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독립운동이여.!! 1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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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편 위기 속에서도 최후의 빛을 발하다 1939년 겨울, 관동군은 길림의 제2독립수비대 사령관 노조에 쇼토쿠 소장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만주군, 경찰대 등 7만5천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간도지구 토벌대, 길림지구 토벌대, 통화지구 토벌대 등 3개 부대로 나누어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을 개시했다. 치안숙정공작의 주요 내용은 “겨울에 눈이 내리는 시기를 이용하고 미리 목표비(目標匪)를 정하여, 쌓인 눈 위의 적의 발자국(위장 발자국을 간파하여)을 밟아 산채에서 취사하는 연기를 발견하면 이것을 복멸(覆滅)하고, 적의 모습을 발견하면 단숨에 섬멸하도록 하며, 나머지 잔당을 급히 추격하고 또 추격하여 적에게 한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지쳐빠지게 하며(일명 진드기 전법),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투항, 또는 귀순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주요 표적은 양징위, 차오야판, 김일성, 첸한쟝, 최현(각각 현상금 1만엔), 박득범, 팡치엔셩(현상금 5천엔), 웨이쩡민, 전광(현상금 3천엔) 등이었다. 비행기까지 동원한 감시, 집단부락 건설, 나가시마 공작대 등의 특수공작이 병행되었는데, 작전은 1941년 3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3천만엔의 예산을 들여 전개되었다. 1939년 10월 초 양징위와 웨이쩡민의 주도로 화전현 두도류하에서 제1로군 남만성위의 주요 영도간부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역량을 보존하고 괴멸적 타격을 피하기 위해 제1로군의 각 부대가 ‘완전히 자취를 없애고, 소부대를 편성하여 분산유격전을 전개할 것’(化整爲零)을 결정하였다. 웨이쩡민은 제3방면군과 함께 돈화, 안도, 영안남부 경박호지구로 진출하고, 김일성의 제2방면군은 백두산지구에서 압록강 상류로 진출하며, 양징위는 제1방면군과 직속부대를 이끌고 무송, 몽강, 금천, 통화 일대에서 유격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웨이쩡민은 이 회의 후 위와 심장의 병이 악화되어 부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밀영에 남았다. 양징위 부대는 처음 700명 정도로 출발했으나 11월 말 몽강현 접경지역에서 일본군에 포위되는 바람에 나뉘어졌으며, 12월 말 재결집했을 때 400명으로 줄어들었다. 통화성 경무청장 기시다니 류이치로를 대장으로 하는 통화성 경찰토벌대 2,200명이 양징위의 뒤를 쫓았는데, 양징위의 오른팔로 있다가 투항한 청빈이 토벌대의 선두병력을 지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40년 1월 21일 몽강현 마가 동남방 밀림지구 전투에서 부상당해 체포된 경위려 제1단 참모 딩쇼우룽(丁守龍)이 변절했고, 2월 1일에는 전투 중 양징위의 신변을 경호하던 경위려 기관총배장(소대장) 쟝리펑(張李鳳)이 현금 1만엔과 권총 4자루를 가지고 일본군에 귀순했다. 부하들의 연속적인 배신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양징위는 1940년 2월 23일, 마지막 부하 2명을 잃고 혼자 포위된 상태에서 싸우다가 사살되었다. 일본군은 혹한 속에서 무얼 먹고 견디었는지를 알기 위해 그의 배를 갈랐다. 양징위의 위에서는 나무껍질과 풀뿌리, 그리고 솜밖에 없었다. 이를 보고 그 자리에 있던 일본군 의사조차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으며, 일본군도 그를 ‘중국의 위대한 영웅’이라고 애도했다. 양정우의 머리는 몽강현성과 통화에 내걸렸고, 일본군은 김일성과 최현만 잡으면 항일무장무대는 완전히 소멸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팡치엔청도 1940년 2월 15일 화전현 부근에서 체포되었다. ▲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총지휘 양징위 장군(사진=신화통신) 1940년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화전현 두도류하에 있는 전광의 밀영에서 남만성위 간부회의가 열렸다. 남만성위 서기 웨이쩡민이 주재한 회의에서 종래의 유격전만으로는 일만군의 토벌에 맞서기 어렵다고 보고 각계각층에서 당원을 확충하고 당조직을 재건 정비하기로 했다. 그러나 조직재건 책임자로 결정된 김광학과 김재범마저 1940년 7월 체포되고 말았다. ▲ ‘마에다부대’ 충혼비 앞에서 찍은 일본군 공작대 기념사진. 뒷줄 왼쪽부터 항일연군에서 투항해 일본군 앞잡이가 된 김재범, 박득범, 김백산이다.(사진=2007.9.13.) 김일성의 제2방면군에도 귀순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1940년 2월 20일 제2방면군 참모장 임수산이 부하 10여명과 경기관총 2자루를 가지고 투항한 뒤 공작대를 조직하여 나가시마 공작반과 함께 무송, 왕청, 연길 일대에서 김일성부대를 뒤쫓았다. 그런 중에도 김일성부대는 1940년 3월 25일 안도현 대마록구 서쪽의 고지에서 화룡현 경방대대 ‘마에다 중대’를 공격하여 사실상 전멸시켰다. 북한에서 말하는 ‘홍기하 전투’인데, 말 그대로 “항일연군 제1로군이 간고한 시기에 거둔 중대한 승리”였다. 1940년 3월 11일 김일성부대는 홍기하 계곡에 위치한 대마록구에 있는 일본인 목재소를 습격, 산림경찰대를 공격한 뒤 대량의 총탄과 쌀을 탈취해 퇴각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저 악명 높은 토벌대 ‘마에다부대’ 145명이 김일성부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김일성부대는 추격하는 적 때문에 휴식도 취할 수 없었고, 밥을 먹을 수 없어서 생쌀과 눈으로 배고픔을 면했다. 대원의 절반이 근육이 굳어지는 병을 앓고 있었는데, 병이 가벼운 사람은 스스로 걸었지만 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부축하지 않으면 걸을 수가 없었다. 김일성부대는 매복공격으로 적을 섬멸하고 총 100자루, 기관총 6자루를 획득하였으나 정치부 주임 뤼바이치 등이 부상당했다. 그런데 이때 궤멸당한 마에다부대 145명 중 “일본계가 9명, 일부 만주계도 있었으나 대부분 조선계였다.” 생존자의 말에 따르면 김일성부대 쪽에서는 “총을 버리고 손을 들어라. 명령에 따르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라고 목이 쉬도록 외쳤지만 마에다부대의 조선인 경찰관은 한 사람도 항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는 마에다부대 전멸 1년 후 화룡현 삼도구에 현충비를 세웠는데 여기에는 “한 선계(鮮系)대원은 마침내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부상당했음을 알자 천황폐하 만세를 봉창하고 의연하게 죽어갔다”고 씌어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과 조선인 부대원들은 틀림없이 그 만세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그들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은 더욱 깊어갔을 것이다.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세운 나라가 북한이라는 사실은 지금의 북한을 보는데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 홍기하 전투를 소개하고 있는 연변일보(2005.5.27.일자) 기사(사진) 1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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