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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대일전때 김일성 부대와의 관계..( 2 )
Korea, Republic of 돌통 0 489 2022-04-25 13:13:40

2편           마지막편



◇ 북한의 해방과 소련의 이해


▷ 전체 대일전 구도 속에서 한반도로의 공격은 제1극동군의 보조 공격력인 제25군의 보조공격으로 이루어졌다.


- 그러면 그 전개과정은 실제로 어떠했는가?


포츠담 회담 군사회의에서 합의된 미, 소 작전경계선은 작전의 수행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


- 미군이 아직도 한반도에 상륙할 수 없었던 상태에서 한반도 북단으로 진공해왔던 소련이
일반명령 1호를 수락하여 38도선 북부지역만의
진주를 받아들였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리고 대일전 전개과정에서 향후 북한 정권의 지도집단이 되는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 부대와 소련군과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 소련군의 주요 공격목표였던 만주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의 전투도 소련군에 의해 거의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북한을 해방시킨 제25군의 작전준비와 작전의 전개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대독전이 종결된 뒤인 1945년 5월에서 7월 사이에 본격적으로 대일참전 준비가 진행되어
8월 초에는 제25군 예비후대도 재편성을 포함하여 작전 준비, 정확한 지형 파악과 물자 보급이 완료되었다.

8월 3일에는 지휘관들에게 혼성부대의 군사 행동에 관한 작전 명령을 하달하고, 이들을 무장시켰으며, 8월 7일에는 25군의 좌익을 담당하는 남방부대 사령관에 군참모장 "샤닌 소장"을 임명하였다.


- 소련군의 개전 첫날인 8월 9일과 10일에 태평양함대의 함정과 항공대는 웅기, 나진, 청진에 집중적인 공격을 하여 적의 수송선에 타격을 가했고,

8월 9일 오후 3시에는 샤닌 소장 지휘하의 남방부대가 경흥을 점령했다.

8월 11일에는 "미사코프 대좌" 지휘하의 제393보병사단이 남방 공격부대에 배속되었고, 8월 12일아침까지 태평양 함대 해병대와 합동작전으로 북한의 웅기와 나진항을 점령하라는 임무가 부과되었다.


- 8월 12일 이른 새벽에 태평양 함대의 함정들은
웅기에 접근하여 이 곳에 해병대를 상륙시켰고 두시간 후에 제393보병 사단이 웅기를 점령하고 계속해서 나진을 점령하였다.

8월 11일부터 시작하여 16일 오후에 점령하기까지 청진 전투는 태평양 함대가 실시한 최초의 대작전이었다.


이전의 경흥이나 웅기,나진에서는 소련군이 일본군의 저항을 거의 받지 점령하였음에 반하여 청진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 청진항은 철도교통과 해상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차점으로서 일본군은 청진에 집결하여 소련군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일반명령 제1호의 수락으로 38도선이 확정됨에 따라 소련군은 남진을 계속하였고,
북한지역에 진주한 제25군은 8월 17일에서 18일에 걸쳐 만주에서 급히 남하하였다.


- 그리고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례프스키"의 명령으로 급히 재편성된 선발 기동부대가
육로로 남진을 계속하는 한편, 태평양 함대는 8월
19일에 어대진, 22일에는 원산을 각각 점령하였다.

그리고 24일에는 평양지역에 제병연합의 공정대가 투하되었고, 26일에 치스차코프는 군참모부의설치와 3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 수비대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 후 소련군은 8월 말까지 북한 전역에 대한 점령을 완료하였다.


▷ 소련군이 한반도 북단으로 진공해오는 데 있어서 포츠담 회담에서 미, 소간에 합의된해, 공군 작전 경계선은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

- 대독전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대일전에서 미, 소간의 군사적 충돌을 미연에 방지할 목적으로 합의한 작전 경계선은 한반도와 관련해서는 무수단-장춘을 잇는 직선으로 합의되었다.

필요한 경우 현지 사령관인 맥아더와 바실례프스키가 상호 연락장교를 통해 24시간 전에 통고하면이 선을 변경하는 것이 가능했으나 이러한 연락체계는 종전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 한반도와 관련하여 이 선이 주목되는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 포츠담회의에서 소련측이 수정 제의하여합의된 무수단-장춘선은 미국측이 제의한 청진-연길-장춘선보다 확대된 것이지만 여전히 좁은 작전지역을 요구하고 있었고, 이는 대일작전의 중심이 만주주에 있었고 한반도의 북단은 이를 위해 보조적으로 작전이 전개되었음을 말해준다.

