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6.25)중에 노획한 북한 문서자료(사료)들.. 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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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편 ●●● 노획한 북한 필사 문서 ※ 한국전쟁(6.25)중에 노획한 북한 문서자료(사료)들.. <해제된 문서들> ● 한자가 많이 섞여있다. 이 글을 그대로 올리고~ 그 다음 한자를 한글로 해석한 글을 올리고~그리고 한자는 빼고 해석한 한글만 올리는 순이다. (솔직히 한문이 약해서 내용글이 이해가 잘안되서.. 혹시 글 전체적으로 확실히 이해가 되시는 분들은 댓글로 나마 풀이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 원문 ] ◇ 해제된. 노획 북한 필사문서 -6·25국제전쟁의 개전관계문서와 남침예지설의 검토- 6·25에 勃發한 韓半島國際戰爭은☆《참조사항》16. 그 悲慘性에 있어서 1592年의 壬辰·丁酉國際戰爭以上이 될 수 있는 歷史的悲劇이었음으로 여기에 對한 眞實追求와 史料의 發掘은 韓民族全體가 切實히 바라는 것들임에 틀림없다. 以下에 紹介한 文書는 1980년에 筆者가 찾아내고 徐大肅·커밍스敎授 등과 더불어 意見을 交換하고 本來의 文書임이 100分之 99以上 確實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다.☆《참조사항》17. 문서의 한자, 한글의 오자를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싣는다. ■ <해석 글> Ⅱ. 노획 필사문서 해제 -6·25국제전쟁의 개전관계문서와 남침예지설의 검토- 6·25에 발발(勃發)한 한반도국제전쟁(韓半島國際戰爭)은☆《참조사항》016. 그 비참성(悲慘性)에 있어서 1592년(年)의 임진(壬辰)·정유국제전쟁이상(丁酉國際戰爭以上)이 될 수 있는 력사적비극(歷史的悲劇)이었음으로 여기에 대(對)한 진실추구(眞實追求)와 사료(史料)의 발굴(發掘)은 한민족전체(韓民族全體)가 절실(切實)히 바라는 것들임에 틀림없다. 이하(以下)에 소개(紹介)한 문서(文書)는 1980년에 필자(筆者)가 찾아내고 서대숙(徐大肅)·커밍스교수(敎授) 등과 더불어 의견(意見)을 교환(交換)하고 본래(本來)의 문서(文書)임이 100분지(分之) 99이상(以上) 확실(確實)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다.☆《참조사항》017. 문서의 한자, 한글의 오자를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싣는다. ● { 한자 빼고, 한자를 해석한 한글로만 된 글 } Ⅱ. 노획 필사문서 해제 -6·25국제전쟁의 개전 관계문서와 남침예지설의 검토 -6·25에 발발한 한반도 국제전쟁은 { ☆ 《참조사항》016 = 19세기후엽 미국간행물에서 한국전쟁이라 할 때, 그것은 1871년의 신미양요나 일청전쟁을 뜻하는 것이었고, 1950년의 "한국전쟁"도 50년후에는 1950년의 "한국전쟁" 내지 1950 한반도 국제 전쟁으로 불러질 전망이 없지 않다. 6·25에 일어난 전쟁을 「한국동란」 「한국전쟁」 「6·25전쟁」으로 부를 때 이것은 한반도 내부의 제인소의 축적으로만 전쟁을 야기시켰다는 의미상의 제약이 뒤따를 걱정이 있다. 