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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피의 숙청..<2 >
Korea, Republic of 돌통 0 540 2022-04-05 02:52:02
◇ 붉은 피의 숙청..《 2 》

02편


1940년 말부터 1941년 초까지 산시(山西)성 타이항산(太行山)의 기지에서 팔로군(八路軍)이라고 불리는 중화민국 혁명군 부대와 만나기 위해 1941년 1월 10일부터 12일까지 산시성 통위에서 '호북조선청년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이 모임에서 "펑더화이"가 연설을 하는 동안 포병대장 "무정"이 8로군의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이유민과 김창만이 지도부에 선출되었다. 청년회는 창립총회에서 세 가지 운영전략을 세웠다.

첫째, 간부들의 교육과 훈련이 시급했다.

둘째, 중국 본토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조선혁명조직을 통일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호북지방의 조선동포들을 혁명전선으로 변모시켜야 했다. 조선동포들과의 작전을 적극 추진하면서 청년회는 충칭과 낙양의 혁명단체와 동지들과도 접촉하였다.

그 결과 충칭과 낙양의 많은 조선혁명단체들이 6개월 만에 청년회에 가입하여 결사의 규모를 크게 확대하였다. 1942년 4월 "김두봉"은 도보로 '연안'에 도착했습니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의 소식과 일부에서는 초민족주의자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김'의 연안 여행은 도시 지역의 일부 독립 운동가를 이끌고 국민당(GMD)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청년회에 합류하게 했습니다.

회원이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후베이-조선 청년회는 전투력을 조직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를 염두에 두고 1941년 6월 대한의용단 후베이지부가 창설되었다.

대한의용단 후베이지부가 창설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중국 전역에서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입대하기로 결정했다. 예를 들어, 나중에 '박용만'을 암살한 '이해명'도 이때 한국의용대에 합류했다. 많은 대한독립군 청년들, 특히 "김원봉"의 대한의용단 소속의 젊은이들도 조선의용단 후베이지부에 합류했다. 저우언라이

당시 충칭에 머물고 있던 김원봉의 중국비서에게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1941년 9월 조선의용단 후베이지부에 합류할 것을 제안했다. 이 한국 의용단 대원들이 연안으로 많이 이주했다고 한다.

국민당 영토에서 중국 공산당 영토로 이주시킨 것은, 후베이가 더 나은 작전 기지를 표방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게다가 1942년 1월 안후이 남안후이 사변 이후 마오쩌둥(毛澤東)이 장개석(江 j石)보다 더 미래지향적인 인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나타난 것도 후베이(湖北) 지역으로 많은 한국(조선) 젊은이들이 이주한 이유 중 하나다.

1941년 7월부터 1942년 6월까지의 대한의용단 호북(후베이)지부의 활동은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첫째, 1941년 말 후가장 전투와 1942년 5월 일제 소탕 작전에 대한 반격은 연안파가 조선 인민에게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정치적 위업이 되었다.

둘째, 이 시기에 후베이성 조선의용대가 국민당에서 중화민국혁명군의 일부를 구성하는 팔로군으로 의병을 변경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사실상 이미 중국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팔로군 지휘계통에 편입된 상태였다.

1942년 7월 11일부터 14일까지 후베이-조선청년회는 회의를 열고, 이 기간 동안 한국독립동맹과 대한의용단 후베이지부를 '대한 의용군'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이 두 단체는 통일된 군사 정치 기구로서의 자격으로 통일된 지도를 시행했다. 그들은 '한국독립동맹'의 총리로 김두봉을, 부총리로 최창익과 한빈을 선출했다. 무정은 조선의용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박효삼(朴孝三)과 박일우(朴一 were)는 조선의용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상..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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