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너무빨리 왓네요 이걸 어쩌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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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가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한 인터넷 사이트가 북한의 기아상황 등 인권문제를 거론하면서 연극배우 출신 여성 탈북자의 누드사진을 유료로 게재해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들의 모습이나 북한의 공연 장면 등과 함께 여성 탈북자 A씨의 누드사진을 게재하고 누드사진을 보려는 사람들은 25달러를 내고 회원가입을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모델인 41살의 여성 탈북자 A씨는 북한 호위사령부 협주단의 연극작품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어머니인 김정숙 역할을 했다고 소개돼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북한 주민들과 탈북 난민의 인권실상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목적을 밝혔지만 모델인 A씨는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촬영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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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저널리즘이 생산해내는 탈북자 관련 기사는 크게 범죄, 사회부적응(빈곤), 탈북자 출신 연예인의 홍보성 보도로 구분된다. 2006년 9월부터 11월. 세 달 동안 생산된 탈북자에 관한 뉴스를 살피면 이러한 보도양상은 쉽게 간추려 낼 수 있다.
살인혐의 탈북자 무기징역”(강원일보, 9월26일) / “이것이 탈북자가 밀반입한 필로폰”(노컷뉴스, 9월24일) / “자유 찾아 왔지만 남한서 얻은 것은 죽을병뿐”(노컷뉴스, 9월22일) / “탈북자 시설 하나원에 ‘빈대’들끓어...”(노컷뉴스, 9월21일) / “탈북자 3중고, 여전히 미해결”(파인낸셜 뉴스, 10월13일) / “탈북자 33% 처벌 없으면 北 돌아갈 수도”(세계일보, 11월7일) / “달래음악단, ‘밥 많이 먹으러 한국 왔는데 배꼽티를 입으라니’...”(YTN, 11월17일) / “달래음악단 섹시의상 ‘남사스러워요’...” (스포츠서울, 11월17일)
북핵 실험을 시작으로 유난히 이슈화 되는 ‘북한’ 관련 보도 가운데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탈북자들의 모습은, 늘 이처럼 특별하다. 탈북자가 끼어있는 범죄 집단은 더욱 주목을 받고, 탈북 후 남한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여전히 ‘불쌍한’그들의 삶은 사회 부조리를 조망할 때 언제나 좋은 소재 거리가 된다. 또 가끔 그들은 ‘미녀집단’으로 등극하여 남자들의 ‘南男北女’의 환상을 일깨운다. 지난 8월 데뷔한 최초의 탈북자 출신 5인조 여성그룹 ‘달래음악단’은 순진무구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어필했다. 그러나 최근 생산되는 달래음악단과 관련된 기사는 ‘섹시의상’ 등의 자극적인 단어와 매치하여 남한과 북한의 당연한 문화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그녀들을 지나치게 ‘이질화’시키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조회수나 올리려는 ‘빈껍데기 기사’의 씁쓸한 단면을 그려낸다.
이처럼 우리의 저널리즘은 무섭거나, 불쌍하거나, 혹은 예쁘거나를 반복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세 가지 편견에 사로잡혀 탈북자들을 통한 남북사회의 동질성 보다는 오히려 우리와 그들의 이질성만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언론 보도의 태도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가 설파한 '오리엔탈리즘'의 작동방식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바 동양을 다룬 서구의 문학, 문화, 사상, 역사에 내재한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이자 지배방식이다. 이는 현 미국의 언론이 아랍 사회를 반서구적-위협적 존재로 접근하는 태도에서도 발견 된다. 탈북자에 관한 언론의 세 가지 시선 또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 감염된 굴절된 이미지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과거 냉전시대의 언론은, 남북사이의 복잡한 현안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아닌 북한의 실상과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편향되고 왜곡된 이미지를 생산해 내는 추측기사와 익명기사의 전파에 급급했다. 이로써 북한을 반남한적-위협적 존재로 규정지으며 친숙한 우리 ‘남한’과 낯선 그들의 ‘북한’으로 이분한 것이다. 오늘날 탈북자에 대한 ‘두려운 시선(무섭거나!)'