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태조 누루하치는 신라황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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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 ] " 금의 시조는 함보이며, 본래 고려에서 나왔고, 그 때 나이 60세였다 " [ 송막기문 ] "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에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 " [ 만주원류고 ] "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 [ 고려사 ] " 평주의 승려 김행의 아들 김극수가 금나라의 조상이다 " 위의 여러 역사서를 종합하여 살펴보면 금나라는 신라의 김씨족이 가서 세운 나라이고 " 금(金) " 이라는 국호는 신라왕성 김(金)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역사서에 따라 금태조 아골타가 고려인 김극수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김함보의 8대손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나 신라계 김씨 출신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님이 궁금해하는 누루하치는 금태조 아골타의 16대손입니다. 고려 시대 때 윤관이 변경의 여진족을 내쫓고 동북 9성을 쌓습니다. 그 때 여진족 사신이 고려의 임금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 예전에 우리 태사영가가 말하기를 우리 조상은 귀국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 금(金)나라는 나중에 후금(後金)이 되고 이 후금(後金)이 중원을 정복하여 세운 왕조가 바로 청나라죠. [ 만주원류고 ] 라는 청나라 사서는 삼한(三韓) 즉 마한, 변한, 진한을 한반도 남쪽이 아닌 만주 땅에 배정하고 고대에 신라가 만주땅을 점령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 청나라는 신라를 계승했다 ' 라는 내용의 역사책입니다. 뿐만 아니라 청태조 누르하치가 중원을 정복하고 청을 세우면서 성을 " 애각신라(愛新覺羅) " 로 바꾸는데 그 뜻은 " 신라를 사모하고 기억한다 " 입니다. 누르하치는 조선을 멸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 한수이북은 자신의 선조가 태어난 땅 " 이라 말하였고 삼전도 항복 때는 " 본래 우리는 고려의 후손으로 그대들과 같은 나라였거늘 어찌하여 동족을 따르지 않고 명나라를 돕는가? " 하였으며 우리 나라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누루하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조선왕에게 보냅니다. " 부모의 나라를 침략한 쥐같은 왜구들을 ...수장시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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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누루하치가 조선에 원병을 보내준다 했을때 선조는 "어찌 야인의 힘을 빌리겠는가." 뭐 이런 식의 체면때문에 거절했고, 누루하치는 사람 대접도 못 받았다고 느껴서 훗날 조선을 정벌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였거나 믿을 만 하다고 여겨질 때만 특정 사실들을 인정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믿습니다.
지랄님!
어제가 없었다면 오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를 나라는 독립된 존재로 인식하고 있으나
그 나란 존재 속에 각기 선조들의 거의 모든 것이 스며들어 있을 수도 있겠지요.
하물며 우리의 역사는 남과 북 모두 심하게 왜곡돼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올바른 역사를 더듬어 보는 일을 두고
지랄이니 정신 빠진 것이라고 표현하셨는데 혹시 님께서는 우리들의 상고사에 대해 공부해 보신 적은 있으신지요?
아니면 우리들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라도 있으신지요?
역사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님의 존재에 대한 참된 연구이기도 할 님의 양친이나 조부모 등 조상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신 적은 있으신지요?
물론 윗분의 글 속엔 '애신각라'처럼 실수로 잘못 표기된 부분도 있을 수 있으며, 역사적 사실의 입증이 어려운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모른다 하여 타인의 글을 함부로 폄하하진 마십시다.
남북통일을 위해서도 올바른 역사연구는 꼭 필요할 것입니다.
한민족의 동질성은 역사 속에서 찾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이니까요.
그리고 ㅎㅎㅎ님!
과거 등소평은 주중 한국대사와 환담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고향 사천성이 과거 백제땅였음을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중국 고대 정사들이 중국지역에 백제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음도 사실이고요.
님 만약 조선족 동포시라면 우리의 슬픈 역사를 비웃지 마십시오.
그건 님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니까요.
각각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저술한 김부식과 일연이 당시의 세태인 사대주의 사상에 물들어 의도적으로 누락한 우리들의 역사는 수두룩하니까요.
수년 전 어느 천문학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서에 기록된 천문 관련 사실들을 데이터로 입력한 시뮬레이션을 이용하여 과거 초기의 신라와 백제 및 고구려 모두가 중국지역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입증한 바도 있습니다.
참고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비록 사대주의에 입각하여 저술되긴 하였으나
내용들 중 천문 관련 기록들만큼은 가히 세계적인 역사기록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단군설화에 등장하는 곰과 호랑이를 그것들을 숭배하는 부족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기록시대 이전의 역사는 구전으로 전해질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는 자신의 무식을 강변하는 식으로요.
새로운 문물을 가진 도래인 집단인 단군세력에 대해 원주민 세력 곰숭배부족과 호랑이 숭배부족의 반응이 가장 적절하게 표현된 것이 단군설화일 수도 있겠지요.
현재 곰숭배부족과 호랑이 숭배부족의 흔적들은 서쪽의 훈족부터 동쪽의 에스키모까지 세계 도처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물론 거란족과 여진족 모두 그 범주에 포함됨은 오히려 지극히 당연할 것이고요.
무명님께서 지적하신 임란 당시 선조의 그 표현조차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무지의 소산으로 평가되기도 하지요.
자기 존재의 의미나 가치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정착이라면 그 정착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봄빛 완연한 좋은 아침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날 맞으십시오.
역사학자들의 말처럼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는 금나라를 기리며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지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계승한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가 신라인 이라는 문헌들은 많이 존재한다.
먼저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金史)'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金之始祖諱函普 (금나라 시조는 이름이 함보이다),
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60세가 넘었다)
兄阿古好佛,留高麗不肯從 (형 아고호볼은 따라가지 않고 고려에 남았다)
금나라의 시조인 함보가 60세가 넘은 나이에 고려에서 왔는데,
그의 형제는 고려에 남고 혼자만 금나라로 왔다는 이야기다.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에도 금나라의 태조에 대해 "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한다 '는 기록이 있다.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松漠紀聞)'은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 "고 전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가 비단 중국의 사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후손 임을 주장하는 부안 김씨들은 그들의 '족보'를 내세워 '금사', '만주원류고', '송막기문' 등의 내용을 이렇게 뒷받침한다.
"함보는 법명이고 그의 본명은 김행 (혹은 김준)으로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자 경순왕 김부의 손자이다.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다른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금나라의 역사서 '금사'와 거의 대부분 일치하는 주장이다.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이라는 점만은 어느 이야기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예를 더 보자면,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 역시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김준은 삼형제인데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고 밝히고 있어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 김함보 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