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김일성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소련군 2인자인 레베데프 정치사령관, 조만식에 이어 세 번째 연사로 나선 김일성은 “모든 힘을 새 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인민대중의 이익을 철저히 옹호하며 나라와 민족의 부강발전을 확고히 담보할 수 있는 참다운 인민정권” 건설을 제창했다. 그 방법으로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인민대중을 망라하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애국적 민주역량을 민족통일전선에 튼튼히 묶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고 (임영태, <북한 50년사 1>(들녘 펴냄) 46쪽) 9월 19일 입국한 김일성이 한 달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활동노선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귀국 전에 스탈린을 만나 한국 통치자로 낙점을 받았다는 설이 있었는데, 근거가 아직도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의 ‘괴뢰성’을 선전하는 의도에서 나왔던 것 같다. 귀국 전 몇 해 동안 소련극동군 산하 88여단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이북 주둔군 간부들과 우호적 관계를 가졌지만, 당시 소련 점령군은 조만식의 역할을 더 중시하고 있었다.
찰스 암스트롱은 <북조선 탄생>(김연철-이정우 옮김, 서해문집 펴냄)에서 해방 당시 소련에게 북한 또는 한국을 공산국가로 만들 의지가 별로 없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당시 미국 국무성이 주장한 것처럼 소련의 북한점령이 ‘접수를 위해 이미 짜여진 공식’이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는 것이다. (75쪽) 베트남과 중국의 공산당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미온적이었다는 사실과 연결해 보더라도 수긍이 가는 의견이다.
북한에서는 지방의 자치-보안 조직이 자발적으로 많이 이뤄졌고 소련군은 일본인의 행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바로 넘겨주는 등 자발적 조직을 대체로 지원했다. 8월 말까지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산하에 145개 지방 지부가 결성되었다고 하는데, 건준 중앙부의 역량 한계로 보아 하향식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 지방조직이 스스로 건준에 연락을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 상당수는 물론 이북 지역에 있었을 것이고, 9월 들어서도 더 생겼을 것이다. 미군의 남한 진주에 따라 건준 중앙부와의 연락이 막히자 지방 조직들은 각 도의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정비되었다가 10월 8일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열리고 10월 28일 북조선 5도 행정국이 설치됨으로써 북한 지역의 지방행정 체계가 일단 완성되었다.
자발적 지방조직을 구성한 제일 큰 세력은 민족주의자들이었고(우익) 사회주의자들이(좌익) 그 다음이었다. 소련군은 좌익을 다소 북돋워줌으로써 양측 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꾀하되 우익의 주도권을 용인했다. 우익의 조만식에게 큰 권위를 인정한 것이 그런 방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 동지들은 좌익의 주도권을 확보함으로써 우익과의 연합체제에 참여하는 길을 찾았다. 9월 중순 조선공산당이 서울에서 ‘재건’되었지만 북한 지역에는 중앙당과 연락이 잘 되지 않는 문제도 있고 박헌영 노선에 대한 불만도 있었기 때문에 북한 내 지도력의 별도 수립을 바라는 당원들이 많았고, 김일성 중심의 빨치산 집단은 그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다.
소련군 점령 하의 이북에서 김일성은 여러 가지 리더십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크게 4가지로 보면
1. 항일 투쟁 경력으로 민족주의자들의 존중을 받을 수 있었던 점.
2. 소련 극동군에 4년간 편성되어 있어서 점령군 간부들의 신뢰를 받은 점.
3. 국내 무장투쟁이 없던 시절 보천보사건 등으로 큰 명성을 쌓아놓은 점.
4. 그의 손발과 두뇌가 되어줄 정예집단을 보유한 점. 평양 시민대회에서 그의 연설은 스탈린 식 교조주의와 거리가 먼 것이었는데, 그런 유연한 노선으로 당당히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리더십의 조건이 든든하기 때문이었다. ‘국내파’ 일부는 김일성이 대표한 ‘빨치산파’의 ‘민족통일전선’ 노선이 “소부르주아적 우경투항주의”라고 공격했지만, 그들의 ‘인민전선’ 노선이 조선의 실정을 무시한 좌경이라는 빨치산파의 비판이 더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임영태 앞의 책 65쪽)
김일성과 박헌영이 10월 8일에서 9일에 걸쳐 개성 인근 소련군 38경비사령부 회의실에서 만났을 때 핵심 의제는 북한의 독자적 공산당 조직을 세우는 문제였다. 박헌영은 코민테른이 세웠던 1국1당 원칙에 입각해 이를 반대했으나 김일성이 제기하는 현실적 필요를 묵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세우는 절충안으로 마무리되었다.