필자는 이 전쟁을 지정학의 시점에서, 즉 지구상의 힘들의 상호작용의 산물에 한반도 내부 제 요소가 곁들인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이다. 그러기에 정식명칭을 6·25 한반도 국제전쟁(약칭하여 6·25전쟁도 가함) 또는 제3차 한반도 국제전쟁 (제1차 임진,정유지란, 제2차 일청전쟁)으로 고집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개전문서의 해제에서 이 문제를 다룰 것이다. ) } 그 비참성에 있어서 1592년의 임진·정유 국제전쟁 이상이 될 수 있는 역사적 비극이었음으로 여기에 대한 진실추구와 사료의 발굴은 한민족 전체가 절실히 바라는 것들임에 틀림없다. 이하에 소개한 문서는 1980년에 학자,전문가들이 찾아내고 서대숙·커밍스 교수 등과 더불어 의견을 교환하고 본래의 문서임이 100분지 99이상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다. ☆ 《참조사항》017 = { 미국의 비밀해제문서 라는 것에는 다소간 조작이 들어간 것이 있고 특수한 정치목적에 부응하기 위하여 동시에 존재하던 상반된 의견중의 하나를 의도를 가지고 공개하는 수가 있다고 느낀다. 일례로서, 미국의 대외관계 외교문서. 1945년 권. 6, 10월 1일발 미군정정치고문 '베닝호프' 가 국방장관에게 쓴 보고에는 신의주에 사는 2인의 지도자의 편지라는 것을 인용하고 보고서에 첨부한다고 하였는데(pp.1065~1066) 이것은 또 "화전춘수" 교수의 「쏘련의 조선정책」 『사회과학연구』 33권 4호 1981)에도 인용되고 있다. 이 「신의주의 2인」은 필자의 조사로는 윤하영 목사와 한경직 목사이었으며 편지원문도 아카이브(기록보관소)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한경직 목사를 봤을때 언급하니 그것은 38선을 넘을때 미국 CIA 사람들이 타자한 것을 서명하라고 하여 서명하였다고 말씀하였다. 그 내용이 90% 정확히 양 목사의 느끼는 바를 전달하였다고 가정하여도 여전히, 그것은 양인의 편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또 노획된 북한군 병사의 수첩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SA2009-4-162) 1950. 7. 2. 김경학의 강제적 동원에 의하여 출발하지 않으려고 산중에 피신. 1950. 7. 8. 가족을 없앨려는 계획을 하는 소식을 전하기에 격분함. 1950. 7. 12. 오늘은 총을 가지고 와서 바삐 오라고 하기 때문에 부모의 건강을 위하여 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출발. 출발하는 나의 각오 눈물을 흘리면서 출발하는 이내몸은 사전까지는……/부모님 건강을/아무케 잠을 이용하여도/내 목적을 달성 18세의 내 몸은 비록 작지만/죽어도 국군과는 싸우지 않고/대한의 승리를 백방으로 원조/이 나의 각오는/감옥생활을 한 부모님의 원수를……/압박받는 가족의 원수를/이상과 같이 사전에 나는 맹서한다/맹세라! 이 수첩에는 다음 3면에 출발에서 9월 20일 시흥군 수압리 산현리까지 매일 통과한 지점을 일사천리식으로 적고 있을 뿐, 다른 병사의 수첩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일상에서 메모하여 두는 요건들이나 기타 기록이 전연 없다. 이 소년병사는 22일 제 31 포로수용소에 보내졌으니 포로 되기 전후하여 급작히 적은 협의가 있다. 