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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락치 사건 성시백..01편 총 07편작
Korea, Republic of 돌통 0 287 2021-03-15 08:45:41
01편.         (총 07편작)

 

 

 

●  이승만과 국회 프락치

 

 

◇  이승만史 부산정치파동.. 국회프락치...미군 철수...중국 공산화...엉뚱한 개헌론

 

 

국회 진지 구축한 프락치들 맹활약...스탈린은 보고 받고 있었다


▲ 조선일보 1949년 1월1일자 1면, 2단톱 신년사설 제목은 '평화적 통일의 길로'였다. ⓒ조선DB

 

 

 

 새해부터 ‘미군 철수-평화통일론’ 봇물...국회는 결의안 통과
 
 
새해가 밝았다. 새 나라 대한민국이 나라 되어 처음 맞이하는 새해는
1949년 기축(己丑)년 황소의 해, 정부출범 4개월반 동안 정신없이 바빴던 이승만 대통령은
“반세기 굴욕을 거울 삼아 국가수호 맹세하자”고 신년사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동아-조선등 언론과 정당들은 1월1일 신년사부터 너도나도 미군철수와 평화통일을 
부르짖고 있었다. 한민당 김성수도 “미군 총철퇴”를 주장하였고
국회에선 전남 진도출신 김병회 의원을 비롯한 71명의 긴급동의로
<남북 화평통일에 관한 결의안>을 제출한 것이었다.


답답하고 분통이 터진 이승만은 국회로 달려갔다.
“남한의 미군을 다 내보낸다면 어떻게 되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다만 얼마라도 미군이 있어야 소련 군사가 내려올 수 없을 것이요.
여기 있는 공산당은 우리가 다 조처할 수 있다지만,
소련은 여기 내려오면 절대로 안되는 것이요.
미군이 있어야 소련이 넘어 올수 없을 만한 것을 만들어놓자는 것입니다.”
  
이 연설 후 국회의 결의안은 부결되었지만
미국 정부의 미군 철수방침은 기정사실화 되어있음을 이승만도 벌써 잘 알고 있는 터.
건국전부터 알았고 건국후 미군의 일부는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는 결심을 굳힌지 오래다.
문제는 국제정세도 모른 체 ‘국가자존심’ 운운하는 정치인들과
소련(북한)의 대남공세에 부화뇌동하는 정체불명의 국회의원들이었다.
  
▶ 한민당등 3당합당 ‘민국당’ 변신...김약수-조봉암등 좌파 연대 강화


제주도를 공산당 반란군이 쑥대밭을 만들어도, 여수-순천에서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도,
그 책임은 모두 이승만 정부가 져야 한다고 몰아붙이며
“총리 바꾸라. 장관들 바꾸라. 우리들을 영입하라”고 물고 늘어지던 정치판은
새해 들어 판도가 크게 바뀌고 있었다.
국회내 개헌의석을 확보하려는 한국 민주당(대표 김성수)는
지난해부터 세력규합을 서둘러 각당과 협상을 벌였다.
이승만의 일민주의(一民主義) 실현을 표방한 대한국민당의 신익희(申翼熙) 국회의장 세력과
손을 잡고, 지청천(池靑天)이 이끄는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과 합당에 합의한 인촌(仁村)은
1949년 2월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약칭 민국당)으로 통합 출범하여,
70석을 확보한 원내 제1당, 자칭 보수우익의 중심세력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독자노선을 내세운 소장파와 무소속의 좌익세력도 이합집산하다가
 ‘동성회(同成會)’로 통합하면서 ‘민족의 자주와 자결’의 깃발을 꽂고
첫째 목표로 ‘남북한 외국군의 완전철수’를 내걸었다.
그 대표가 국회 프락치사건의 주역 김약수(金若水, 당시 57세)이다.
‘남북한 완전 철군’ 카드는 소련의 ‘남조선 무장해제’ 술책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 이러한 소련의 대남공작을 민국당 김성수등 정치지도자들이 아는지 모르는지.


■ 김약수(자료사진)

 

 

일찍부터 레닌 물에서 놀던 청년 김약수는
각종 좌익투쟁을 벌여 세 차례나 감옥살이를 했다,
일본 경찰관 채용시험에 ‘김약수’ 이름이 출제될 만큼
그의 좌익투쟁은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뒤 지하활동 하던 그는
해방 후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의에 참여했다가
돌연 한민당 창당작업에 들어가 조직부장까지 지냈으며,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국회부의장에 선출되기에 이른다.


