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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론
Korea, Republic of 돌통 0 266 2021-04-05 12:23:01
 ●  독립전쟁론



독립전쟁론(독립전쟁론)이란 무력에 의해 일제의 침략을 구축하자는 방략, 즉 근왕순절의 애국주의·무저항주의의 만세 시위 및 외교방식의 독립청원운동으로는 민족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항일무장투쟁방략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독립전쟁론은 한민족이 적기에 독립전쟁을 전개, 승리함으로써만 일제를 물리칠 수 있다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적기란 민족의 근대적 정칟경제·문화의 역량을 향상시켜 시기를 기다리다가 일본제국주의가 팽창하여 중·일전쟁 내지 노·일전쟁 혹은 미·일전쟁을 감행할 때를 의미한다.


독립전쟁론의 출발은 을사늑약 체결 이후 본격화된 의병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는 의병토벌작전을 전개하여 한민족의 국권수호운동을 봉쇄하고 결국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식민지화하였다. 국내의 반일 의병부대는 1910년대 중반 무렵까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고, 그 후 작전상 국외로 이동하였는데 이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 구한국군대 출신들로서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고 신식무기를 소지한 민족군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위정척사사상(위정척사사상의 신봉자로서 시대착오적인 일면도 없지는 않았으나 강렬한 항일의식의 소유자들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들이 국내에서의 의병전쟁에 한계를 느끼고 만주·노령지역으로 이동함에 따라 종래의 의병전쟁은 독립전쟁으로 그 성격이 전환되었다.



한편 애국계몽운동계열 가운데 신민회 소속 독립운동가들은 국외 독립군기지건설 및 무관학교 설립계획에 따라 서간도지역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재만한인사회를 형성하여 이를 기반으로 독립전쟁기지를 건설하였는 바,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설립되었던 경학사·신흥강습소 등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겠다.


1919년 3·1운동 직후 만주·러시아 지역에서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은 ‘국내진공작전’에 의하여 국내에 거점을 확보함으로써 열강으로부터 교전단체로 인정받으려는 전략적 목표를 갖고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하의 무장투쟁도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열강에 대한 ‘독립청원적’인 임정의 외교 노력은 성공을 거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은 1910년대에 건설된 독립운동기지 및 재만동포들에 대한 민족의식의 고양을 바탕으로 192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1920년 최진동·홍범도 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대한독립군이 삼둔자전투와 봉오통전투(봉오동전투에서 대승한 것을 비롯하여, 국민회군의 최진동과 대한독립군의 홍범도, 그리고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북로군정서군도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에 일제는 재만대한독립군을 토벌하고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소탕하기 위하여 나남(라남 21사단과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19사단을 동원, 소위 훈춘사건(혼춘사건을 핑계로 경신참변(경신참변을 도발하였다. 이에 대한독립군은 전략상 북상하여 일시 밀산(밀산에 머물면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전열을 정비하였다. 그러나 그 중 일부는 노령지역으로 다시 이동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이 때 노령으로 이동한 재만독립군은 자유시참변(자유시참변으로 많은 희생을 치루었다. 이 사건 후에 김좌진·이청천 등은 만주로 돌아와 독립군의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한편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단체 중에는 구춘선(구춘선 등이 연길현 춘양향을 중심으로 조직한 대한국민회가 있었는데, 대한국민회는 북간도 일대에 133개의 지회를 갖고 있었다. 이 단체는 민정 및 군정 조직으로써 재만한인의 권익옹호와 국내에서의 외적구축작전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연길현 명월구를 중심으로 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대한국민회군과 상호 협조하여 독립전쟁을 추진하였다. 서일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중광단(중광단은 3·1운동 이후 정의단(정의단으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1919년 12월 재만 독립군이 임시정부 산하로 편입되면서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었다. 복로군정서는 5개 분단과 70여 개의 지단을 갖고 있었으며 김좌진이 사령관에 취임한 후 강력한 독립군단으로 발전하여 서간도 지역의 서로군정서와 협력하여 적극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일본군이 만주에 출병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경신참변을 일으킨 이후 재만 독립군은 재편성되어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되었다. 1922년에는 관전현(관전현( 삼도구에서 남만통일회(남만통일회가 개최되어 대한통군부(대한통군부를 조직하였다. 대한통군부는 군사적 기능과 함께 재만 한인사회를 포괄하는 지방자치정부적 성격을 지닌 단체였다. 또 남만통일회에 이어 남만한족통일회(남만한족통일회에서는 남만주 항일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 대한통의부(대한통의부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대한통의부내의 전덕원(전덕원)을 비롯한 복벽주의(복벽주의) 인사들은 탈퇴하여 새로이 의군부(의군부)를 설립하였다. 


