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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팩트)일 수 밖에 없는 북한 초기역사 증언 2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38 2022-02-16 01:08:14

02편


※  {  사실 북한 역사나 사실등은 전문가라도 알기 어렵다. 그래서 추상적이고 예측적이고, ~일것이다. 등 한계가 있는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미화나,우상화하기 좋아하는 북한측 의견이나 주장을 그대로 믿기도 어려운게 현실이다.  그러나 이번 글은 (북한 수뇌부이자,핵심층이었고,고위층이었던 
한 인물이 당시 직접 보고 들은 사실들의 증언이자 이야기다.)  물론 김일성 측근이기도 하다.

1943년 부터 1958년경 까지의 북한의 역사~특히, 북한의 저명한 문화,예술인등의 삶,숙청등의 내용이 많다.  

분명한건 적어도 여기 글의 내용은 100% 팩트 라고 자부하며 또 믿어도 된다고 확신,확신한다.

●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 '정*진'씨의 증언 내용..  저 윗부분의 파란글자인  "한 인물이"~~바로 문화선전성 제1부상이었던 《정*진》씨의 증언이다.

◇ 전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 정*진씨 - 증언

■   12년전 쯤 92세 였던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 정*진 씨가 주인공이다.

□  아마 2022년인 지금은 사망했을 것이다. }




20세기 초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거주지.


공산주의를 제대로 이해 못 한 이동휘


정*진이 태어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은 러시아로 건너간 조선인들의 개척촌이었다. 구한말 헤이그 밀사 가운데 한 분이었던 '이상설' 선생,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선생 등이 이곳 신한촌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벌였다.


함북 명천 출신으로 한일 합방 직후 연해주로 건너온 아버지 정치문은 민족의식이 강했다. 정*진의 회고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는 '안중근' 의사 얘기를 해주시면서 「너는 일본 놈들과 싸울 때가 올 것이다. 그놈들은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수다. 그놈들과 싸워 이겨야 조선 땅에 발을 놓기가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러시아 학교에 입학시키자 아버지는 「일생 러시아에서 살 작정이오? 이곳은 우리에겐 임시 거처지에 불과해! 조선은 곧 해방되고 말 거요」 하면서 크게 화를 냈습니다. 결국 학교까지 찾아와 저를 끌어내 조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3·1절 기념식 때면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등 항일 독립투사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소년단 단장이던 어린 정*진은 그들을 초청해 강연을 들었다. 이동휘에 대한 회고다.

『이동휘 선생은 공산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레닌이 제국주의 타도와 피 압박 민족 해방을 외치니까, 그 구호를 믿고 공산주의를 통해 조선을 해방시키겠다고 생각했던 것이겠죠. 이동휘 선생은 1935년에 돌아가셨는데, 만일 1937년까지 생존해 계셨다면 "스탈린"에 의해 처형됐을 것입니다』

■   신한촌의 향학열


카프 출신 작가로 연해주 고려인 문단 형성에 이바지했던 조명희.


아버지는 한학에 밝았다. 다섯 살 때부터
아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쳤고, 「삼국지」
·「수호지」·「홍루몽」·「서유기」
등을 이야기해 주었다. 정*진
은 신한촌
조선인들의 향학열을 자랑스럽게
회고했다.



『제정
 러시아 말기에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을 위해 연해주에 왔던 작가 겸 철도
기사 '가린 미하일로비치'라는 사람이 있습
니다. 그는 조선인 마을에서 저녁 때 노래
비슷한 단조로운 소리가 집집마다 흘러나
오는 것을 듣고 통역에게 「가난한 사람들
이 무슨 기분으로 저녁이면 저렇게 오랫동
안 노래를 부르느냐?」고 물었답니다.
통역이 「저건 노랫소리가 아니라, 서당에
서 학생들이 공부하는 소리다」라고 하자,
그는 감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반 
기아 상태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저렇
게 열심히 공부에 열중하는 민족은 아마
세상에 조선인들뿐일 것이다. 지식에 대한
이런 지향
은 진실로 너무나 이상적이다」』


연해주로 건너오는 조선 사람들은 조선어
잡지나 소설책, 시집들을 짊어지고 들어와
학교 등에 나누어 주었다. 소년 정*진

1920~1930년대에 나온 「삼천리」 잡지
는 거의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이런 잡지나
책들을 통해 《그는 김동인
·이광수·김동환·
이상화
·최남선》 등과 만날 수 있었다.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이주해 간 아버지
에 대한 기억 때문일까? 정*진
은 '파인 김동
환'
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 감회에 젖어
그가 지은 최초의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을 읊조렸다.