한편 조선공산당의 후배 조봉암은 무소속회를 꾸리며 김약수를 회장으로 삼는다.
좌익과 소장파의 총수가 된 김약수는 ‘민족자결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줄기차게 소신을 밝힌다. “남북을 막론하고 외국군대는 완전 철수해야 하며 남북은 화평통일을 해야한다.”
국가자존심을 내세우는 ‘평화통일안’은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을 사로잡는 마약이다.
  
▶ 완전철군 반대 이승만 “1882년 조미(朝美)조약 지키라“...‘태평양 동맹’ 체결 요구
 
 
정부수립 한달 후 9월 중순부터 은밀히 시작된 미군 철수로 7만명 병력은
새해 1월엔 7천500명까지 줄어 있었다. 3월 백악관 NSC(국가안전보장회의)는
“6월30일 철군 완료”방침을 확정,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하였다.
특사 무초(John J. Muccio)는 미군 잔류를 요구하는 이승만을 만나
철군의 불가피성을 설득하지만 ‘6.30 철군’ 목표를 6월30일까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이승만은 북한의 남침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병력과 총탄, 무기, 탱크등을 지원해주고
군사력 양성에 필요한 적절한 규모의 미군 주둔을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미군부는 “탱크는 한국지형에 안맞는다”며 거부하였고 최소한의 무기는 수송해주겠다며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였다. 국회는 이승만을 돕기는커녕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중국 대륙은 급격히 공산군에 무너지고 유럽에선 4월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탄생하였으니 “우리도 그와 같은 태평양동맹을 맺자”며 이승만은 미국에 간청하였다.
  
그는 무초를 만날 때마다 “1882년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미국은 지켜야한다”고 강조했다. 이 조약은 이승만이 1905년 고종 특사로 미국에 갔을 때  루즈벨트(T. Roosevelt) 대통령을 만나 “조미수호조약의 제1조에 규정된 거중조정(good offices) 의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도와달라”고 요구했던 것, 그로부터 19년뒤 알고보니 당시 이미 그 조약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동경에서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어 조선을 일본에 넘겨준 것이었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독립운동기간 내내 “미국은 코리아를 배신한 국갚임을 강조하는 연설을
미국 전역에서 계속하고 다녔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 직전 1941년 여름 출간한 유명한 영문저서 <일본의 내막: Japan Inside Out>에서 ‘미국의 한국 배신’을 폭로하고 “미국은 일본을 멸망시켜 조선을 구할 의무가 있다”면서
"맹목적인 평화주의자들은 간첩 오열과 같다. 하늘을 배신한 우상숭배 군국주의 일본이
곧 미국을 공격할 테니 빨리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하여 악을 치라”며 미국 여론에 호소하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벅 여사는 “진실을 알려준 무서운 책”이라는 서평을 냈고,
이 책을 출판한지 넉달 만에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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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책은 ‘놀라운 예언서’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국 군부는 이 책을 필독서로 지정하였고, 영국등 유럽 여러나라로 팔려 나갔다. 
가나한 떠돌이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이때 처음 몫돈을 만져봤다고 한다.
  
무초 대사(1949년 4월 부임)는 애치슨 국무장관(1949년 1월 취임)에게 
끈질긴 이승만의 요구사항들을 보고하였으나 협상은 지지부진이었다.
 5월8일 이승만은 마침내 특유의 직설적인 공개비판 특별성명을 발표한다.
  
“.....미군정 3년동안에 미국이 공산당과 타협함으로써
우리가 공산당을 비난하는 것조차 금지당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렇게 생명까지 위협받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우리나라를 반쪽으로 분열해 놓은채 공산당을 키워놓았으니
미국은 우리 힘으로 해결하기엔 너무나 많은 문제를 남겨놓았다.
미국은 공산당이 38선을 침범하여 우리를 공격한다면 
우리를 원조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할 때까지
잔류 주둔군을 철퇴하지도 못하며 철퇴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당황한 미국은 “어떤 개별국가와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역사가 없다”고
이승만을 달래고 비난하면서 미군사고문단 500명 잔류등 4개항에 합의한다. 
 