상식적으로 3개월간이나 대담하게 반공서원만을 적은 수첩을 안고 검열을 피하고 지내올 수 있었다고는 좀 믿기 힘들다. 원칙적으로 역사연구자는 의심하고 보는 것이 습성이 되어 있고 또 부당히 이용 당 할 짓을 기피한다. 이곳에서의 문건들의 발표는 5년전에도 할 수 있었으나 지금까지 미루어 왔으며, 학술지에 장이 마련되었으므로 자발적으로 발표하는 것 뿐이다. } 문서의 한자, 한글의 오자를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싣는다. [ 원문 ] [文件 A] ☆ 《참조사항》018 報 告 書 戰鬪경과 報告에 關하여 戰鬪開始후 本 大隊戰의 情況을 下記와 如히 報告함. 記 1. 第一中隊는 4聯隊에 配屬되어 聯隊를 通過식히 爲하여 6月 24日 19時부터 25日 4時까지 地雷通過路 6個所로 4名組 4個가 步兵聯隊通過를 無事히 保障하였음. 2. 第二日에 드러서도 工兵은 步兵聯隊의 先頭에서 地雷해제 및 土木火點 等을 爆發식혀 步兵을 完全通過식혔음. 특히 土木火點爆發에 있어서 백농권 分隊長外戰鬪二名의 역할이 컸슴. 同日 午후 戰鬪에 있어서 聯隊長이 命令한 通過路保障에 있어서 任務를 完全히 遂行하고 敵兵 1名을 포로와 武器 1丁과 彈丸 99發도 혝득하였음. 그후 계속 進攻戰鬪命令을 받고 前進中 돌격 線300m前方까지 같을때 敵의 폭격이 심하여 防어하든 中 中隊長이 負傷당하였음. 2, 3小隊가 配치받고 進攻地域의 情況은 25日 까지는 同一한 戰果였지만 26日은 딴 大隊에 配치되어 工兵이 大隊先頭에 서서 通過路保障任務를 맏고 3名式 2個組를 척구로서 派하며 前進中 土木火點 3個와 永久火點 1個所 地雷點 2個所를 發見하여 이를 全部 爆發식혀 步兵이 通路를 保障하였음. 계속 前進中 敵의 聯絡兵 1名을 補로 하여 敵의 連絡망을 절단식혔음. 武器 2丁과 彈丸 19알과 文件을 탈취하였음. 武器 및 탄丸은 전부 파괴 消耗식혔음. 27日 步兵과 같이 行動으로서 前進하면서 任務를 完遂하였음. 午후 聯隊와 같이 休息하다가 敵이 폭격을 당하여 戰士 2名 負傷과 1名 戰士(筆者註:原文 그대로) 당하였음. 28日, 29日 戰果는 別事없이 聯隊와 같이 前進하며 아모 事故없음. 第2中隊에 있어서 2中隊는 6聯隊의 配屬되어 처음 22時부터 4時까지 聯隊長의 戰鬪命令을 받고 聯隊通過路保障으로 前方에 나와 地雷를 해제하여 聯隊를 無事히 通過시켰음. 25日 聯隊와 같이 敵을 추격하여 進攻하다가 敵의 폭격으로 방어하다가 敵포탄에 戰士1名이 負傷당하고 戰士 1名은 失踪되었음. 26日은 先頭에 서서 聯隊通路를 保障하며 任務完遂하고 特別한 事故 및 戰果는 없었음. 27日 聯隊와 같이 敵을 向하여 進攻中 敵이 폭격으로 戰士 5名이 負傷당하고 午후 春川 서양교(소양교)로 通過하기 爲하여 中隊長이 隊員을 인솔하여 은밀히 通路中 敵이 □□□戰士 1名이 負傷당하고 中隊長이 失踪되었음. 28日, 29日은 聯隊와 같이 前進하였으며 事故없음 敎도中隊는 후비隊로서 첫날부터 師團長指揮處作業과 경비作業을 하였으며 今日까지 아모 事故없음. 26일 師團長동지의 命令으로서 參謀長以下 戰士 5名을 데리고 春川 서양교수로서 선발대로 나가 敵이 교랑우에 통신선을 절단하고 自動車 1台와 운전수까지 직사파괴식히고 계속 我軍의 통과를 보장하기 위하여 사수중 敵의 폭격으로 負상당하여 病院에 入院하였음. 其他 5名은 事故없이 任務를 完遂하고 돌아왔음. 1950年 6月 29日 第251軍部隊 部隊長 유 병 준 제6보병연대장 工兵 정찰 계획 김익현 비준 ● <해석 글> 미국(美國)의 비밀해제문서(秘密解除文書)라는 것에는 다소간(多少間) 조작(操作)이 들어간 것이 있고 특수(特殊)한 정치목적(政治目的)에 부응(副應)하기 위하여 동시(同時)에 존재(存在)하던 상반(相反)된 의견중(意見中)의 하나를 의도(意圖)를 가지고 공개(公開)하는 수가 있다고 느낀다. 