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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봉건의 압박에서 벗어난 우리가 웨치는 자유의 의미는?
UNITED KINGDOM 은희 7 542 2006-10-27 07:33:32
이제 탈북한지도 5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예쁜 자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뭇 군인들의 시선을 꽤 받던 단정한 양복차림의 시절은 이제 머나 먼 추억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다섯살배기 아들애를 데리고 여기 저기 과외를 청하면서 한국 아줌마들의 조기교육 열풍에 어느덧 발도 깊숙히 잠겨져 버렸다.
뻐스도 택시도 이용하지 않고 매일 매일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등교하는 덕분에 학교길의 웬만한 가게의 코큰 아저씨들의 인사도 매일 아침 일과처럼 받는다.
" Hello, Have nice day!" 그들이 매일 아침 던지는 인사에 나는 오늘도 이곳에 살아있음을 느끼며
또 한번 이땅에 서있게 해주신 하나님과 그리고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갖곤한다.
얇은 카드한장에 매일 불어나는 파운드를 저축하면서 그나마 인제는 삶의 풍요로움을 제법 느끼기도 하고 코크고 눈 파아란 서양친구들과 제법 되는 영어로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대화도 나누면서
인젠 여유로움까지도 완벽하게 소화해내려고 한다.
그래! 벌써 유럽에 발붙인지도 어느덧 일년이 껑충 지나가 버렸으니까!...
그러나 그럴수록 머리속에 뱅뱅도는 가슴아픈 추억으로 하여 나의 마음 한구석은 늘 죄스러움에 몸부림치고 있음을 확인 하곤 한다
누구도 그러하겠지만 살아온 환경으로 하여 나는 처음 중국에 발을 딛는순간 소름이 오싹 끼쳐왔었다. 번쩍거리는 네온등빛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술취한 목소리들, 아스라하게 널린 쓰레기들을 덮고 힘겹게 누워있는 중국 길림성 도문시의 아스팔트길, 구석구석 패인 도로엔 진탕물이 고여있고
..... 암튼 그때의 심정은 호랑이를 피하려다 깊은 수렁에 빠진 토끼의 심정이라 할가?
되돌아 갈수도 없고 되돌아 가야할 이유도, 방법도,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서서히 중국생활에 적응되어 갔고 그나마 그것이 자유처럼 느껴졌다.
생활총화에 강연회 학습회 사상투쟁회 각종 회의에 회유를 느끼고 산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얼마나 자유롭게 느껴졌던가?
세상에 공짜란 없다.
그모든 회의 시간들이 나의 삶에서 자취를 감추자 마자 내게 외로움이란게 생기게 되었다.
중국에 도착한후 나는 재빨리 중국어를 조금 배우고 나서는 조선족 언니가 알고있는 한족친구를 많이 사귀였다.
원인은 한족들은 북한의 실정에 눈이 멀었었다. 탈북자들에 대한 소식에도 민감하지 않아서 내딴엔 안전함을 느꼈다. 그들의 생활은 내가 걸어온 길과 판이했다. 그들은 자유로웠다.
남자를 사귀고 돈을 모으며 여행을 즐겼고 술도 많이 마셨다. 그래도 그나마 담배를 피우는 여자는 없었던게 참으로 다행스럽기도 하다. 나는 담배연기를 엄청 싫어하기 때문이다,호호호
첨엔 그들이 부러웠다. 첨엔 그들처럼 살고싶었었다. 그들의 생활은 부유했고 그들의 정신은 늘 술에 취해있었고 그들은 그것이 부자의 행색이라 느꼈다.
점점 그들과 나는 함께할수 없음을 느껴졌다. 그들과 만나면 만날수록 그들과 함께 나눌 이야기주제가 없었다. 지나온 추억이며 미래이며 모든게 나와 거리가 멀었다. 돈 이야기도 나는 십원 이십원 많아서 백원인데 그들은 보통 만원 십만원 백만원이다. 그들은 러시아며 일본이며 홍콩이며 안 가본데가 없었다. 그들은 맛나는 걸 먹을때마다 날 보고 물어보군 했다.
북한에 이런것이 있니? 북한에서 이렇게 놀수 있니? 그들은 진정 인제야 에 흥취하고 있는 나를 동정하려 들었다.
그들에게서 새로나온 책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정치에 대한 이야기, 세계명작에 대한 이야기, 그 어떤 주제도 나의 마음과 일치한게 없었다.
ㅎㅎㅎ 그래서 나는 한때 이렇게 생각한적도 있었다. 이래서 우리가 매일 총화하고 학습회하고 강연회 하고 그랬었구나. 풍요로움 뒤엔 낙태함이 따라붙는법?! 다시한번 다시한번 공감했었다.
그래 그때를 더듬어 회상해 본다. 1990년 나는 김일성 종합대학 박사원 원장이였던 큰아버지( 어렸을때 들은 기억으론 황장엽동지도 체꼬유학출신으로 알고있다) 의 힘을 믿고 김일성 종합대학에 시험쳤다가 매---끄러졌었다. 그리고 재수없이 재수한것이 원산금강대학이다.