대한통의부와 의군부의 복벽 및 공화라는 이념적인 대립은 유혈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의군부는 임시정부와 교섭하여 1924년 8월 통화현(통화현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륙군주만참의부)로 편입되어 민정과 군정을 통할하는 새로운 조직으로 정비되었는데, 중앙기관으로 의회를 설치하고 민정관할구역은 장백산(장백산) 아래 봉천성(봉천성) 집안현(집안현)을 중심으로 압록강 연안지역을 포함하였다. 참의부의 위치는 국내왜적구축작전을 수행하기에 유리 하여 조선총독 재등실;사이또오 꼬마도오)의 승용차를 공격하기 도 하고, 고마령전투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재만한인사회를 대상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으며 병역의무제도를 실시, 재만 한인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독립군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통의부·의군부·참의부 등으로 재만독립운동단체가 분열됨에 따라 항일투쟁전선의 재통일을 위한 전만통일의회주비회(전만통일의회주비회)가 길림에서 개최되었고, 대한통의부 대표 김동삼 등 제단체 대표들이 회합하여 통합을 결의, 정의부(정의부를 조직하였는데 정의부 의장에는 김동삼이 선출되었다. 관할지역은 남북 만주의 광대한 지역으로 하얼빈(합이빈) 이남 흥경) 서쪽지역이며 치안유지를 위해 무장대가 조직되었다. 정의부에서는 재만한인사회에 소득세를 부과하여 제정문제를 해결하였으며, 중앙행정위원과 분과위원을 선출하고 자칟군사·교육·재정·생계 등의 집행부서를 설치하였다.


참의부·정의부의 활동지역은 동삼성 내에서도 주로 서간도지역이었는데, 북만지역에서는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가 설립되었다. 신민부는 1925년 1월 길림성 목릉현에서 부여족통일회의의 개최를 통하여 조직되었는데 중앙위원회와 참의원·검사원을 두어 삼권분립의 공화체제를 확립하였다. 김좌진이 군사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며, 국내진입전을 수행하기 위한 예비공작을 시도하는가 하면 때로는 한·중 연합군을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재만한인사회내에 침투해 있는 밀정과 부일어용단체인 조선인민회·거류민회·보민회·조선인회)·시천교(시천교·청림교·제우교 심양현 조선인협회(반양현 조선인협회) 간부들을 색출하여 숙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직과 활동을 토대로 북간도 일부지역을 제외한 전만주지역은 참의부·정의부·신민부 등 삼부의 관할내로 편입되었다. 이 사이 1925년에 일제와 동북군벌은 소위 삼시협약을 체결하여 재만한국독립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한편, 1926년 10월 북경에서는 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가 결성된 것을 위시하여 상해·남경·광동·천진 등지에서는 민족유일당운동이 활발히 추진되었고, 국내에 서도 민족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어 신간회가 조직되었다. 이에 재만독립운동단체들 사이에서도 정의부의 선창으로 삼부통합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시사연구회를 구성하는 한편, 유일당조직촉성회의를 개최하기 위하여 각 단체에 대표 파견을 요청하게 되었다. 민족유일당회의는 1928년 5월 하순 길장연로 신안촌에서 18개 단체 대표와 상해촉성회 대표 홍진 등이 참석한 가운데 통합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기성 단체를 부인하는 전민족유일당 촉성회파와 기성 단체를 주축으로 하는 협의회파와의 갈등으로 통합회의는 그만 분열되고 말았다.


촉성회측은 정의부 탈퇴파인 김동삼, 신민부 군정파인 김좌진 및 참의부 주력 세력 등을 중심으로 재만유일당책진회(재만유일당책진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김동삼·김좌진 등은 임시 혁신의회를 편성,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를 만들었으며, 이어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였다. 한편 협의회측은 정의부 주력 세력과 신민부 민정파 참의부 일부 세력 중 평안도·황해도인을 중심으로 국민부및 조선혁명당(조선혁명당을 조직하고 당군으로 조선혁명군을 양성하였다.


한편, 1930년 7월 홍진·이청천 등은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여 산하에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였는데, 총사령관에는 이청천이 임명되었다. 이청천은 북만지역을 활동영역으로 하여 중동선을 중심으로 26개 지역으로 군구를 구분하였다. 그리고 동북사변(동북사변 이후 한·중연합 반만항일전을 계속하여 중동선을 경계로 동부는 한국독립군, 서부는 중국호로연합군(중국호로련합군)이 담당하기로 하고, 후방 군사훈련은 한국측이, 전쟁군수품은 중국측이 각각 맡기로 하였다.