은 과거의 이분법적인 틀 안에 갇힌 적대적인 대북 보도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은 ‘남한=문명’과 ‘북한=야만’이라는 인식으로 확장된다. 기존 언론은 남한과 북한의 비교에 있어 남한을 가치의 중심에 두고 북한을 ‘불완전한-미개한’ 사회로 평가하고 판단하며 낙후한 북한사회를 열등한 타자로 간주 했다. 북한 사회의 특수성과 다양성을 배제한 채, 우리의 ‘시대적인 열등감’의 틀 속에서 그들을 파악한 것이다. 여전히 ‘꽃제비 탈북자’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며 탈북자를 무시하는 열등적 보도(불쌍하거나!)의태도는 과거(식민지로서)의 심리적 억압과 현재(적어도 선진국은 아닌)의 열등감에서 얼마간 벗어나려는 안이(安易)한 속셈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타자의 불행은 우리의 행복이다.’ 라는 말을 우리의 저널리즘은 어쩜 이리도 잘 실현하고 있는지 대견할 따름이다. 불행한 북한의 현실을 강조하면 할수록 우리는 비교 우위의 행복감을 실감할 수 있다. 이 대견한 태도 덕분에 결국 북한은 우리의 ‘부정’으로서의 ‘동양’이 되어버린 셈이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묘사한 가장 상투적인 이미지는 이국적이고 신비한 동양이다. 서양으로 하여금 정복하고 지배하도록 유인하는 여성적인 환상과 동경의 ‘오리엔트’는 남한사회가 북한의 여성을 바라보는 지배적인 시선과 맞물린다. ‘北女=美女=처녀=개발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우리 사회의 담론이 그것이다. 이는 2002년 부산 아시아 게임 당시, 북한 ‘미녀’ 응원단에 대한 남한 남성들의 환호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탈북 여성, 특히 무용단 출신의 ‘미녀 탈북자’를 사회적 이슈로 다루는 것은 외모주의로 버무려진 오리엔탈리즘의 작동이라고 본다. 최근 ‘달래음악단’을 순진한 처녀의 이미지로 상징화 하는 것 또한 이러한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탈북자 출신 연예인의 홍보성 보도(예쁘거나!)는 ‘南男’의 향유 대상으로서 ‘신비로운 북한美女’의 이미지만 구축할 뿐이다.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지적한 ‘발전한 서양과 낙후한 동양’이라는 식의 대비는 서구가 비서구 세계를 인식하는 고정불변의 공식이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이라크전에 대한 미국의 입장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탈북자를 바라보는 우리 언론의 세 가지 시선 또한 ‘발전한 남한과 낙후한 북한’이라는 대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수한 인종인 서구인이 미개한 동양인을 지배하여 문명세계로 인도 한다’는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의 논리와 흡사하다. 제국주의 논리는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북한과 남한을 동양과 서양으로 환치시킬 때 드러나는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은 긍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최근 집계에 따르면, 2006년 현재 입국한 탈북자의 수는 1만 명에 육박했다고 본다. 더군다나 중국 및 동남아시아 일대에 10만 명으로 추산되는 탈북자들이 안정된 정착을 꿈꾸며 이국땅을 떠돌고 있는 실정임을 감안한다면 입국 탈북자의 수는 급격히 증가될 전망이다. 이제는 더 이상 탈북자 소식이 낯설지 않을 만큼, 그들은 우리 곁에 ‘바짝’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탈북자들을 편협한 ‘세 가지 시선’으로 가둬두기에 이미 그들의 활동 영역이 편견의 울타리를 뛰어 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만 한다.
SBS가 지난 12일, 19일 차례로 방영한 <SBS스페셜/ 특별기획 2부작-'탈북자'>는 이러한 세 가지 편견에서 벗어나 탈북자들이 이 땅에서 겪는 희로애락을 되도록 사실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방송 저널리즘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제1부]에서 다룬 이용운 일가(97년 탈북)의 ‘남한 적응기’에 담긴 서로 나누고, 아끼고, 보살피는 ‘가족’공동체로서의 모습은 지극히 일상적이기 때문에 특별하다. [제2부]의 주인공인 ‘달래음악단’의 다섯 멤버의 생활 역시 우리와 다른 점이 없다. 신나게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을 예쁘게 치장하는데 관심 많은 20대의 평범한 소녀일 뿐이다. 그렇다. 그들은 평범하다. 그런데 남한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그들은 자꾸만 ‘평범하지 못한’사람 되어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평범한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남들의 일상이 그들에게는 가장 절실한 바람이다. 우리 곁엔 이미 1만 명의 탈북자가 살고 있다. 우리의 언론이 이제는 우리 속의 오리엔탈리즘을 벗어던지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다.
