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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활동에 가담한 가톨릭 사제들 (임광규 변호사) [광야의소리]
REPUBLIC OF KOREA 광야의소리독자 0 237 2006-09-01 09:50:56
정치활동에 가담한 가톨릭 사제들 (임광규 변호사)


임광규변호사

다음은 광야의소리 http://www.aware.co.kr 에 있는 글임.



정치활동에 가담한 가톨릭 사제들


임광규 베네딕도 (신관동 본당)



-공산주의자들의 정복을 도와주고, 가톨릭신앙의

박해를 초래한 베트남의 일부 신부들-


1973. 1월에 파리평화협정으로 휴전이 성립될 당시의 남베트남(월남공화국)의 수준은 언론의 자유, 재산소유, 자영농업, 자유상업, 죄형법정주의(형법규정에 없으면 처벌불이익을 줄 수 없는 인권보호제도), 신앙자유 등의 기준으로 보아 다른 주변 국가들(타이, 말레이시아, 싱가폴, 필리핀, 대만)과 비슷하였습니다. 그리고 발전도상 이었습니다.
1973. 3월까지 남부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 완료하였습니다.

말이 휴전이지 북베트남(월남민주공화국)과 남베트남은 각자 공산주의체제와 자유사회체제간의 결전이 다가오고 있음을 각오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남베트남의 지도자는 구엔 반 티우(Nguyen Van Thieu)대통령이고, 1973. 8월 선거에서 티우 대통령을 지지하는 민주당(Dan Chu)이 승리하여 1974. 1월에 헌법을 개정하고 1년 9개월 후인 1975. 10월에 대통령 선거를 예정하고 있었습니다.

북베트남과 그의 남부 침투조직인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전면 군사공격을 하기 전에, 남베트남(월남공화국)의 내부로부터 혼란을 가져오고 와해시키는 전략을 채택하는 것은 너무도 상식적인 순서였습니다.
이 내부혼란과 와해의 기획, 조직, 투쟁을 격퇴 분쇄하는데 월남공화국이 실패한 것입니다.

언론자유와 인권보호제도를 유지하고 있던 월남공화국이 내부혼란, 와해를 막으려면 지식인들의 통찰과 협조가 필요합니다. 민주주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상당수 지식인들이 오히려 내부혼란과 와해의 기획, 조직, 투쟁에 가담한 것입니다.

가톨릭 사제를 존경하고 따르는 베트남 가톨릭 신자들의 영신생활을 돌보던 구엔 녹 란(Nguyen Ngoc Lan)신부가 반전과 평화(反戰과 平和)를 외치면서『반대』라는 이름의 잡지를 발행하였습니다. 그는 비밀리에 공산주의를 지지하였습니다.

공산전체주의와 누가 살아남고 누가 먹히느냐의 결전을 벌이고 있는 월남공화국 수도 사이공에서 가톨릭 사제복을 걸치고 평화와 무장해제를 주장하고 내세운 것입니다.

역시 가톨릭 사제인 찬 틴(Chan Tin)신부는 교도소개혁위원회의 이름으로 인권운동과 반전투쟁(反戰鬪爭)을 하면서 월남정부의 대공방어전쟁(對共防禦戰爭)을 비판하며 물고 늘어졌습니다. 이들은 멋모르는 많은 사제와 신도들의 지지와 추종을 이끌어 냈습니다.

고 딘 디엠을 지지하던 가톨릭 사제 찬 후 탄(Tranh Huu Thanh)신부까지도 1974. 9월부터『인민의 반부패운동』이라는 깃발을 들고 티우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였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티우대통령을 위시한 월남정부는 가톨릭 사제의 그런 자유를 허용하였습니다.

오일쇼크로 전 세계가 인프레와 불경기로 시달리게 되고, 미국도 월남공화국에 대한 원조를 삭감하고 있을 때, 이 가톨릭 사제들과 그 추종자들은『월남민주공화국』과 그 산하조직인『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기획, 조직하여 사이공을 위시한 여러 도시에서 벌이게 한 식량요구데모, 공무원 처벌요구데모에 합세한 것입니다.

휴전이 발효한 1973. 1월부터 8월말까지 8개월 동안 월남정부군 41,000여명이 전사하고, 4,000여명이 실종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런 때에 매일같이 직장을 달라, 식량을 달라는 데모가 사이공거리를 휘저었습니다. 노동조합은 식량과 의복을 요구하고, 해고무효를 요구하는 데모를 벌였습니다.