『「아아,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 밤에 남편
은 두만강을 무사히 건넜을까」, 이건
「위대한 초조감」입니다. 1937년 카자흐
스탄으로 추방될 때, 화물열차 안에서 친구
들을 끌어안고 김동환  
선생의 「손톱으로 새긴 노래」를 읊었습
니다』



1928년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서 활동하던 소설가 '포석 조명희'가 연해주로 망명해 왔다. 그는
소왕령(우수리스크) 유성촌이라는 마을에 자리 잡고 2세 교육과 문학 활동에 힘썼다. 신문 「선봉」, 잡지 「노력자의 고향」 등을 발간했다.



1930년 조명희
가 지은 시 「짓밟힌 고려」는 연해주 일대에 사는 고려인 청년들의 피를 끓게 했다. 많은 고려인 청년들이 조명희의 영향을 받아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조선사범대 노문학부에 다니던 정*진"도 그중 하나였다.



이들은 가난하고 고된 현실 속에서도 꿈에 부풀어 있었다. 「사회주의 이상향
」과 「해방된 조선」에 대한 꿈에….


1937년은 그 꿈이 박살난 해였다. 그해 8월부터 소련 NKVD(내무인민위원부·KGB의 전신
)는 연해주 조선인 인텔리들을 무차별 체포, 처형하기 시작했다. 한 달 뒤에 시작될 강제이주의 사전 포석이었다. 소련작가동맹의 유일한 조선인 문학가이면서 소련 국적 취득을 한사코 거부했던 소설가 조명희도, 어린 정*진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워 줬던 아버지 정치문도 체포돼 총살당했다. 조선인 인텔리 2800여 명이 재판 없이 처형됐다.


그가 아버지의 처형 사실을 확인한 것은 1955년 북한에 있을 때였다. 부친의 묘소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NKVD가 처형자들을 한꺼번에 묻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  카자흐인들의 친절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이 살던 반 지하 오두막집.


1937년 9월25일, 연해주 페르바야 레츠카역에서 조선인 강제이주가 시작됐다.

「연해주 거주 고려인(러시아 시절부터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
들을 일컫던 말)들이 일제와 내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조선사범대, 조선사범전문학교, 사범노동학원, 사범기술학교, 4개의 고급중학교(고등학교), 8개 초급중학교(중학교), 23개 인민학교(초등학교) 학생들, 교직원 및 그 가족들이 첫 이주대상자였다. 조선극장, 조선어 라디오 방송국, 선봉신문사 등 문화기관 직원과 가족들도 함께였다.


이들은 열차 32량에 가축처럼 실려 한 달 뒤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 도착했다. "정 옹"은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말한다. 그들보다 나중에 연해주를 출발한 열차에 탄 사람들은 열차사고와 추위 등으로 수없이 죽었는데, 그들이 탄 열차에서는 인명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던져진 땅은 불모의 땅이었다. 정*진의 회고다.



『열차에서 내린 여자들은 주저앉아 통곡했어요.「죽으라고, 우리보고 죽으라고 이런 땅으로 보낸 거야」라면서….


그때 나귀에 빵을 가득 싣고서 카자흐 여인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이름 모를 민족이 황야에 버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빵을 구워서 식을세라 모포에 덮어 가지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 빵을 아이들에게 먹이며 조선 어머니들은 다시 통곡했고, 카자흐 아낙들도 그 모습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카자흐 사람들, 참 마음씨가 고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우리들은 다 죽었을 겁니다. 우리 민족은 그 고마움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주 첫해에 추위와 굶주림, 풍토병으로 2만~3만 명이 죽었다. 청년 정*진 은 잃어버린 친척들을 찾으러 고려인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매일같이 장례가 치러지는 것을 보았다.



『소련은 1937년에 망했다』



다음편에서~~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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