바로 이튿날(10월 10일) ‘조선공산당 이북5도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의 이름으로 북조선분국 창건을 위한 예비회의가 열렸고, 13일에 분국 설치 결정과 함께 집행위원이 선출되었다. 예비회의에서 김일성은 박헌영의 8월테제와 다른 별도의 노선을 제출했으나 채택되지 않았고, 집행위원회에 빨치산파가 많이 참여하지 못했다.
당시 2천여 명 수준의 북한 지역 공산당원 속에서 빨치산파의 세력은 아직 미약했다. 그러나 독자적 조직인 북조선분국 설치는 김일성의 활동무대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이 단계에서 큰 승리였다. 훗날 북조선노동당을 남조선노동당과 대등하게 따로 세울 발판이 마련된 것이었다. 10월 8일 개성에서 만날 때 박헌영은 조직력의 대표였고 김일성은 대중성의 대표였다. 조직력은 억압상태 하의 공산주의운동이 보인 특징이었다. 식민지시대의 불법 투쟁에서 비롯된 조직력 위주 운동이 미군정 하의 남한에서도 계속되었기 때문에 박헌영의 지도력이 확고했던 것이다. 반면 소련군 점령 하의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개방적 노선이 유리한 조건을 누리고 있었다.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 ‘재건’ 과정에서 가장 큰 고비가 소위 ‘장안파’의 경쟁을 따돌린 것이었다. 바로 해방의 날인 8월 15일 밤에 여러 계열 공산주의자들이 장안빌딩에 모여 공산당을 결성하고 당 간판을 내걸었다. 이것을 ‘장안당’ 또는 ‘장안파’라 한다.
장안파 핵심인물들과 그 소속 계열들이 1930년대 말 이후 운동을 중단하고 있는 동안 박헌영이 속한 경성콤그룹만이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박헌영은 콤그룹을 끌고 공산주의운동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8월테제를 작성했다. 1928년 12월테제에 의해 해체된 조선공산당의 법통을 잇는다는 노선이었다. 김남식과 심지연은 <박헌영 노선비판>(세계 펴냄)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 이처럼 재건위가 발족되고 8월테제가 나오자 각 계보의 공산주의자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장안파의 충격이 컸다. 일제하에서의 공산주의운동에서 기본적인 결함으로 지적된 당의 분열과 파벌싸움이 해방 후에 또다시 재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재건위 중심으로 당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그를 반대할 만한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 ]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1945년 8월 24일 장안당은 중앙집행위를 개최하여 당의 진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 후 9월 8일에는 장안파의 중심인물들이 주체가 되어 재건파를 대표한 박헌영과 함께 열성자대회를 개최하고 박헌영 계의 재건준비위에 합세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박헌영은 9월 15일 조선공산당 재건을 선포하게 되었다.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는 원래 개방성과 포용성을 추구하는 이념이다. 그런데 그 이념을 가장 투철하게 추구하는 공산주의운동이 역설적으로 정통성을 중시하고 폐쇄적인 성향을 많이 띠게 된 데는 소련 볼셰비키혁명의 경험이 큰 작용을 했다. 혁명의 승리자들이 자기네 헤게모니투쟁의 경험을 혁명의 표준적 과정으로 인식하고 소련과 코민테른의 정책노선에 이를 반영한 것이었다.
1920년대 이후 식민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를 환영한 것은 식민지 상태에서 심화되고 있던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는 길로 보았기 때문이다. 해방 당시의 지식층 가운데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개 사회주의의 역할에 기대감을 가지는 정도 좌익의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운동의 폐쇄성과 극단성은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재건’ 시점의 공산당원 수가 수천 명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8월테제는 12월테제의 뒤를 이어 계급투쟁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남한에서 공산주의운동은 지식층 좌익 속에 확산되기보다 현장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 북한에서는 잠재적 좌익이 공산주의운동에 흡수되었다. 미군정의 박해라는 악조건도 물론 작용한 결과이지만, 박헌영 일파의 편협한 극좌노선도 큰 요인이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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