 
 
▶국회 프락치사건...이승만 “국회에 공산당이 잠입해 있다” 선언
 
 
 
중부전선을 지키던 육군 2개대대가 월북하고 해군 소해정 한척도 북으로 넘어갔다.
이승만의 대대적인 숙군작업을 피해 도망치거나 전향하는 장병들이 늘어났지만,
제주도 반란군은 ‘선전포고’로 맞서며 달려들었다.
중국내전 모택동 군은 샹하이까지 함락시키고 있었다.
이때 소련이 해방 이듬해 북한 단독정권 인민위원회 수립과 함께 결성한
이른바 ‘민주주의민족전선(민민전)’의 대남공세가 지상과 지하에서 갈수록 강화되어
시국은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지 혼미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건국직후부터 ‘미군철수’에 공동전선을 펴왔던 좌익세력과 중간파(김구의 한독당 등)는
평화통일론자 김약수를 중심으로 연합하였으며, 1949년도 예산안을 통과시키면서
느닷없이 “이승만 정부가 남북통일에 신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내각불신임안을 냈다. 
그것은 국정불신을 시비하여 개각론을 핑계삼아 미군철수를 압박하려는 정치공세였다.
  
5월 중순, 미군 철수론자 이문원 의원(전북 익산)등 3명이 구속되었다.
국회에 ‘진지’를 구축한 공산당을 제거하기 위해 검찰이 나선 것이다.
그들의 혐의는 62명의 국회의원들이 연명으로 유엔 한국위원회에 제출한 ‘미군 철수 진언서’가
남로당의 비밀지령 8개항에 따른 것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이란 것이었다.
 
 
“공산당이 국회 안에 잠입했다”고 선언한 이승만은
국회에 나가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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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정 두루막기 입은 70대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세계가 두 종류의 사상으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두 진영이 대립하여
피생아사(被生我死: 네가 살면 내가 죽는다)의 형세로 투쟁하고 있는 중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믿든지 저희 나라도 저희 국가도 저희 생명도 다 바쳐
공산화해서 남의 속국과 노예가 되기를 감심(甘心:달게 여김)하는 분자들이므로,
우리는 나라와 가정과 또 우리 자유를 보장해서 다 같이 잘 살자는 목적으로
우리의 목숨이라도 희생해서 민주주의를 세우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으면 우리가 자유로 살 수 있고
우리 자손까지도 자유로 잘 살 수 있을 것이지마는 공산주의에 정복을 당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몇십년 동안은 이러한 희망조차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계가 다 적색화할지라도 우리는 꿋꿋이 싸워서
죽어도 자유민으로 죽고 살아도 자유민으로 살겠다는 결심뿐인 것을
세계에 표명해야, 우리가 죽어도 산 백성일 것이요 살아도 영광스러운 생명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바는 모든 세계가 다 남에게 속아서 공산주의의 압박을 감수할지라도
모든 민주국들이 다 자유와 독립을 희생하고 공산화해서 살려고 아니할 것이므로
언제든지 결국은 민주주의가 승리를 차지하고 말 것이니,
이것을 알고 믿는 우리로서는 조금도 주저나 의뢰하지 말고
공산분자들과 함께 섞여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맹세해야 될 것입니다.”
 

이 연설을 듣는 국회의원들이 이승만의 골수에 사무친 '반공과 자유'를 얼마나 이해하였을지

아마도 다음해 6.25침략을 받고서야 알아 들었을까. 아니 그러지도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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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회 프락치사건 선고공판 보도. 조선일보 1950.3.15일자ⓒ조선DB

 

 


▶ 월북하는 여성 공작원 음부에서 찾아낸 '국회공작 보고서'
 
  
6월20일 국회가 끝나자 국회부의장 김약수를 포함한 의원 7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추가 구속되고 도합 13명을 수사하여 다음해 판결이 내려졌다.
최고 징역10년에서 3년까지 선고되었는데 부의장 김약수는 징역 8년.
서울지방검찰청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김약수 등은 박헌영의 지령으로 국회의원들을 포섭,
남로당에 비밀 입당시키고 미군 철수등 소위 합법투쟁을 벌였으며, 증거물로는
월북하려던 특수공작원 정모 여인의 음부에 숨긴 ‘박헌영에 보내는 국회공작보고서’를
찾아내 압수하여 광범한 수사를 진행하였다고 한다.
 