북한과 관련된 보도주제에 따른 북한 이미지를 분석한 한 연구결과(이기현,「북한 관련 보도 프로그램의 경향과 문제점」,2002)에 따르면, 수용자들은 ‘군사-핵’관련 보도에 관련지어 북한을 적대적이고 비합리적인 집단으로 인식했으나 ‘문화교류’적 측면의 보도를 통해서는 그들과의 동질감을 형성했다. 저널리즘(넓은 의미로써 모든 대중전달 활동)은 북한과 남한의 문화교류를 창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통로가 될 수 있다. 신문은 북한의 문화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북한 문화섹션]을 별도로 마련하여 다채롭게 변화하는 북한의 문화와 관련된 수준 있는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방송 저널리즘은 신문매체보다 더 다양한 문화 교류적 콘텐츠를 생산 해낼 수 있다. 우선 탈북자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는 이제 그만 사양이다. <SBS스페셜-'탈북자'>역시 정부의 정착금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탈북자의 모습이나 두만강 국경지대에 움막을 치고 사는 험상궂은 탈북자의 모습(여전히 우리와는 다른 그들의 모습)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한 채, 후반부에 긴장감 있게 구성하여[1부] 찜찜한 뒷맛을 남겼다. 그렇다. 우리는 뭔가 ‘특별한 문제’에 있어 그것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 다큐멘터리의 포맷으로 탈북자들을 다루는 것은 그 방송 자체로써, 사람들에게 차별적 인식을 강요할 수 있다. 남북 문화교류를 촉진시키는 새로운 포맷의 개발을 위해 우리와 같은 분단의 역사를 거친 서독의 방송을 참고할 수 있겠다. 1960년 중반부터 제작-방영한 서독의 통일관련 프로그램 소재는 동독인들의 일상을 조명할 수 있는 일반소재로 전환하는 특성을 보인다. 즉 동독인이 휴가를 보내는 방법, 동독 대학생들의 문화 등 정치문제보다는 동독인 일상생활의 문제점을 소재로 다루어 상대방(동독)에 대한 인간적 친밀감과 이해를 추구하였다. 우리의 방송도 이와 같은 서독의 방송 사례를 고려하여 탈북자의 삶을 휴먼 드라마의 소재로 활용하거나, 남한 대학생들과 더불어 생활하는 탈북대학생들의 모습을 위트 넘치는 시트콤으로 구성하는 등 탈북자들과 관련된 ‘보편적이고 대중적인’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한다. 탈북자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특별할 필요는 없다. 기존 트랜디 드라마의 스토리 라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도 좋다. 만약 탈북자의 삶이 스토리의 단독적인 줄기가 된다면 갑작스럽게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가녀린 여자 주인공이나 부잣집 외동딸이나, 가난하지만 밝고 씩씩하게 살아가다 백마 탄 왕자를 만나는 기막힌 신데렐라들의 이야기보다 어쩌면 훨씬 더 신선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콘텐츠의 생산과 방영을 통해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1만 명의 탈북자들을 더 이상 세 가지 편견에 가둬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탈북자에 대한 관심은 북한 문화에 대한 관심을 유발해 낼 것이며, 이는 곧 왜곡되지 않은 북한 사회의 모습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시각 형성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저널리즘의 적극적인 변화를 통해 탈북자들은[무섭거나, 불쌍하거나 혹은 예쁘거나]로 반복되는 세 가지 편견에서 벗어나 남한이라는 새로운 삶의 공간에서 담담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어느사회든지 사람이여렇모이면 부작용과 편견이 팽배하게일어 난다 하지만 좋은점만 바라보는 남한의
시각과 인권주의로 판단했으면 좋겠다
~~탈북자,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은 그들의 ‘꿈이 이뤄지는 그날’을 기대해 본다.~~
니가 아냐? 눈물젖은 빵의 맛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