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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에 대한 북한과 중국(모택동)과의 외교관계..04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46 2021-02-06 01:56:59
  04편.



김일성(김성주)이 만주에서 가졌던 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는 1930년대의 '동북항일연군' 과의 관계에 한정되었있었다. 이 항일련군은 모스코바와 코민테른으로부터의 지시를 받았다. 毛(모택동,마오쩌둥)휘하의 연안의 중국공산당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가지지 못했다. ※(참고) 《    Suh, Dae-sook,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 (Columbia UP, 1998, 17쪽 》


서대숙의 연구는 대부분의 만주중국공산 게릴라들은 관동군의 소탕작전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살되거나 전향하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1945년당시 김일성이 알고 있었던 만주의 중국공산당원은 불과 몇 명에 불과하였고, 한번도 가보지 못한 연안출신의 중국공산당원은 거의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김일성이 중국과 가졌던 관계는 만주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만주에는 88여단에서 김일성의 직속상관을 지냈던 주보중(저우바우중)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 (참고) 《   주보중은 1930년대말 동북항일련군이 소련연해주로 도피하기 직전 련군의 지휘자였고 김일성은 그 휘하에 있었다. 소련극동군에 소속되어 있었던 88특별여단의 중국인 여단장은 '주보중'이였고 김일성은 그 휘하의 중대장이었다.[참고로 주보중이 김일성보다 10살이 더 많다.]   


2차대전 이후 88여단의 중국공산주의자들은 소련군의 만주점령에 가장 중요한 협력자이며 소련의 대만주 정책의 도구였다. 1948년 1월 1일 주보중은 동북지구의 부사령관으로 진급되었다. 그러나 1949년 10월 1일 중공건국선언기념행사에 참가하여 모택동으로부터 그의 노고에 대한 치하를 받은 후 주보중은 운남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이후 그의 정치경력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당연히 북한과 만주간의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趙素芬,「周保中年譜」, 中國黨史資料, 25 (1988: 252-63쪽  》



북한의 국내정치 또한 김과 毛(모)간의 알력을 조장했던 한 요소였다. 1945년 10월 해방된 한반도에 모택동이 연안파를 돌려보냈을 때 김은 그들을 환영하였지만 겉모양 뿐이었다. 북경의 지지를 받은 연안출신들은 김일성과 갑산파가 주도하는 북한의 국내정치에 위협적 요소로 떠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모택동식의 공산주의와는 이념적으로 별 연관이 없었다. 毛(모)와 김이 서로에게 호감을 가질 이유는 별로 없었던 것이다.


일본의 항복이후 1949년 3월 김일성이 북경을 방문했을 때까지 북한이 가졌던 중국과의 관계는 모두 중국공산당 동북지구를 통하여 행해졌다. 즉 한국전 이전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북한과 중국공산당 동북지구와의 관계였다. 이에 김일성과 고강의 접촉은 필연적이었고 북경을 배제한 북한-만주간의 관계를 毛(모)는 물론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毛(모)가 ‘이후 문제는 고강과 의논하라’고 했을 때는 이미 진행되어왔던 북한-만주 즉 '김일성'- '고강'간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물론 毛(모)로서는 북한-만주간의 관계에 소련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것을 달갑게 생각지 않았다.


Ⅲ. 중국내의 조선인 병사송환


만주에서의 중국 국공내전은 훗날 중국에서 송환된 북한인민군을 위한 훌륭한 실전 훈련장이기도 하였다. 만주에서 국공내전에 동원된 임표휘하의 중공 제4야전군에 소속된 조선인 병사의 숫자는 상당한 것으로 10만 내지 14만 5천명으로 추정되기도 하였다.※(참고)  《  히라마쯔 시게오는 1949년 당시 중공군에 약 10만의 조선인 병사가 복무하고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平松茂雄, 中國と朝鮮戰爭, (東京: 勁草書房, 1988, 34쪽. 》


국민당은 만리장성이 남에 배치된 조선인 병사만도 5만병으로 추정하였다.※ (참고) 《    Bruce Cumings 또한 10만으로 추정하고 있다. Bruce Cumings and Jn Holliday, Korea: The Unknown War, (New York: Viking Penguin Book, 1988, 61-2쪽. 》


1947년 북한의 정권은 당시 국민당 군과 싸우던 중국공산당에게 3만명의 북한군사를 만주로 보낸 바 있다.