일제관동군이 1932년 2월 중동연선을 공격하여 한·중 연합군이 의란 등지에서 참패하자 이청천은 흑룡강성 통화현으로 후퇴하여 부대를 재편성하고, 1932년에는 쌍성보를 공격하여 일본군과 괴뢰만주군을 전멸시켰다. 한편 한국독립당 중앙회의에서는 군사활동지역을 연길·왕청·동녕·훈춘·영안현 등지로 정하고 중국 구국군과의 연합과 각 군구의 군사훈련을 받은 청년들을 소집하고 황학수를 부사령으로 임명하여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1933년 초에는 중국군 14사단장 채세영과 한·중 연합군을 조직하여 경박호전투(경박호전투에서 대승하였으며, 사도하자전투에서도 크게 승리하였다.


한국독립군 총사령 이청천은 사도하자전투의 여세를 몰아 동경성을 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일본군은 반총:이이즈카)연대로 하여금 한국독립군을 공격하게 하였으므로, 이 때 한국독립군은 근거지를 이동시켜 노전저하에 도착, 대전자령의 지형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대패시켰는데, 이 승리는 한국독립군의 대표적인 승리로 꼽을 수 있는 큰 성과였다. 한·중 연합군의 반만항일전에는 한·중 양민족의 공동 대항이 선결과제였다. 그러나 중국측의 배신행위로 독립군의 패전이 비일비재하였으며, 이러한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한국 독립군은 끝까지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남만주지역에서 결성된 조선혁명군 또한 양세봉 장군을 중심으로 일제에 대항하여 큰 성과를 을렸으나, 일제의 공격으로 1930년대 중엽에는 중국 본토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았다. 결국 이들은 임시정부 광복군의 모체가 되었다.


이와 달리 1930년대 만주지역에서는 다수의 조선인들이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소속되어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동북인민혁명군을 들 수 있다. 동북인민혁명군 가운데 남만주를 기반으로 하는 제1군과 동만주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제2군은 조선인들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동북인민혁명군은 1935년 7월 코민테른 제7차 대회 이후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되어 활동하였다. 동북항일연군내 조선인들의 최대 전과로서는 1937년 보천보전투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동북항일연군의 이러한 활동도 일제의 대토벌로 점차 위축되어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활동의 무대를 시베리아로 옮기게 되었다.


한편, 독립전쟁론은 중국본토지역에서도 활발히 추진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우선 신한혁명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한혁명당은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국제정세가 급변하자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상해에서 조직되었다. 이 단체에서는 독립운동의 방략을 독립전쟁론으로 규정하고 이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즉, 독일 정부의 보증 아래 중국 정부와 「중한의방조약)」을 체결하여 군자금과 병기를 마련함으로써 대일전쟁을 수행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독립운동계획은 독립전쟁론과 외교독립론을 병행하되 독립전쟁에 중점을 둔 것이라 하겠다.


북경에 있던 신채호·박용만·신숙 등은 1921년 북경에서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이들 역시 독립전쟁론을 추구하였다. 또한 1922년 10월 28일 상해에서 조직된 한국노병회도 역시 독립전쟁론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한국노병회에서 추진한 독립전쟁론은 안창호의 준비론과 결합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즉 한국노병회는 10년을 목표로 전비확보와 노병의 양성이 준비되면 최종적으로 독립전쟁을 결행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1930년을 전후하여 중국본토지역에서는 독립운동의 정당들이 다수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1935년 이후 민족혁명당과 한국국민당 등 양대 독립운동 정당으로 정비되었다. 그런데 이들 양 정당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독립전쟁론을 추구하였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점차 실질적인 무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 결과 1938년에는 조선의용대를, 1940년에는 광복군을 결성하게 되었다.


조선의용대 대원들 가운데 일부는 화북지역의 연안지역으로 이동, 1942년에는 화북조선독립동맹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1941년 하북성의 호가장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화북지역에는 조선인들이 숫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 역시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었다.


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 산하의 무장독립군으로 창설되었다. 그후 광복군은 19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의 「대일본선전포고선언?선언)」과 아울러 중국의 각 지역에 투입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광복군은 일본군을 직접 상대한 독립전쟁을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동북항일연군·조선의용군과 함께 마지막까지 항일전을 전개한 무장투쟁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후 미군정하에 귀국하여 해방정국에서 이렇다 할 역할을 못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창군과정에서도 국군의 주역이 되지 못하고 만주사관학교와 일본사관학교 출신들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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