둘째로, 일본이 항복한 8월 15일, 또는 일본군 총사령부로부터 일본군에게 전쟁중지 명령이 하달된 8월 20일까지 소련의 대일작전은 작전선 이북 지역에서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일전 전개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25군의 자제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조기 항복에 따른 짧은 작전 일정과 소련군의 진공속도에 기인한 것이었다.

▷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이해를 보다 잘 반영하는 것은 아무래도 작전선 준수 여부보다 일반명령 제1호의 수락 이유일 것이다.

- 즉 미국이 제의한 38도선 분할안을 소련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소련은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 제안을 받아들인 소련의 의도는무엇이며, 이와 관련하여 소련이 한반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전략적 이해는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 당시 소련의 주요 관심은 만주와 남부 사할린, 쿠릴 열도, 나아가서 일본에 대한 점령정책에 공통으로 참여하는 문제에 두어져 있었으며, 동시에 얄타협조체제를 유지하고 유럽에서의 전후 보상문제에 참여하여 이권을 획득하는 데에 있었다는 것이 공통된 견해이다.


실제로 스탈린은 8월 16일에 일반명령 제1호의 제안에 대답하면서 쿠릴 열도와 훗카이도 북반부에대해서만 문제를 제기했을 뿐 38도선 분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동의했던 것이다.

- 그러면 이와 관련하여 당시에 소련이 한반도에 부여했던 전략적 중요성은 어느 정도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극동의 각 지역이 지닌 비중의 문제로 파악해야 할 것 같다.

즉 극동에서 대일전을 수행하면서 소련이 중점을두었던 지역은 소련의 의도대로 얄타회담에서 수락된 만주, 남부사할린, 쿠릴 열도와 훗카이도 북반부였다.

이는 전시회담과정, 대일전 수행과정 등을 통해서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소련에 대해 한반도가 지녔던의미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극동에서 소련이 지불해야 했던 기회비용을 고려했을 때에 소련은 38도선 이북만의 획득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 밖에 한 가지 문제가 남는데,
그것은 소련군과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들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 과연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 부대가 소련군과 함께 대일전을 수행하면서 북한에 들어왔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세력으로서 김일성에 대한소련의 지지 문제이다.

- 북한과 소련과의 관계 양상에 따라 조금씩 변화를 겪어왔지만 북한의 모든 출판물은 김일성이 소련군과 함께 조선을 해방시켰다고 주장하고, 이것을 북한 정권 정통성의 주요한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 부대가 소련군과 함께 북한을 해방시켰다는 북한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 1945년 12월에 오영진 등과의 대담에서 김일성은 자기의 부대가 2차대전 중에 낙하산으로 평양비행장에 투하될 예정이었으나 실행되지 못했다고 밝혔으며,

이러한 그의 회고는 김일성이 '최후공격 작전계획'을 수립했을 때 그 자신은 평안남도 지구 담당부대를 지휘하도록 되어 있었다는 북한 '조선전사'의 서술과도 일치하고 있다.

"와다 하루키 교수"도 이에 대해 상세히 검토한 뒤에북한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으며, 다른 연구도 김일성이 북한에 들어온 것은 1945년 9월 중순경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 그러나 이보다 더 미묘한 문제가 소련 점령당국과 김일성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 즉 소련이 북한에 진주하기 이전에 김일성을 장래의 한국(조선) 지도자로 미리 선정하고 지원했느냐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정식 교수"는 소련이 미리 고안된 계획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에 대한 의심에는근거가 있으나, 김일성은 소련군 사령부에 의해서이미 지명된 채 평양에 도착했으며, 따라서 북한에서의 권력투쟁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종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 이에 반해 "커밍스 교수"는 김일성과 소련 사이의 관계는 어느 정도 불명확한 데가 있다고 전제하고, 1942년과 1945년 사이에 소련이 자국의 국경지대를 곧바로 넘어 한국(조선)으로 진공할 수 있도록 김일성과 그의 게릴라 부대들을 훈련시킨 것이상의 관계는 없었던 것 같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또한 1947년∼49년 동안에는 소련이 북한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하지만, 이 때에도 소련은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소련 출신이나 코민테른에 관계했던 한국인(조선인)들을 통해서 그렇게 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 "서대숙 교수"도 소련이 한반도에 진주하기 이전에 김일성을 선택했다고 보기에는 의문점이 많고,한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영속화시킬 만한 즉각적인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따라서 그는 김일성이 소련 점령당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은 북한 국내 정치 세력들의 구성과 그들의 경험, 그리고 남, 북한 관계의 변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입장을 취한다.

- 그러나 위의 견해들은 확정적인, 또는 상당한 정도의 근거를 가지고 제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맥락을 살펴볼 때에 자신들은 그렇게 본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다 분명해지기 위해서는 1942년부터 1945년까지의 김일성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밝혀져야 하는데 현재로선 대단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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