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종파사변과 중국과 소련의 간섭.
광복 초기에 많은 망명 정치인들이 한국(조선)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귀환한 여러 파벌들 중에서 김일성이 이끄는 게릴라파와 김두봉과 무정이 이끄는 연안파가 곧 북한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귀국 후 연안파는 두 개의 그룹으로 분열되어 새 정부를 건설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북한의 정부 기관과 군사 및 보안 부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예를 들어, '무정'은 제2경비학교 교장으로, '박일우'는 내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두 번째 그룹은 통일전선 복귀 전략의 일환으로 수립된 민주당 조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46년 12월 대한독립동맹은 신인민당으로 재편되어 김두봉과 최창익이 당의 당장 겸 부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점령 속에 북한의 새 정권이 수립되면서 김일성 정권 내에서 연안파의 지도자들이 보조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핵심 권력 구조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연안파의 위상이 바뀐 것은 냉전 초기 소련 주도의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 만연한 내부 관계의 결과였다.
조선로동당은 1955년 12월에 마오쩌둥(毛澤東)의 개인비서로 불렸던 박일우를 숙청했다.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다. 6.25전쟁 이후 정세의 변화, 국내파의 숙청, 연안파의 박일우 제거, 소련파의 '허가이' 자살, 최용건의 관료 등을 특징으로 하는 변화 조선로동당으로의 승격은 제3차 대회에서 뚜렷하게 반영되었다.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8월종파사건'과 연안파의 운명은.
김일성을 영도한 유격파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내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함으로써 지도적 지위를 구체화했다. . 그러나 연안파의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한 것도 이 대회에서였다.
1956년 6월과 7월 김일성이 소련과 동유럽을 방문하는 동안 '최창익'이 이끄는 연안파와 '박찬곡'이 이끄는 일부 소련파가 결성했다.
-김일성 연합.
그러나 이 집단은 본질적으로 공통의 이념과 정체성에 기초한 집단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이해관계에 기반한 반김일성 연합이었다. 따라서 연정은 가용한 가장 강력한 도구인 '이념'과 '정체성'을 기반으로 투쟁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반김일성 연정은 정치 상황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박찬곡은 최용건을 그들의 대열에 합류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임은'이 말했듯이, 이것은 대회에서 비판을 통해 김일성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한 유치하고 단순한 노력이었다.
최용건과 외무성은 당시 소련과 동유럽을 방문하고 있던 김일성에게 반대파의 활동을 상세히 담은 긴급전신을 보냈다. 한편 김 위원장이 방중 때 직접 목격한 동유럽의 충격적인 상황은 야당에 대한 철저한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김일성의 신념을 확고히 하는 데 일조했다.
김일성은 1956년 8월 2일에서 30일로 총회를 연기했다. 그는 야당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하루 전에만 총회 개회를 선언했다. 김광협에게 비밀 명령을 보내 국경을 따라 전투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휴가를 떠나는 관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부대로 돌아가고, 평양 북쪽에 있는 간리 일대에 2개 사단을 집결시켰다.
총회 직전에 김일성과 그의 분파는 반대파를 제압하고 무너뜨리기 위한 무력을 과시했다. 이와 관련하여 김 위원장과 그의 일파는 총회에서 당 지도부를 비판하는 자는 누구든지 당에서 제명됐다.
연안파의 '윤공흠'은 1956년 8월 30일 열린 총회에서 김일성을 비판했다. 그러나 윤씨는 노동당 부위원장 자리에 민주당 최용건 대표의 부당한 임명을 지적하면서 중대한 전술적 오류를 범했다.
그 말에 분노한 최용건은 '개자식'이라고 소리쳤고, 집회장은 순식간에 광란의 집으로 변했다. 윤공흠, 이편규, 서휘는 즉시 당에서 제명된 반면, 최청익과 박찬곡은 오후에 회의가 재개되자 중앙위원회에서 해임되었다. 이들 중 4명은 개인의 신변안전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 어두움을 틈타 중국으로 피신했다.
이 사건은 이후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56년 9월 3일 '이상조'는 북한의 상황을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전달하고 개입을 요청했다.
흐루시초프는 미코얀 동지와 포노마레프 동지를 베이징으로 파견하여 북한에서 발생한 8월 종파사건에 대처하는 방법을 논의하였다.
1956년 9월 18일 저녁, 마오쩌둥은 미코얀이 이끄는 소련 대표단과 회담을 가졌다. 마오쩌둥과 미코얀은 조선로동당 동지들에게 당의 단결을 보장하고 양측이 공동대표단을 북한에 파견하도록 간청하기로 합의했다.
마오쩌둥은 소련-중국 대표단이 김일성을 전복시키기보다는 도우러 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조언했다. 마오쩌둥은 또한 대표단에 김일성이 당에서 숙청된 사람들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설득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라고 충고했다.
이와 함께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이번 공동대표단 파견을 북한 내정에 간섭하는 것으로 보고, 중국 지원군의 철수를 요구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는 중국이 기꺼이 수용하려는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또한 조선인들이 중국인들의 말을 잘듣지 않아, 따라서 '이 노력의 성공은 '미코얀'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또한 걱정했다.
이상..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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