 
이승만은 올리버에게 쓴 6월28일자 편지에서 이 사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국회안의 몇몇 친공분자들과 반미분자들은 공산당 조직 남로당과 한국독립당(김구)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정부를 약화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별러왔습니다....(중략)....이들의 체포가 대통령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지만 의심할 수 없이 명백한 범죄의 증거가 드러났습니다.....최근에 박헌영의 비서가 어떤 여성과 38선을 넘다가 붙잡혔습니다....(중략)...
신익희 의장은 어제 나더러 이들 공산주의자 의원들을 모두 제명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프락치사건은 15회의 공판 끝에 1950년 3월14일 서울지방법원에서 피고인 모두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6.25남침으로 서용길 의원을 제외한 전원이 월북해 버렸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조작’이라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어 왔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권시절 ‘과거사 진상규명 명예회복’ 조사팀을 만들어
옛날에 종결된 공산당 관련 사건들을 재조사 심의해야 한다며 ‘무죄’로 판결을 뒤엎은 사람들,
 그리고 친북-종북등 좌익들과 이에 동조하는 정치인 학자들까지 ‘날조’ 주장을 말한다.
북한이 그간 남한 수사당국이 발표한 간첩사건들을 모조리 ‘고문조작’으로 일축해왔던 것은
당연하다지만, 남한 좌파 운동권도 마찬가지 '연구'를 발표하곤 하였다.
예컨대 박원순(현 서울시장)은 [역사비평] 1989년 가을호에서 “국회프락치사건은
고문에 의해 날조된 것으로, 국회 소장파 의원들이 이승만 정권과 국회내 반대세력인 한민당의 합작에 의해 정치적으로 제거 당했다”는 주장을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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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의 소련 군정 슈티코프가 쓴 일기장. (국사편찬위원회 간행)

 

 

▶국회프락치는 평양의 소련 군정 작품...슈티코프의 비밀보고서 공개
 
 
 
그러나 정작 결정적인 증거물은 소련 정부와 북한 당국에서 모두 공개하였다.
평양의 소련군정이 ‘제주 4.3반란’등 수많은 폭동 투쟁을 벌이는 동시에
 ‘국회프락캄등 남한 전복 공작을 벌인 또 다른 <슈티코프의 비밀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이는 1993년 김영삼정부 시절 소련이 한국에 제공한 한국전쟁관련 극비군사외교 문서들 속에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평양의 슈티코프가 줄창 스탈린에게 보낸 기밀보고서이다.
슈티코프는 남한 혁명작업의 일환인 국회내 프락치의 성과도 일일이 기록하여 보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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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크바 크렘린의 스탈린은 남한 적화공작을 일일히 보고받고 지시를 내렸다.(자료사진)

 

 

[북한 노동당은 남조선의 국회의원들 중 일부를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는 사업을 조직하였음.
노동당의 지령에 따라 이들 국회의원들은 국회안에서 남조선에서 시행되는 미국 정책 및 남조선 정부당국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요구사항을 제기하고 있음. 남조선에서의 미군철수를 내용으로 하는 62명의 국회의원들이 작성한 청원서, 정부 불신임 결의 제의, 모든 장관들의 사임 요구등이 실행되었음. 이런 요구는 국회 다수의 지지를 얻었음. 또한 법률안 심의시 이들은 반민족 범죄를 폭로하고 법안을 수정하도록 노력하고 있음.]
 
 
 
김일성 직속 거물간첩 성시백...엄청난 자금에 ‘화려한 암약’
 
 

<슈티코프의 기밀보고서> 말고도
북한 정권이 뒤늦게 ‘로동신문’을 통하여 스스로 밝힌
국회프락치사건의 증거 또한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규모이다. 
1997년 5월26일자 ‘로동신문’은 2개면 전면에 걸쳐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 성시백 동지>의 남한 공작활동의 공적사항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김구를 포섭 이용한 과정을 낱낱이 소개 하였다.


