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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가짜설의 미스테리..01편 시리즈
Korea, Republic of 돌통 0 395 2021-02-06 14:15:58
  김일성 가짜설은 해방 후 소련군이 데려온 북한 김일성(金日成)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 대중앞에 나선 당시 나이가 33세로 너무 젊어서 1920년 무렵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군중들 사이에 가짜라는 소동이 벌어지면서 처음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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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김일성 가짜설은 수많은 월남민들에 의해 남한 사회에 널리 퍼져 당연한 사실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해방 전 일찌기 김일성 장군 소문을 듣고 자라 직관적으로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고 알았던 월남민 1세대 대다수가 작고하거나 퇴장할 무렵부터 김일성은 가짜가 아닌 진짜라는 주장이 나와 점점 세력을 확장하면서 지금도 진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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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 가짜설의 기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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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그가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김일성 장군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나서던 날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왔다.???? ※(참조) 《  김일성 환영대회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6)  중앙일보 1991년 09월 05일 / ≪비록(?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1992년) 상권 pp.84~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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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  유성철 (1917~1995) 회고록 " 피바다의 비화 " pp.22~23  숙청된 고려인 가족 80인의 육필수기 : 미의회 도서관 ) : 유성철?은 소련군 88여단의 김일성 대대 통역관으로 있었으며, 해방 후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내다 소련파? 숙청 때 소련으로 돌아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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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  장준익(張浚翼), ≪북한인민군대사(北韓人民軍隊史)≫ (서문당, 1991년 11월 1일) p.40 : 저자는 육군사관학교 교장 역임함. 》

 

※ (참조) 《  한재덕 1911~1970 김일성을 (고발)한다. 1962.05.12 동아일보 2면 / (김일성을(고발)한다.(1962.05.13 동아일보 2면 / (김일성)을(고발)한다.(11)회 1962.05.14 동아일보 2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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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들의 태반은 김일성보다 나이가 연상이었을텐데, 당시 33세이던 북한 김일성은 나이로 보아 그들이 어릴 때부터 익히 이름을 들어왔던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은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집회 참석자들이 쉽게 간파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은 오랜 외국 생활로 연설하면서 한국말을 심하게 더듬거렸고 ※ (참조) 《  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직후 평양에서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 사상을 가르친 박일(朴一) 전 김일성대 부총장은 김일성이 주로 중국에서 빨치산활동을 한 탓인지 사물을 판단하는 데 우선 중국어로 궁리하는 습관이 있어 교육에 애로가 많았으며, 그의 한국말은 형편없이 서툴러 그가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김일성 정권 수립앞서 ML 학습/당시김일성 대 부총장(박일)씨가 교육  동아일보 1991.08.14. 4면
김일성 정권수립 앞서 ML주의 교육받아 연합뉴스 1991-08-14 》

 

※ (참조) 《  김일성 폭탄투척 극적 목숨건져   연합뉴스 1991-08-14 (레오니드 바신이 시사월간지 ‘소베르센노 세크레트노’(極秘)에 기고한 ‘대위동무’라는 글의 내용) : 조선인 출신 소련군장교들은 김의 조선어지식이 매우 부족한 반면 중국어는 꽤 알고 있는 편이라고 말했는데 이 때문에 상황에 적절한 연설문 작성에 애를 먹었다. 》

 

그의 본명이 김일성 아닌 김성주라는 것이 알려진 것도 그가 가짜라는 확신을 더하게 했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소련군 진지첸 대위(Капитан Цзин Жи-чен)"가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선 모습. 그가 너무 젊었기 때문에 가짜 소동이 일어났다. 뒷줄 소련군 장성들은 맨 오른 쪽부터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안드레이 로마넨코 소장,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 상장이다. 레베데프는 당시 무명의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우기 위해 민족 영웅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게 했다고 1991년에 증언했다. 

※ (참조) 《  김일성 외교비사 (박길룡, 김국후, 중앙일보사, 1994) pp.24~25. 박길룡 1920~ 은 전 북한 외무성 부상으로 1959년 소련으로 망명했고, 김국후 는 한소수교 직후인 1991년 중앙일보 특별 취재반의 일원으로 모스크바에서 생전의 레베데프를 여러 차례 만나 평양의 소련 군정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김일성 왼편은 강미하일 소련군 소좌 》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데려와 지도자로 내세운 김일성은 어려서 만주로 가 거기서 성장했고, 만주와 소련에서 활동하여 국내에는 연고가 거의 없는 낯선 사람이었으니 대중들은 해방 전 그가 어디서 무얼 했는지, 실제 이름이 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1920년 무렵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도 만나본 사람이 없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두 사람의 나이가 맞지 않아 동일인이 될 수 없다는 것만은 자명했다. 이후 많은 월남민들에 의해 그가 가짜라는 말이 남한 사회에 널리 퍼져 사실로 인식되었다.

 

북한 김일성에 대해 가짜 논란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해방 당시 북한 김일성은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생소한 인물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의 행적에 대해 많은 연구가 진행된 오늘날에도 베일에 가려진 부분도 많고, 진위 논쟁조차 선명히 가려지지 않고 있는데 해방 당시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해외에서 귀국한 이승만, 김구 같은 분들을 두고는 진위논란이 벌어질 여지가 없었지만, 김성주가 사칭한 유명한 김일성 장군은 명성과 달리 실체가 애매한 이름이었던 것도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실체가 분명한 사람을 함부로 사칭할 수는 없으므로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실체가 애매했기 때문에 북한 김일성이 그 이름을 사칭할 수 있었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해방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소하던 북한 김일성은 새로운 세대에게는 어릴 때부터 아는 익숙한 사람이 되어가고, 북한이 수십년간 지속적으로 선전해온 조작된 김일성 경력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늘어간 반면에, 일제시대 어릴 때부터 김일성 장군 이름을 듣고 자랐던 월남민 1세대들은 점차 세상을 떠나고 전설적 김일성 장군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새로운 세대들이 주축이 되니 김일성 가짜설은 힘을 잃고 진짜설이 힘을 얻게 되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는 북한 김일성의 일제시대 행적에 대해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으므로, 해방전에는 김일성이란 이름을 쓴 일 조차 없고, 항일투쟁을 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닐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것이 점차 밝혀져 마치 독립운동을 한 영웅이 맞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고, 그의 본명은 김성주이지만 한자로 金日成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진짜가 맞다고 주장할 빌미가 마련된 것도 진짜설이 힘을 얻는 배경이 되었다.

 

     이상..       0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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