일례(一例)로서, Foreign Relations of United States. Diplomatic Papers, 1945 Vol. 6, 10월(月) 1일발(日發) 미군정정치고문(美軍政政治顧問) Benninghoff가 국방장관(國防長官)에게 쓴 보고(報告)에는 신의주(新義州)에 사는 이인(二人)의 지도자(指導者)의 편지라는 것을 인용(引用)하고 보고서(報告書)에 첨부(添附)한다고 하였는데(pp.1065~1066) 이것은 또 화전춘수(和田春樹) 교수(敎授)의 「쏘련의 조선정책(朝鮮政策)」 『사회과학연구(社會科學硏究)』 33권 4호 1981)에도 인용(引用)되고 있다. 이 「신의주(新義州)의 이인(二人)」은 필자(筆者)의 조사(調査)로는 윤하영목사(牧師)와 한경직목사이었으며 편지원문(便紙原文)도 Archives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필자(筆者)가 한경직목사를 봤을때 언급(言及)하니 그것은 삼팔선(三八線)을 넘을때 미국(美國) “CIA 사람들이” 타자(打字)한 것을 서명(署名)하라고 하여 서명하였다고 말씀하였다. 그 내용(內容)이 90% 정확(正確)히 량목사(兩牧師)의 느끼는 바를 전달(傳達)하였다고 가정(假定)하여도 여전(如前)히, 그것은 량인(兩人)의 편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또 로획(鹵獲)된 북한군병사(北韓軍兵士)의 수첩(手帖)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SA2009-4-162) 1950. 7. 2. 김경학의 강제적 동원에 의하여 출발하지 않으려고 산중에 피신 1950. 7. 8. 가족을 없앨려는 계획을 하는 소식을 전하기에 격분함 1950. 7. 12. 오늘은 총을 가지고 와서 바삐 오라고 하기 때문에 부모의 건당을 위하여 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출발. 출발하는 나의 각오 눈물을 흘리면서 출발하는 이내몸은 사전(死前)까지는……/부모님 건강을/아무케 잠을 리용하여도/내 목적을 달성 18세의 내 몸은 비록 작지만/죽어도 국군과는 싸우지 않고/대한의 승리를 백방으로 원조/이 나의 각오는/감옥생활을 한 부모님의 원수를……/압박받는 가족의 원수를/이상과 같이 사전(死前)에 나는 맹서한다/맹세라! 이 수첩(手帖)에는 다음 3면에 출발(出發)에서 9월(月) 20일(日) 시흥군 수압리 산현리까지 매일 통과한 지점(地點)을 일사천리(一瀉千里)식으로 적고 있을 뿐, 다른 병사(兵士)의 수첩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일상에서 메모하여 두는 요건(要件)들이나 기타(其他) 기록이 전연 없다. 이 소년병사(少年兵士)는 22일(日) 제(第)31 포로수용소에 보내졌으니 포로 되기 전후(前後)하여 급작(急作)히 적은 협의가 있다. 상식적으로 3개월간이나 대담하게 반공서원(反共誓願)만을 적은 수첩(手帖)을 안고 검열을 피하고 지내올 수 있었다고는 좀 믿기 힘들다. 원칙적(原則的)으로 력사연구자(歷史硏究者)는 의심(疑心)하고 보는 것이 습성(習性)이 되어 있고 또 부당(不當)히 리용(利用) 당(當)할 짓을 기피(忌避)한다. 