북한이 왜 이런 비밀공작을 반세기나 늦게 공개하였는지 배경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시백(成始伯)동지’의 활약 내용은 무시무시한 것이다.
국회프락치사건에 관한 대목만 요약 인용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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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물 간첩 성시백의 공적사항을 2개면에 특집으로 공개한 북한 로동신문. 1997년 5월27일자 지면.(자료사진)

 

 

[성시백 동지는 괴뢰 국방부부터 사령부, 헌병대, 육군 정보국에 이르기까지 
와해공작을 벌이고 남조선 미군부대와 장개석의 영사관까지 정보 조직선을 그물처럼 펴놓았다.
성시백 동지는 1948년 가을부터 괴뢰 ‘국회’ 공작에 힘을 넣었다.
괴뢰 ‘국회’안에는 각양각색의 분파들이 있었다. 성시백 동지는 이러한 분파와 그들 간의 싸움을 이용하여 우선 ‘국회’ 안에 민족적 감정과 반미의식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들로 진지를 구축하고 여기에 다른 ‘국회의원’들까지 포함하여
반괴뢰 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공작을 대담하게 벌여나갔다.
그리하여 ‘국회부의장’과 수십명의 ‘국회의원’들을 쟁취 포섭하는데 성공한
성시백 동지는 그들로 하여금 ‘국회’ 연단에서 ‘외군철퇴 요청안’과
‘남북 화평통일안’을 발표케 함으로써 남조선 괴뢰도당을 수세와 궁지에 몰아넣고
남조선 인민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안겨주었다...]
 
성시백은 1950년 5월 15일 오제도 검사가 체포했는데 당시 연루자만 무려 112명이나 되었으며, 수사중 북한의 6.25 남침이 터지자 서울 함락 하루 전인 6월 27일 간첩죄로 처형되었다. 
로동신문에는 "성 동지가 남반부 전체를 쥐고 흔들었는데 박헌영패가 밀고했다.
그의 시체라도 평양 근처에 묻어주려 했는데…"라는 김일성의 말도 실려있다.


김일성의 직속 거물 성시백(1905년 황해도 평산 출생)은 일제때 중국으로 건너가 
겉으로는 장개석 정부서 활동하는 체 위장한 중국 공산당원으로 그물망 조직의 명수였다.
김구등 임시정부 요인들과도 친숙하였으며 해방 후 월북했다가 다시 내려와 밀무역에 종사,
‘조선중앙일보’와 ‘우리신문’등을 발간하고 10여개 신문에 관여하면서 광범한 포섭을 벌여
남한 와해공작에 엄청난 자금을 퍼부었다. 중국 무역상을 자처한 ‘공작금 조달 천재’로서
그는 남한의 각분야와 내통하여 정칟경제·군사 정보들을 모아 북으로 보냈고,
이승만과 장개석의 진해 비밀회담을 비롯, 미국대사관의 워싱턴의 훈령과 기밀문서를 빼내고,
춘천지역 국군 2개 대대를 월북시킨 것도 성시백의 공작 작품이었다.  
김일성은 그에게 '공화국 영웅 1호' 칭호를 주고, 평양 혁명열사릉에 가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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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동신문이 공개한 주요내용중 초점은 성시백이 백범 김구를 포섭한 성공담이다.
장덕수 암살 배후로 지목당하여 궁지에 빠진 김구에게 통일정부 대권의 미끼를 던짐으로써 김일성의 남북 연석회의에 참가하게 만들었다는 북한 보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김구가 끝까지 반대하도록 성시백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는 주장등 그 의혹의 내막은
다른 기회로 설명을 미룬다. 사진은 1948년 4월 이승만의 만류를 뿌리치고 평양에 간
김구가 김일성을 따라 회담장으로 들어가는 장면.>
 
 

프락치사건 수사주역 김호익 경감, 박헌영 하수인이 권총 살해

 

 

 한편 국회프락치사건을 수사하면서 경찰과 법조계에서 활동하는 프락치들도 넝쿨처럼 드러났다. 당시 수사팀은 서울지방검찰청 차장등 검사 6명, 변호사 8명을 검거하였다. 