이들 조선인 병사들은 북한의 남침 준비에 중요한 요소였다. 스탈린이 남침의 결정을 내리기까지 강조한 것은 북한이 남한에 비하여 군사적 우월을 확보하는 것이였다.  중국에서는 송환된 병사는 소련에서 원조한 무기와 더불어 북한의 인민군 증강의 두 근간이였다. 


이 조선인병사들의 송환협상은 김일성이 북경방문을 마친 후 즉시 시작되었다. 1949년 5월 북경방문후 귀국길에 김일성은 심양에서 고강을 만나 조선병사 송환문제를 상의하였다. '고'는 모택동으로부터 두 개 조선사단을 송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김일성에게 말하며 북한과 더 가까워지고자 하는 자신의 소망을 밝혔다. 이에 김일(박덕산)과 김일성은 고강과 주보중에게 ※ (참고) 《  앞의 「1949년 5월 15일자 스티코프의 電文」》


5월말 평양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곳에서 북한측과 고강측은 조선사단 송환의 실무를 상의하였고, 이를 위하여 주보중은 5월과 6월에 걸쳐 북한에서 머무르며 이를 주선하였다.

※  (참고) 《   앞의 「1949년 5월 15일자 스티코프의 電文」》


군대송환을 위해 평양과 심양은 합의서를 작성하고 심양과 장춘에 있던 조선인민해방군의 사령부와 평양간에 통신망을 설치되었다. ※  (참고) 《  1949년 7월 13일자 스티코프가 비신스키에게 보낸 전신」, 『基本文獻』,25-6쪽. 이 두 사단의 북한 송환은 평양과 모스코바사이에 오갔던 다른 소련전문에도 나타난다.「1949년 6월 22일자 시티코프가 비신스키에게 보낸 전문」,『러政府제공 6·25戰爭관련 補充文獻 資料(번역본-1949,1-53,9』(이하 補充資料로 표기함, 37쪽. 》


조선병사송환은 두 차례에 나누어서 이루어졌다.  첫 번째 송환된 부대는 약 2만명으로 1949년 여름 북한에 도착하였다. ※(참고) 《  「1949년 9월 15일자 스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남북한 상황에 대한 보고서」,『基本文獻』(33-49쪽, 42쪽. 7월 비신스키에게 보낸 전문에서 스티코프는 김일성이 조선사단에 송환을 결정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송환의 정확한 시기는 문헌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基本文獻』, 26쪽. 》


두 번째 부대는 1950년 초 북한에 도착하였다.

이 부대들은 일제, 중국제, 그리고 미제의 무기로 무장되었다. 스티코프의 평가에 의하면 이 부대들은 전투경험이 있지만 장교들은 전술과 작전계획에 대한 적절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들은 중공군 제 4야전군의 164와 166사단으로서 북한인민군의 5사단과 6사단으로 편성되었다. ※ (참고) 《  

William Whitson, with Chen-hsia Huang, The Chinese High Command: A History of Communist Military Politics, 1927-71, (New York: Praeger Publishers, 1973, 322쪽의 도표. 》



이 두 사단의 보강으로 북한은 경찰력을 제외한 인민군의 군사는 8만명으로 증강되었다. ※ (참고) 《  앞의 스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장문의 남북한 상황에 관한 보고서. 같은 이야기는 최태한 과 박혜강, 젊은 혁명가의 초상화, 인민군장교 최태한의 한국전, (서울:공동체, 1989, 95쪽. 》


1949년 5월 북경 방문시 김일은 모택동과 그 해 8월 15일 옹진반도의 남한군대를 공격할 계획을 상의하였다. 이 계획은 훗날 모스코바의 소련공산당 정치국이 거부함으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당시 毛(모)는 북한이 선제공격을 하지 않아야 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첫째 정치적으로 이롭지 못하고 