제2도시 다낭 길거리에서는 노동자들이 단식투쟁에 들어갔습니다. 1974. 11. 1.에 란 신부가 사이공 시가지 데모 중에 경찰에 구타당하였고,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이 티우 정부에 항의를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자, 공산군과 싸우던 월남공화국 군인들이『우리가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생명을 바치는가?』라고 회의를 품게 되고 사기가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월남민주공화국』군대가 진격하자『월남공화국』군대는 어이없이 그냥 무너져 내리고, 1975. 4월 30일에 월남공화국은 이 지구상에서 멸망하여 사라졌습니다. 그와 함께 월남은 언론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재산과 기업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죄형법정주의의 법치를 잃어버리고, 가톨릭 신앙이 공산당의 허가와 제한을 받는 처지로 떨어진 것입니다.

남베트남 인민은 말레이시아, 태국과 같이 번영하는 경제 대신 공산당이 통치하는 극빈국의 처지로 떨어졌습니다. 누구에게 호소할데도 없는 사회주의 관료제의 더 지독한 부패체제로 타락하여 갔습니다.

베트남을 공산전체주의의 족쇄로 몰아넣는데 크게 기여한 란신부는 그런 후 사제를 그만두었습니다. 두고두고 표창 받아야 할 공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월남민주공화국』당국은 란 신부 같은 분자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1990. 8월 5일부터 가택연금 시켜버렸습니다. 월남공산전체주의 승리에 도움을 준 틴 신부는 통일『월남민주공화국』당국에 의하여 1990.에 형을 선고받고 1993.까지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틴 신부가 언론자유의 월남공화국 시절에 떠들었던 반정부(反政府)의 1/5도 안 되는 발언을 한 점(데모는 고사하고 그냥 공산당원들의 과오를 지적한 것만 가지고)이『월남민주공화국』형법의 내란죄로 된 것입니다.
전 신부였던 란 씨와 틴 신부는 1998. 5. 3. 사이공 시내『구세주성당』에서 어느 연미사에 참석하고 함께 나오다가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습격당하여 란 씨는 뇌를 다치고, 틴 신부는 다리와 팔에 부상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가톨릭 교회법(Codex Iuris Canonici) 제285조 제1항이『성직자들은 개별법의 규정에 따라 자기 신분에 부적합한 모든 것을 전적으로 삼가야 한다』고 규정하고, 같은 제2항이『성직자들은 불미한 것이 아니라도 성직자 신분에 안 맞는 것은 피해야한다』고 규정한 것(1983. 1. 25. 교황 요한바오로2세가 개정 반포함. 그 이전의 가톨릭 교회법 제138조 제139조도 같은 규정을 하고 있음)은 2000년의 파란만장한 가톨릭 역사를 겪어오는 동안 교회와 교황성하들이 거듭 확인하여 내린 결론입니다.

1973. 1월의 파리평화협정 때부터 1975. 4월 30일 월남공화국 패망 때까지 2년 3개월여 동안 베트남의 똑똑한(세속적인 뜻에서) 일부 신부들이 정의의 깃발을 내세우고 이제 겨우 국가안보와 국민경제 발전에서 스스로 걸음마를 시작하는『월남공화국』을 조져댄 것입니다.
이런 적대진영 안의 자해분자(自害分子)들을 두고 레닌은『쓸모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무렵 1972.에 남미 페루의 G 구티에레스 신부가 발표 출판한『해방신학』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의『정의』를 내세우는 신부들이 공감을 하였을 수 있습니다.

당시 이해심 깊고 참을성 많은 교황 바오로6세는 심한 관절염 증세로 건강이 악화되어 갔지만,『민주주의』와『혁명』을 실천하는 사제들에게 그들의 일탈(逸脫)을 차분하게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제들의 거센 반대의 소음 때문에 교황의 경고가 일반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유럽, 미국, 남미, 인도에 걸쳐 상당수 사제들과 상당수 신학자들이『가난한 사람을 위한 우선 선택(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의 혁명을 주장하고,『교황교도권의 무류』를 무시하고,『하느님의 인민(the people of God)』을『인민의 교회(People's Church)』로 해석하기까지 하면서 투쟁하는 탈선의 소음이 컸을 때였습니다.

교황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역사적인 가톨릭 신자들은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고,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에게 자주 전구의 기도를 드리며, 공직청렴과 혼전순결의 개인과 가정의 성화를 권면하고,, 딱한 이웃에 깊은 동정심을 가지는 착한 마음씨의 구체적인 사제상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성직자가 스스로의 정의감이 순수하다고 확신하면서, 이 세상의 불쌍한 인민을 구출하겠다고 혁명과 정치에 나서는 경우,『잘하지도 못하고』『잘되지도 않는 것』이 가톨릭 역사의 뚜렷한 경험입니다.

성직자가 스스로의 정의감을 믿고 사회체제를 바꾸자고 발언하기 시작하면 『그 분야의 경험』이나『그 분야의 전문이론』이 없으므로『직관』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직관은 지구가 돌지 않고 태양이 도는 것으로 봅니다.

자기가 모르고 있는 것을 아는 것으로 자만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 5월 12일에『사제는 사제여야 한다. 정치는 평신자의 책임이다』라고 천명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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