이들 프락치사건 수사에 큰 역할을 맡았던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 중앙분실장 김호익(金昊翊) 경감(31세)은 8월12일 저녁때 살해되었다. 범인은 남로당 서울총책 김삼룡의 하수인.
김 경감은 남로당 관련 사건을 도맡아 박헌영의 직계 간첩등 수백명의 공산분자들을 ‘청소’한
공로로 이날 총경으로 승진한 참이었다. 기회를 노리던 범인은 경찰국 별관 경비에게 신분증을
제시하고 들어가 승진 당일의 김 경감에게 권총을 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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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로당 암살범 총탄에 숨진 김호익 경감. 1949년 8월14일자 조선일보 2면 기사들.ⓒ조선DB

 


제주 반란군 ‘사령관’ 이덕구 사살, 한라산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 강화
 
 
김달삼에 이어 반란군두목이 된 이덕구는 대한민국 정부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행을 계속하다가 6월17일 결국 진압군의 총탄에 벌집이 되어버렸다. 한라산으로 도망친 빨치산들을 수색 소탕하며 지리산 백운산 태백산에 숨은 빨치산들을 토벌하는 군경들은 총알도 아끼는 형편이다.
 
 
▶백범 김구, 경교장에서 한독당 청년당원 손에 피살...전국이 놀라 통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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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구 피살을 보도한 조선일보 1949.6.27일자ⓒ조선DB

 

 

6월26일 경교장에 있던 김구는 평소 따르던 청년당원 안두희(安斗熙, 당시 31세) 소위가 또 찾아오자 소리를 버럭 질렀다. 평안북도에서 피난 온 반공청년 안두희는 며칠 째 “반공해야 산다”며 남북협상을 포기하라고 따지고 대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탕 탕 탕...김구는 쓰러졌다. 만72세.
종신형을 선고받은 범인 안두희는 [시역(弑逆)의 고민]이란 수기에 이렇게 써놓았다.
  
“아버님,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철전지 원한을 품고도 결행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극진한 사랑을 받아 온
가장 숭배하옵던 스승을 살해함에 있어서야...(중략)....두희 오로지 비장한 주검의 각오로써
시역을 감행했고 시역을 감행하면서 까지라도 그 전율할 음모를 폭로시켜야겠다는
의욕밖에 없었던 것입니다....(중략)...그때 경교장에서 즉석에 자살을 감행하였던들....”
즉석에서 잡힌 안두희는 군 수사기관에 넘겨졌다.
 
백범 암살사건은 김구파와 좌익들이 배후에 대한 의혹을 수십년간 제기했지만
그것은 '이승만 죽이기'의 정치적 공세로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안두희가 수기에서 말한 ‘전율할 음모’란 무엇인지 지금도 그것이 사뭇 궁금하다. 
김구가 당시 무슨  음모를 꾸몄길래 숭배하는 스승을 쏘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김구를 남한파괴 도구로 이용했던 <슈티코프의 비망록>에서 음모의 그림자가 추정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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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김구의 장례식날 조선일보 2면 보도. 1949년 7월6일자.(조선DB)

 

 
중국 대륙 공산화...트루먼의 냉담한 편지...이승만의 몸부림
 
 
 
절박한 위기의식 속에서 미군 철수를 지켜봐야했던 이승만은
다시 한번 특사 조병옥을 미국에  파견하여 세가지 요구를 하였다.
첫째 6만여명 한국군을 10만명으로 늘려 무장시킬 장비,
둘째 북한의 남침시 미국이 한국을 보호한다는 공개적인 약속,
셋째 NATO와 같은 군사동맹을 체결할 것 등이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단독보장이나 군사개입은 전혀 불가능하다"며
세가지 모두 즉석에서 거부하였다. 애치슨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에 관심조차 없었다.
이승만은 8월20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또 다시 친서를 보낸다.
”한국군은 현재 이틀치 탄약밖에 없으니 북한 남침시 필요한 탄약과 무기를 지원 해달라“ 
부탁을 넘어 눈물의 애원을 담은 호소문이었다.