내가 그때 김일성 종합대학을 지망한 원인은 오직 하나 인민무력부에서 자신의 모든것을 다바쳐 연구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죄아닌 죄로 군복을 벗고 평양교육도서 출판사에서 편집원으로 일하시던 어머니의 꺾인 날개를 다시한번 펼쳐드리고 싶어서였다. 나는 우리 집안의 일을 가볍게 생각했었다.
그때나는 중앙당군사부장을 하시던 외 할아버지가 왜서 자강도 군사동원 부장으로 강직되셨는지도 몰랐고 그리고 외 할아버지가 등산하시다 자결신것도 그저 뇌출혈로 사망하신걸로 알고 있었다 .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나는 우리집이 몰락한 집안이라는걸 그때 당시 너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가 타락해 공부에 지장될것을 우려해 어머니와 친척들에게 일체 비밀로 하셨던것이다. 멋 모르고 부모의 반대도 무릅쓰고 김대에 시험치러 갔던 나는 또다시 한번 부모님의 마음에 칼질을 하였다. 그때 시험치러 갔다가 들렸던 전 국가보위부 부장 리진수동지의 딸인 엄마의 대학동창에게서 난 다시는 일어설수 없는 다시는 본 대렬에 갈수없는 우리 집에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예전과 달리 우리의 출신성분은 전쟁영웅출신대렬에서 종파혐의의 아리숭한 보자기에 싸여 있었다. 2년에 한번씩 우리집에 내려와 신원요해를 하는 중앙당 요원들이 우리의 생활을 요해하여 다시 평양으로 복귀시키려는 파견원들이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 한마디 한마디 조사하여 종파사대주의 요소를 탐지하는 생쥐무리들이였던걸 전혀 몰랐었던 것이다.
때로 문턱에서 처가집덕에 요모양 요꼴이 되었다며 연구사업을 포기하게되었다는 아버지의 한탄소리가 지금도 마음 아프게 들려오군한다.
예전과 달리 우리의 출신성분은 전쟁영웅가족대렬에서 이미 버려진 먼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픈 사연은 그보다 친척들에게서 버림받은것이다.
우선 당시 도안전국 총무과에 중위로 있던 큰 고모의 딸 사촌언니가 찾아왔다. 시집도 가야하고 안전복도 벗기 싫으니 돌아가신 고모와 아버지가 이붓형제라고 서류를 다 뜯어 고치잔다. 그거 하는데 300딸러면 된단다. 그 돈은 언니가 알아서 한다고.......약속이나 한듯이 평양 안전성 정치대학에서 작은 고모의 맏아들인 사촌오빠의 신원조회하러 왔다. 작은고모와 친 형제가 아니라고 써있는데 확인하고 수표해야 한단다. 아버지는 그렇게 해주셨다. 울지 않으셨다. 몇날 며칠 출근도 하지 않으시고 담배를 피우셨는지 그때 너무도 담배연기에 곤혁을 치루어 지금은 담배연기 근처에도 못간다. 엄마는 울었다. 하염없이 소리내여 울었다. 엄마의 눈물을 보면서 나는 더 한층 강해졌고 더 성숙해졌으며 삶의 진로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가질수 없는것은 욕심도 내지 말자, 할수 없는일엔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세상의 여인들이여 딸애 앞에서 눈물을 감추지 마시라! 그대들이 흘리는 진정한 눈물은 자녀들의 건강한 삶의 진리이다. ...1990년 이미 북한은 돈으로 출신성분을 고치는 자본주의 요소가 새싹처럼 움트고 있었다. 아니 이미 쑥대같이 되어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음호에 이음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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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로 2006-10-28 01:09:08
    ''호랑이를 피하려다 깊은 수렁에 빠진 토끼의 심정이랄까? ''
    은희님 글 너무 재미있게 잘 쓰시네요.
    남다른 글재주가 있는것 같아 그냥 썩이기에는 아까운것 같아요
    재미있는글 자주 올려주시구요.
    왜 한국에 살지 않고 멀리 영국에 까지 사시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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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ate 2006-10-28 01:32:47
    소중한 글 잘 읽었습니다.
    은희님 덕분에 중국에서 살때 느낌이 살아나네요.
    중국땅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정을 붙이면서도 어딘가 허전한 느낌, 공감대가 적은 그 느낌 이해됩니다.
    고국떠나 멀리 유럽이지만 열심히 노력하시는 모습 너무 멋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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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도 탈북자 2006-10-31 23:49:55
    은희씨는 글이 참 좋습니다. 글이 그사람이라고 했죠. 아직 한번도 본적은 없지만 은희씨의 글을 읽을때면 따스함이 느껴집니다
    앞으로 좋은글 많이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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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희 2006-11-04 04:46:46
    <하나로>님 <stste>님 그리고 <나도 탈북자>님 저의 글을 예쁘게 평가해주시는 님들의 향기가 더 따스합니다. 격려 고맙구요 열심히 살게요 감사합니다 매일 매일 좋은 일들만 있기를 축원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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