둘째 중국이 내부문제로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참고) 《 앞의「1949년 9월 15자 스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남북한 상황에 대한 보고서」, 40쪽.  》

 

모스코바가 옹진반도 공격계획을 거부하였던 데는 毛(모)의 반대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스코바가 반대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비록 49년 여름 2만의 군사가 중국에서 송환되었지만 북한인민군은 남한의 군대에 대하여 숫적 우세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련공산당 정치국이  평양에 보낸 전문에서 이점을 지적하며 “침공에 군사적으로 준비되지 않았다.”고 옹진반도 침공 계획을 거부하였다. 


소련은 김일성에게 “북한이 전쟁적, 정치적 측면에서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남한과 북한간의 전쟁을 시작한다는 것”은…… 전쟁이 “장기적인 성격”이 되며 “이것은 미국에게 한국에 개입할 수 있는 모든 동기를 제공해주는 것임을 고려해야만 한다.”고 경고하였다.※(참고) 《   

「1949년 9월 24일자 소련공산당 정치국 회의 의사록 71번의 요약중 191항: 스티코프, 동지문제, No. n711191」, 『基本文獻』50-2쪽. 이 문건은 Kathryn Weathersby, 「Korea, 1945-50, To Attack, or Not to Attack?」 Bulletin,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Issue 5 (Spring, 1995: (1-9 7-8쪽에도 Document V로 번역되어 있슴. 》

 


소련측의 군사적 우월성 강조는 당연히 김일성으로 하여금 병력증강을 모색하게 하였다. 김일성은 아직 중국인민 해방군에 남아있는 세 번째 조선사단을 북한으로 송환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중국이 북한을 도와야만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소련이 북한을 돕고 있듯이 중국도 도와야 한다. 많은 조선인이 '국공내전' 에서 공산당을 도왔듯이 중국도 북한을 도와야 한다.”  ※(참고) 《  앞의 「1949년 9월 15자 스티코프가 스탈린에 보낸 보고서」, 『基本文獻』,43쪽. 》



중국으로부터 조선사단을 송환하는 것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군사수적 우세를 확보하는 가장 손쉬운 방편이었고, 스탈린의 옹진반도 침공승인 거부의 주요 이유를 없애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조선사단을 송환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1950년 1월 초 모택동이 모스코바를 방문하고 있는 동안 소련의 지도부가 먼저 이 조선사단 문제를 거론하였다.  이에 모택동은 모스코바에서 북경으로 전보를 보내 인민해방군에 남아 있는 조선병사의 정확한 숫자를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毛(모)는 북경에서 임표가 보낸 보고서를 소련외무성에 전달하였고 ※(참고) 《  이 문제에 관하여 중국측 자료 『建國以來毛澤東文稿』 중 이 부분에 해당되는 부분(1권:1949年 9月-1950年 12月, 189-266쪽은 毛가 북경에 보낸 전문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1950년 1월 8일자 소련 외무성이 평양에 보낸 전신: 마오쩌뚱에게 보낸 임표의 전신내용에 대한 정보」, 『基本文獻』, 58쪽. 》



소련외무성은 이 정보를 1월 8일 평양의 소련대사 스티코프에게 전달하였다. 그 세 번째 사단은 1만 6천명 이상의 장교와 사병으로 구성되었다. 임표는 그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 조선병사송환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다. ※ (참고) 《   위의 전문. 그러나 소련군들은 중국인민해방군의 남아있는 조선병사는 2명의 사단장, 825명의 장교, 19,900명의 사병으로 추정하였고 중국측 숫자보다 5천명이 더 많았다. 》

 

이에 중공은 평양에 있는 중국 무역대표부를 통하여 김일성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중국의 내전이 성공적으로 종결되었다는 것을 알리며 인민해방군 ~~~


이상...    05편에서 계속~~

155, 16/28 끼 ?ㅈ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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