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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는 항미원조 시리즈 02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91 2021-03-20 18:47:19
 02편.



차오관화 부인 "대학 때 항미원조에 열광”

몇 년 후 베이징에서 황먀오즈와 위펑의 귀국기념 전시회가 열렸다. 개막식 참석자 면면이 일품이었다. 둔황(敦煌)학회 비서장이 “여기 폭탄이 터지면 한동안 중국은 깜깜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황먀오즈가 내게 종이쪽지를 건넸다. 장한즈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주소 보니 어딘지 알 만했다.

 

 

스자후퉁(史家胡同)의 고풍스러운 스허위엔(四合院)에서 노부인을 만났다. 마오쩌둥과 장한즈 부친의 친필 족자가 걸려 있는 거실은 품위가 넘쳤다.

“평양에 가 봤느냐?” “못 가봤다.” “여행은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다.” “남편이 정전협정에 참여한 지 몇십 년이 지났다. 아직도 자유롭게 오가지 못하느냐? 차오관화는 한국과 인연이 많았다. 대학생 시절 항미원조로 전국이 열광했다. 나도 매일 거리에 나가 항미원조 참여를 외쳐 댔다. 우리 연령층 모두가 그랬다.” 나는 이 사람들이 항미원조라 부르는 6·25전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자료를 닥치는 대로 모았다. 기상천외한 것들이 많았다.

 

 

차오관화의 말년을 물었다. 노부인의 말은 횡설수설 두서가 없었다.

“세상 떠나기 며칠 전 시중쉰(習仲勛·습중훈)과 우슈취안(伍修權·오수권) 동지가 다녀갔다. 김일성 주석은 마오쩌둥 주석에게 극진했다. 마오 주석은 김일성이 생일선물로 보낸 황주 사과를 내 결혼 전날 밤 보내 줬다. 남편은 개성 얘기를 자주 했다. 딸 이름도 개성 옛 지명인 쏭두(松都)라고 지었다. 항미원조 정전 담판 북한 측 대표 남일이 지어 줬다. 항미원조 초기, 우슈취안 동지가 유엔에 갈 때 남편도 같이 갔다.”

 

우슈취안은 4인방 재판의 재판관이었다. 6·25 전쟁 초기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차오관화와 함께 참석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6·25전쟁 발발 초기 중화인민공화국은 유엔회원국이 아니었다. 당시 국제사회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는 대만의 중화민국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남침을 시작했다. 소련제 탱크가 38선을 무너뜨렸다. 이튿날 미국이 참전을 선포했다. 3일 후,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명령으로 미 7함대가 대만해협으로 이동했다. 필리핀에 주둔하던 미군도 인도차이나 전쟁에 투입했다.

 

신중국은 미군이 중국을 포위했다며 발끈했다. 외교부장을 겸하던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성명을 냈다. “미국이 무슨 행동을 하건, 대만이 중국에 속해 있다는 것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 7함대의 중국영토 침범은 유엔헌장의 철저한 파괴를 의미한다.”

인민정부 위원회 8차 회의에 참석한 마오쩌둥도 포문을 열었다.

“전 세계 각국의 업무는 그 나라 인민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아주(亞洲)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주 인민들의 일이다. 미국의 간섭을 받을 이유가 없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동은 아주 인민들의 폭넓고 단호한 저항을 초래할 것이다. 1월 5일 트루먼은 대만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다. 5개월 전의 성명이 허위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대만의 국민정부는 북한의 남침 소식에 들떴다. ‘반공대륙(反攻大陸)’의 기회가 왔다고 흥분했다.

“북한을 통해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진입하고, 동남 해안지역을 제2의 전쟁터로 만들 수 있다”며 전쟁이 확대되기를 희망했다. 총통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전쟁 발발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에게 깊은 관심 표명하는 전문을 보냈다.

 

 

이상.. 03편에서 계속~~

6월29일 맥아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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