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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 56 주년
REPUBLIC OF KOREA 호프 2 309 2006-09-16 17:42:20
생각해 보니 어제가 인천상륙작전(작전명: Chromite Operation) 56주년 되는 날이었다.
조선일보에 기사가 하나 있어 옮긴다.
6.25 때 미군이 5만4천명이 죽었다. (한국인은 민간인까지 수백만이 죽었지만...)
혹자는 '그거 다 미국의 국익을 위한 건데..'라고 한다.
당연하다.
문제는 '미국의 국익'과 '한국의 국익'이 맞았다는 점이며,
이 '국익의 일치'가 지난 50 년 간 이어져서 오늘날 대~한민국이 되었다는 점이다.

쌩아치xx들만, 이런 과거를 뭉게고, '우리 민족끼리'니 '내 동생 북한 동포 (사실은 북한 동포가 아니라 뽀골이일당 인데...)'니 하고 개x지랄을 떤다.

미국 때문에 손해본 거 하나두 없으면서,
미국 때문에 나라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왔으면서,
그리고 현재도 수많은 지식과 기술과 제도를 사실상 미국으로부터 도입하고 있으면서 (기업합작, 기술도입, 유학생....)
입만 벙긋하면 '민족'이고 '자존' 찾는 인간들이 설치는 꼬락서니란.....

미국과 대등해지고 당당해지는 것은 좋다.
그러나 과거를 깡그리 부정하면서 '자존'을 찾는 것은 뻔뻔하고 배은망덕할 뿐 아니라,
앞으로도 매우, 매우 위험하다.
잠재적으로 저...큰...사고뭉치인 중국을 어캐 감당하려고?
(고구려 동북공정, 백두산 영토 잠식, 해저자원 개발....)

* * * *
(조선일보 펌)

미 해병 5연대 소속 노만 스폰시 상병은 소총을 꼭 쥐었다. 1950년 9월 15일 오후 5시30분 그가 탄 상륙정은 인천 북부해안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무섭다. 무섭다.” 20살 젊은이는 두려웠다. 4m 높이의 방파제 너머 북한군이 얼마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상륙정에 탄 분대원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상륙정이 해안에 다다르자 분대원들은 일제히 2.5m 길이의 사다리를 방파제에 댔다. 파도가 사다리를 밀어 올리는 순간 그는 방파제 위로 뛰어 올랐다. “꼭 살아야한다. 살아서 서울까지 가야한다.”
56년 전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던 노병(老兵)이 반세기 만에 다시 인천을 찾았다. 15일 오전 그는 미국과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및 가족 220여명과 함께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했다. 76살. 스폰시씨의 머리카락은 희어졌고 귀에 보청기를 했지만 그는 아직도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했다. “비행기 폭격에 부서진 초가집 잔해가 해안까지 흩어져 있었습니다. 큰 저항 없이 그대로 인천 쪽으로 밀고 들어갔죠.”


인천에 상륙한 뒤로 그는 한국전의 중요한 고비고비를 몸으로 지켜봤다. 1950년 겨울 유엔군 2만 명과 중공군 12만 명이 맞붙은 장진호 전투에도 참가했다. 영하 30도의 추위 속에 중공군의 포위를 뚫으며 흥남 부두까지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4만여 명, 유엔군 2500여 명이 전사했다. “고지를 지키고 있던 우리 부대원 250명 가운데 저를 포함해 22명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게 살아남아서 흥남 부두 철수 장면까지 볼 수 있었죠.” 당시 그는 중공군과 싸우다가 대검에 배를 찔리기도 했다.


1951년 그는 13개월의 한국 복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1972년 상사로 제대할 때까지, 아니 56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번도 인천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다섯 자녀를 군인으로 키웠고 손자 8명을 해병대에 보낸 그는 몇 년 전까지도 인천상륙작전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분명 자랑스러운 기억이지만 당시를 떠올리면 두렵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좀 여유로워졌죠.” 얼마 전부터 그는 고향 애리조나에서 후배 해병들과 주민들을 상대로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에서의 경험을 강의하고 있다.





뉴스를 통해 한국 소식을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본 한국의 변화는 놀라웠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건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물은 하나도 없었죠.” 달라진 서울의 모습을 보고 송도 국제도시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그는 “놀랍다” “멋지다”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연발했다. “인천에 상륙한 우리 부대는 시가전을 벌이며 보름 만에 서울에 들어갔습니다. 가이드 말이 이제는 그 길을 1시간 반이면 간다니….” 그는 이런 놀람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인천에 상륙하던 날 본 인천 시가지와 이미 폭파된 한강대교가 너무 오래 머릿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달라진 한국의 위상말고도 그를 놀라게 한 소식이 있었다. 바로 56년 전 그를 인천에 상륙하도록 지시했던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에 대한 것이었다. “이번에 한국에 와서 시민단체들이 맥아더 장군 동상을 철거하자고 주장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놀랍고 당황스러웠죠.” 그는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대신 한 가지 부탁을 전해달라고 했다. “어느 나라를 가든지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은 분명 영웅입니다. 56년 전 저도 그를 믿고 상륙정에 올랐습니다. 지금 여기 우리가 있을 수 있게 한 수많은 사람 가운데 맥아더 장군과 수많은 참전군인들이 있었다는 것은 잊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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