 저항했던 것은 여성 노동자들이 처한 노동조건이 남성 노동자의 그것에 비해 더 열악했기 때문이었다고 보았다.


즉,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자본, 민족은 물론 성에 의한 삼중고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여성 노동자가 처했던 이런 특별한 환경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최근의 연구로는 인천 성냥공장 여성 노동자의 동맹파업을 다룬 연구가 있다(김양섭, 2014). 이 연구는 인천 성냥공장의 파업이 생존권 수호에서 출발하여 8시간 노동제 실시 등의 노동권 쟁취로 발전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고 평가하였다.


이밖에도 인쇄 출판업 노동자, 서울 전차 승무원, 목포 제유공, 영흥 흑연광산 노동자 등의 파업 및 쟁의를 사례 연구로 다루기도 하였다. 특히 1930년대 신흥 탄광노동자에 대한 연구는 실제 사건이 일어난 뒤 3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진행된 연구로, 쟁의 당시 사용되었던 격문이나 전단지 등은 물론이고 파업에 참가했던 노동자의 육성까지 직접 자료로 활용한 면이 돋보인다.


농민운동의 경우, 가장 많이 다루어진 투쟁은 소작쟁의이다. 일제 식민지기 소작쟁의는 1922~1923년 어간, 1930~31년 어간을 기점으로 점차 증가하다가 1933년을 전후로 소규모의 쟁의조정사건이 급증하였다(지수걸, 1996). 이에 따라 많은 사례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들 연구는 높은 소작료, 마름의 중간수탈, 소작권 이동 문제, 고리대 수탈, 노역 동원 등의 문제가 쟁의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고 보았다. 특히 소작쟁의의 성격에 대해서는 몇 가지 요소-일제의 농업정책, 토지 독점으로 인한 농민층 분화, 소작빈농민들의 불만 축적-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 서태석, 박복영, 문재철이라는 세 인물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기 위한 장으로서 암태도 소작쟁의를 배경으로 삼은 연구도 있다. 비록 소작쟁의 그 자체를 중점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지만, 이 연구를 통해 당시 농민운동을 주도했던 인적 구성이 상당히 다양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는 데에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소작쟁의 관련 연구는 아니지만, 1910년대 노동자 및 농민을 다루면서 1910년대의 소작쟁의를 둘러싼 불만이 3·1운동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는 분석이 시도되기도 했다.


한편 수리조합 설립 반대 운동 또한 농민운동의 하나로써 다루어졌다. 대표적인 연구가 서면수리조합 설립 반대 운동이나 각 지역의 수리조합사업을 분석하면서 수리조합 반대 운동을 다룬 연구들, 그리고 1920년부터 1930년대에 걸쳐 수리조합사업에 대한 저항을 정리한 연구들이다. 해당 연구의 분석 결과 수리조합 설립을 반대한 것은 여타 농민운동의 주체라고 할 수 있었던 빈농이 아니라 농촌사회의 중간층인 중소지주와 자작농이었음이 밝혀졌다. 또 때로는 지주와 소작농이 연대투쟁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수리조합 설립 반대 운동은 기존 연구에서 언급하던 농민운동과는 또 다른 색채와 한계를 가진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하여 1930년대의 노농운동은 1920년과는 달리 비합법 영역에서 운동이 진행되었고, 혁명적 단체들이 운동을 주도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북한에서의 연구는 이 시기야말로 농민운동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 시기로 적극적인 평가를 하였다. 이 시기 농민운동이 반일무장투쟁의 영향 하에서 토지혁명의 구호를 외친 반일 노동운동으로 발전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남한에서의 연구로는 1930년대 ‘9월 테제’와 ‘10월 서신’의 영향으로 노동운동이 전환하게 된 것에 주목하여 그 이후 전개된 노동운동 주체의 변화와 그에 따른 노동운동의 성격 변화, 그리고 그것의 한계를 분석한 연구가 있다. 또 ‘9월 테제’와 ‘10월 서신’의 영향이 당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그것이 다시 노동운동 방침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분석한 연구가 있으며, 1930년대 초 함흥, 흥남, 평양, 원산 등지를 무대로 진행된 범태평양노동조합 계열의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의 한계와 의의를 살펴본 연구도 있다. 반면 1930년대 초반 파업의 양상이 급격한 고조와 퇴조를 보였던 것에 대해, 대공황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단기적이고 수세적인 반발 형태의 파업을 유도한 것이라고 본 연구도 있다.


1930년대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는 『일제하 농민조합운동 연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는 1930년대 초반 농민운동 조건의 변화와 함께 합법 농민운동이 한계를 맞이하였고, 결국 혁명적 농민운동 노선으로 전환하였다고 보았다. 특히 시기별로 전환기(1930~1931년), 재건설기(1932~1936년), 인민전선전술 수용기(1937년 이후)로 정의하여, 그에 따른 정치노선, 조직노선, 투쟁노선을 검토하고 관련 사례를 지역별로 살펴보았다. 결국 이 연구가 규정하는 1930년대 농민운동의 의의는, 소부르주아적 성향을 극복하고 농민들을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 나설 수 있게 했다는 점, 그리고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옹호하는 운동이 아니라 자치권력의 수립 시도까지 나아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계로는 민족개량주의자 및 부농들을 지나치게 배격하여 스스로 고립되는 지경이 이르렀다는 점과 전국적인 조직 설립에 실패했다는 점, 무리한 정치적 슬로건 선전이나 청년 선봉주의의 강조 때문에 대중적 기반을 잃어버렸다는 점 등을 꼽고 있다. 그밖에 1930년대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의 사례 연구로서 명천농민운동을 다룬 북한 측의 연구(김정숙, 1958)001001 이 연구는 명천농민운동이 반일적인 성격을 가질 뿐만 아니라, 김일성이 새 당의 창건을 위해 지도하여 일제에 저항한 혁명적, 폭동적, 애국적 투쟁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럼에도 이 연구는 같은 시기 북한의 연구자에 의해 강한 비판을 받았다(김영숙·김희일, 1959). 당시 경직된 북한 학계의 분위기와 김일성 1인 독재 체제의 진행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닫기와 정평농민조합을 대상으로 한 연구(이준식, 1990), 문경농민조합에 대한 사례 연구(심상훈, 2012)도 발표되었다.


결국 1930년대 농민운동에 대한 평가는 일부 좌익 지식인들의 좌편향적인 투쟁으로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는 부정적인 평가와, 농민들이 주체적으로 반제·반봉건 투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고정수, 1960)로 나뉜다고 볼 수 있겠다(지수걸, 1996).


이상..              0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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