이에 대한 트루먼 대통령의 대답은 너무나 냉소적이고 경멸적인 것이다.
”감당도 못할 대규모 군사력은 생각 말고 경제력을 키워 국민 먹여 살릴 걱정이나 하라“
이 편지를 받은 이승만은 입술을 떨면서 "잘 쓴 편지로군" 큰 소리로 읽어내려걌다.
이승만은 맘에 안드는 글은 다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읽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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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루먼 미국대통령(자료사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중국의 좌우전쟁은 공산군의 파죽지세, 중경으로 피난 갔던 장개석 정부는
마침내 바다건너 대만으로 도망치기에 이르고 만다. 10월1일 공산당정부 출현.
“중국이 공산화되었으니 다음 차례는 한반도 남부 대한민국”이라는 가공할 전망 앞에서
속수무책인 74세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 남침의 예감에 전율한다. 
이미 미군철수에 대비하여 ‘5만명 민병대’를 조직하였지만...
전국 고등학교와 대학에 ‘학도호국단’을 출범시켰지만...
5개 청년단체를 ‘대한 청년단’으로 통합하였지만...
이승만 스스로 이들 조직의 총재가 되어 훈련시키고 있지만...
전쟁 나면 이들을 국군통수권자로서 직접 지휘해야 할 터인데...
총...총알...탱크...전투기...미국에 ‘최소한의 군사원조’를 간청하지만 마이동풍이다.
 “돌맹이나 몽둥이를 들고서라도 적군을 반드시 물리치자”고 외치며
그저 정신무장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막다른 골목에 갇히고 만 것이었다.

이승만은 결단을 내렸다. 미군정 3년간 키워놓은 공산당 단체들, 남로당과 근로인민당 등
16개 정당과 117개 사회단체 등 소위 ‘민족주의민주전선’ 산하의 모든 좌익세력을
불법화하는 조치를 10월18일 단행하였다.

38선에는 북한군의 도발로 거의 날마다 무력충돌이 계속되었고,
국회에선 정체불명 의원들의 파상공세 앞에 우익세력들도 허둥지둥 맥을 추지 못하였다.
적들로 둘러싸인 사면초가 외로운 섬나라가 되어버린 대한민국, 이승만은 손을 모았다.
“하나님, 이 나라를 구하소서. 우리 국민을 버리지 마소서”
이 기도는 24세때 한성감옥에서 고문받던 사형수가 성령을 받던 순간 터진 기도,
그때부터 평생 자나 깨나 기도, 국회도 정부도 나라도 기도로 세웠다고 믿는 대통령,
“대통령은 걸어 다니면서도 중얼중얼 기도합니다. 왜 그러시는지 저는 다 알지요.”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뒷날 회고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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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복 차림의 프란체스카 여사와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이상한 개헌안 '임기 연장 요구'...꼼수에 체면 더 구겼다
 
 
11월이 되었다, 기회만 있으면 개헌론을 떠들던 국회가 마침내 개헌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놀랍게도 내각책임제 개헌이 아니라 ‘임기 2년 연장안’이었다.
헌법에 제헌의원 임기는 2년으로 제한되었으나 이를 2년 더 연장하여
대통령 임기와 맞추자는 아이디어는 큰 호응을 얻어 100여명이 서명하였다.
정당들이 임기연장 개헌에 착상한 것은 지난 5월부터였다. 
국회 프락치사건으로 의원들이 구속되자 '신분보장' 방책으로 떠오른 게 임기연장 꼼수,
눈코 뜰새없이 격동하는 시국에 차마 내각제 개헌안을 내지 못하는 체면 때문이었다.
11월 9일 언론에 나온 개헌 이유를 들어보자.
 
 
“밤낮으로 출몰하는 게릴라 때문에 지방의 치안상황이 불안하고 물가고가 극심해서는 
내년 5월에 예정대로 국회의원선거를 치를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제헝의원의 임기를 2년더 연장하면 어떻겠는가.
 더구나 내년에 선거를 치르면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가 계속 2년씩 엇갈리기 때문에
국정수행에 차질이 생길 우려가 있다. 특히 지금 같은 물가고 속에서

내년에 총선거를 치르기 위해 7억 내지 8억의 선거비용을 부담하는 것도 어려운 형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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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기간 정부와 정면대결한 국회는 개헌에 의견일치, 각파들이 공동전선을 펴기로 했다는 조선일보 톱기사.ⓒ조선DB

 

 

스스로 지적한 것처럼 혼란하기 그지없는 나라 형편에서 내놓은 ‘임기2년연장’은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뒤에 숨겨놓은 트로이의 목마 같은 것, 여차하면 동시처리 계책이었다.
시국불안과 물가고를 내세운 이 궁색한 개헌이유는 금방 거센 비난에 부딪치고 만다.
다급한 국가문제가 산적한 마당에 “헌법을 제정한지 1년 만에 겨우 임기연장 개헌”이라니
사회단체와 언론마저 반대여론이 들끓었지만 개헌논의는 수그러들 줄 몰랐다.
 
 
 
   0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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