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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역사 이것만 읽으면 완전 끝..1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30 2022-02-18 19:48:49
01편           < 총 4편작 >


※  《 오직 팩트만을 추구 》

●  6.25/한국전쟁 별거아님~그런데도 당사자 국가의 국민들의 대다수가 창피하게도 잘모르거나 잘못알고 있음.

■   6.25전쟁 역사~이것만 이해하면 끝이다.

◇  
홍콩강문대학교 자료 일부<참고>

○  연구 논문= 일부참조

○  민속 역사= 일부참조

     기록한 것


○ 중국 연구 데이터베이스 일부 인용

 

○ 중국 개발 데이터베이스

☆☆☆  [ 이 글들은 한글로 번역한 글이어서 뜻이 자연스럽지 않고 어색한면이 있습니다. 이해바랍니다. ]



시작~^^:

만장일치의 목소리: 중국의 1958년 대북 전면 철수 계획 수립

20세기 중국사적 관점에서 본 미국의 침략전쟁과 원조조선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고 조선을 원조하기 위한 전쟁의 국내선전사업에 대하여..


'중국 인민해방군'에 포함된 조선인 사단을 북한으로 반환에 대한 새로운 조사


삼국지 음모론 분석: 한국전쟁의 기원을 재고하다


중국의 북한 파병 사상적 요인에 대하여..


한국전쟁의 결정과정: 소련, 중국, 북조선(북한)의 역할


한국전쟁 중 중국과 북한의 모순, 차이점 및 해결 높은 수준


정전 문제에 대한 중국의 태도 변화


정전협상: 소련의 역할, 북한 요인, 중국 정책


한국전쟁에서 중국과 미국의 의사결정에 대한 비교연구


5개 전역에 파병 결정부터

위기관리의 관점에서 미군의 침략에 저항하고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파병 결정


한국전쟁에서 중국(중공)의 역할


중국의 대북 파병 결정의 성패에 대해


중국은 북한에 파병을 강요받았다: 의사결정 과정과 그 이유


중소 동맹과 중국의 북한 파병 결정


미국의 항거전쟁과 조국지원전쟁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소련의 요인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방법: 과정과 근거


한국전쟁과 미국의 대만정책 변화

38선을 넘다: 한국전쟁을 확대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적 결단


◇  한국전쟁 발발의 역사적 진실은


냉전과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에서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항상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과 고려의 대상이 되어왔다.


1990년대 이전에는 국제학계에서 전통학파와 개정(수정)학파가 있었다. 


90년 이후 기밀이 해제된 러시아의 한국 전쟁 기록물이 공개된 후 이 파벌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졌으며 대부분의 학자들은 김일성이 전쟁을 시작했고 스탈린이 북한에 청신호를 주었다고 주장하며 마오쩌둥이 이에 동의하고 지원했다고 주장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분석은 역사적 사실에 가깝지만, 일반론으로만 보면 '공모론자들'의 기존 이론을 확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특히 이 전쟁을 수행하는 중국의 입장과  관련하여 좀 더 깊이 있는 몇 가지 세부 사항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러시아의 기밀해제된 다수의 기밀해제된 문서들을 대조분석한 내용을 토대로 6·25전쟁 발발. 당시 소련, 북한, 중국의 역할과 입장, 그리고 이들 간의 미묘한 관계를 보다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  김일성은 적극적으로 전쟁을 계획 한다.


1945년 10월 10일 김일성은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훈련을 받은 북한 장교 66명을 이끌고 소련 화물선(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항에 상륙했다. 


북한 지도자.   


소련이 민족주의 지도자 "조만식"을 김일성으로 교체한 것은 사실 모스크바의 한반도 정책 변화와 관련이 있다.


전후 초기 소련과 미국은 극동 지역에서 모순과 협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


북한에 대한 전후 소련의 목표는 초기에는 신탁통치 또는 기타 수단을 통해 소련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통일 조선 정부를 북한에 수립하기 위해 미국과 협력하는 것이었다.


미국과의 갈등이 심화된 후 소련의 목표는 북한의 정치·경제적 힘을 강화하고 이를 토대로 조국통일을 추진하여 보편적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북한의 참정권은 소련에 대한 우호 정책을 시행할 것이다.  


남북한이 잇따라 선거를 실시하고 정부를 수립하자 소련은 미국과 소련이 동시에 한반도에서 철군할 것을 제안하고 먼저 일방적인 철수를 단행했다.  


모스크바는 한편으로는 공산당을 통한 북한의 통제에 만족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김일성이 남한에 대항할 능력이 있어 한반도에서 미국을 견제한다는 비전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직접적인 충돌은 없이 말이다.

그러나 38선이 그어진 이후로 남북한은 긴장된 대치상태에 빠졌다. 김일성은 언제나 조선의 해방과 통일은 혁명적 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고, 이승만 역시 군비를 강화하고 북진을 적극 주장하였다.  


특히 남북한이 독자적인 정치제도를 수립하고서 소련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한 후 한반도 정세는 더욱 악화되었고 38선 부근에서 마찰과 화력교류가 계속되었다.  


1949년 초부터 북쪽 소련 대사관은 남한의 공격 가능성에 대해 모스크바에 긴급 전보를 계속 보냈다.  


김일성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스크바의 승인과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소련과 비밀동맹을 맺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로부터 정중하게 거절당한 김일성은 소련의 의도와 태도를 알아보기 위해 스탈린을 직접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스탈린의 전략적 초점은 여전히 ??유럽에 있었고, 한편으로는 공산당 정보국을 구성하고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바로잡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진영을 구성해 서방의 입지를 안정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한편, 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강경한 입장에 직면하여 스탈린은 베를린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관대하고 철수한 입장을 취했고, 양측의 종합적인 힘을 인정한 소련은 미국과의 공개적인 갈등 관행을 포기하다 시피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탈린은 당연히 미국의 개입으로 이어질 수 있는 한반도 전쟁을 시작하는 데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탈린은 지난 3월 초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남과 북의 군사력 비교와 38선 부근의 소규모 군사적 충돌 결과에 대해 간단히 물었고, 이에 만족했다. 김일성의 자신 있는 대답.  


김일성의 군사지원 요청에 대해 모스크바는 38선에 주둔한 북한 2개 여단만 지원하기로 하고 소련해군 분견대는 청진항에 남아 북한의 방어를 지원하기로 했다.


1949년 여름까지 남북한 사이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으며, 특히 미군 철수 전후로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계속해서 전쟁을 외치며 대북 군사 도발과 국경 침범을 반복했다.  


소련 대사 "슈티코프" 와 김일성의 브리핑에 따르면~ "북한에 공격을 위한 작전 계획이 작성되었고" 공격이 7월에 시작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김일성의 끊임없는 요구에 따라 북한을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무기와 장비로 평양에 대한 원조를 늘리는 데 동의하는 것 외에는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모스크바는 미국이 철수한 후 청진항의 소련 해군기지와 평양 등의 군사 비행장을 철수하여 조선 인민군이 이러한 시설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다.   


당시 소련의 제안은 조국통일민주전선을 북조선에 창설하고 보통선거를 통한 평화통일을 전국적으로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다음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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