이곳에서의 문건(文件)들의 발표(發表)는 오년전(五年前)에도 할 수 있었으나 지금까지 미루어 왔으며, 학술지(學術誌)에 ‘장(場)’이 마련되었으므로 자발적(自發的)으로 발표(發表)하는 것 뿐이다. ● { 한자 빼고, 한자를 해석한 한글로만 된 글 } 문건 A] { ☆ 《참조사항》018 = 1950년 9월 24일 합천 부근에서 노획된 보고 접수철 (제 235 군부대 5과)에서 압출한 것으로 연필로 적은 것이 대부분이다. } 보 고 서 전투 경과 보고에 관하여 전투개시 후 본 대대전의 정황을 하기와 여히 보고함. 기 1. 제1중대는 4연대에 배속되어 연대를 통과 식히 위하여 6월 24일 19시부터 25일 4시까지 지뢰 통과로 6개소로 4명조 4개가 보병연대통과를 무사히 보장 하였음. 2. 제2일에 드러서도 공병은 보병연대의 선두에서 지뢰해제 및 토목화점 등을 폭발 식혀 보병을 완전통과 식혔음. 특히 토목화점 폭발에 있어서 백농권 분대장 외 전투2명의 역할이 컸슴. 동일 오후 전투에 있어서 연대장이 명령한 통과로 보장에 있어서 임무를 완전히 수행하고 적병 1명을 포로와 무기 1정과 탄환 99발도 혝득하였음. 그후 계속 진공전투명령을 받고 전진중 돌격 선 300m전방까지 같을때 적의 폭격이 심하여 방어하든 중 중대장이 부상 당하였음. 2, 3소대가 배치받고 진공지역의 정황은 25일 까지는 동일한 전과였지만 26일은 딴 대대에 배치되어 공병이 대대선두에 서서 통과로 보장임무를 맏고 3명식 2개조를 척구로서 파하며 전진중 토목화점 3개와 영구화점 1개소 지뢰점 2개소를 발견하여 이를 전부 폭발식혀 보병이 통로를 보장하였음. 계속 전진중 적의 연락병 1명을 보로 하여 적의 연락망을 절단식혔음. 무기 2정과 탄환 19알과 문건을 탈취하였음. 무기 및 탄환은 전부 파괴 소모 식혔음. 27일 보병과 같이 행동으로서 전진하면서 임무를 완수하였음. 오후 연대와 같이 휴식하다가 적이 폭격을 당하여 전사 2명 부상과 1명 전사(필자주(筆者註):원문 그대로) 당하였음. 28일(日), 29일(日) 전과는 별사없이 연대와 같이 전진하며 아모 사고 없음. 제 2중대에 있어서 2중대는 6연대의 배속되어, 처음 22시부터 4시까지 연대장의 전투명령을 받고 연대통과로 보장으로 전방에 나와 지뢰를 해제하여 연대를 무사히 통과 시켰음. 25일 연대와 같이 적을 추격하여 진공하다가 적의 폭격으로 방어하다가 적 포탄에 전사 1명이 부상 당하고 전사 1명은 실종 되었음. 26일은 선두에 서서 연대통로를 보장하며 임무완수 하고 특별한 사고 및 전과는 없었음. 27일 연대와 같이 적을 향하여 진공중 적이 폭격으로 전사 5명이 부상 당하고 오후 춘천 서양교(소양교)로 통과하기 위하여 중대장이 대원을 인솔하여 은밀히 통로중 적이 □□□전사 1명이 부상 당하고 중대장이 실종 되었음. 28일, 29일은 연대와 같이 전진하였으며 사고 없음 교도중대는 후비대로서 첫날부터 사단장 지휘처 작업과 경비작업을 하였으며 금일까지 아모 사고 없음. 26일 사단장 동지의 명령으로서 참모장 이하 전사 5명을 데리고 춘천 서양교수로서 선발대로 나가 적이 교랑우에 통신선을 절단하고 자동차 1태와 운전수까지 직사 파괴 식히고 계속 아군의 통과를 보장하기 위하여 사수중 적의 폭격으로 부상 당하여 병원에 입원 하였음. 기타 5명은 사고 없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음. 1950년 6월 29일 제 251군부대 부대장 유 병 준 제6보병연대장 공병 정찰 계획 김익현 비준 0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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