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광장

자유게시판

상세
빨갱이 조직원이 된 남해친구
Korea, Republic o 곽정부 15 436 2007-04-17 22:41:18
누가 나에게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경관)을 묻는다면 한려해상 국립공원이라 말할 수 있다.
어는때가 여행가 지인에게서 남쪽바다 예기를 듣고 그곳을 다녀오게 되는데 그 여행에서 남쪽바다의 신비한 풍광에 깊이 빠져 혼은 거기두고 몸만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언제나 잊지못해 남해를 관광지로 개발하려 노력하여 [한려해상 국립공원 해수욕장 리조트건설 프로젝트]로 남해를 10 여년 동안 200회 이상 출장했다.
그해 5 월, 창선부둣가에서 압구정동에서 땅 사러온 L 란 사람을 부동산 업자가 소개했다.
L 는 풍체가 좋고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으로 신사동 소망교회서 한부록 건너 광림교회 집사로 현대아파트에 살았다. 전직이 K출판사 영업상무을 하여 술고래라 할 수 있었다.
창선 부둣가서 인사을 나누며 명함을 주고받아 서울에 올라가 만나기로 약속하여 얼마후 압구정동 현대증권에 갔다 연락되어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성격이 호탕하여 무골호인이라 금방 의기상통(vigor mutual)해 친구가 됐다.
L의 가족 관계을 알게 되는데 손위 누나가 한 분있고 매형 되는 사람이 병무청 고위직에 있어 당시 상류층 자제들이 군대 안가려고 돈으로 병역면제를 청탁해와 뇌물로 치부하여 때돈을 벌었다.
공직자가 자기 명의로 부동산을 매입하기 곤란하다 하여 처남인 이친구 이름으로 부동산을 사들이고 매형 재산관리인으로 살고 있었다.
나중에 인사시킨 부인도 상당한 미모로 자녀는 3 남매를 두고 있었다.
자녀들이 중,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부인을 딸려 미국에 조기유학 보내 기러기아빠가 되어 학비와 주택구입 할부등 삼개월에 2000만원씩 미국으로 송금했다.
거기다 부인을 보러 6 개월에 한번꼴로 미국을 왕래하여 국내에 있을때는 외롭다며 연락해와 식사자리를 자주 만들었다.
그런 중에 부유층 자재들과 운동선수들 병역문제가 들통나 매형은 병무청을 사직했다. 그동안 축재한 재산이 기십억으로 가만 있었으면 상류층 생활로 지낼수 있었는데 사기꾼꼬임에 부동산회사 회장자리에 취임했다 회사가 부도나자 당좌수표 개인배서로 알거지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과거 재임당시 비리가 탄로나 구속되여 감옥살이를 하게 되고 나와 개인 택시를 운전하였으니 재산은 몽땅 빛잔치로 날아갔다.
매형의 거만의 부가 흔적 없어지자 곤궁해진 것은 이친구였다.
수도권에 L 명의로 된 점포주택을 팔았는데 집판돈은 매형 빛잔치로 들어가고 양도소득세가 나온것을 급한 김에 세금납부 할돈을 다른데 쓰게 된것이 체납 되어 남해에 매입한 여러필지 부동산이 압류되고 국세청 경매로 다 없어졌다.
부자가 망해도 3년 간다는 말대로 처음은 살고 있는 압구정동 아파트를 팔아 미국 유학가있는 자녀들 학비와 주택할부 3개월치 2000 만원을 보냈다.
수입화장품 대리점을 열었으나 경험이 없어 실패하고 남은 돈으로 잠실에 전세방을 얻어 이사했다.
그것도 잠간이요 나중에 까먹을 돈도 없어지자 전세보증금 몇천만원을 회수하여 남해에 사놓은 토지에 조립식 주택30평을 짓고 홀로된 늙은 노모를 모시고 섬으로 이사했다.
그사이 간혹 만나 술잔을 건너며 위로 했으나 사회경험이 출판사 영업직과 매형재산 관리 밖에 없어 어촌에 가도 아무 할일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이 어촌 생활이 지출할 것이 별로 없어 기초생활비로 지낼 수 있지만 미국 있는 처자식은 고생할 수 밖에 없었다.
급할 때면 살고 있는 조립식집을 담보로 농협 대출을 받아 미국으로 보내 나중엔 겨울철에 보일러 기름 값이 없어 냉방에 지나게 되었다. 남해에 출장가면 모텔에 숙박하지 않고 L 집에 지내다가 해어질 때 당분간 지낼 식료품과 몇푼의 돈을 쥐어 주고 서울로 돌아 오곤했다.
업친데 덮친격으로 연세 많은 노모가 당뇨와 중풍에 걸려 대. 소변을 받아 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말년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간혹 급하게 작은 돈을 빌려달라 하면 돌려 받을 길이 없어도 거절 할 수 없었다.
겨울에 정부에서 농어촌 소득 없는 가구를 위해 새마을사업 같은 것이 있으면 일당16.000원을 받고 노동하러 다니게 되자 겨울바다 바람에 타서 초라한 몰골로 옛날의 풍모는 간데 없고 고생이 찌들자 체면도 없어졌다.
어는때 출장가서 찾았더니“모친이 죽어 장사지냈다” 하여 “왜 연락하지 않았냐”고 추궁하자 변명이 궁색해 무슨 일이 있었구나 짐작 만하고 더묻지 않았다.
어머니 마저 돌아가시고 혼자 고생하다 다시 겨울이 닥치자 견딜 수 없어 서울에 올라와 변두리 월세방에 사는 누님집에 겹쳐 살면서 정수기판매 하러 다녔다.
잘 지내는가 싶더니 어쩔 수 없었는지 어느 날 찾아오고 다음부터 매일 같이 오전11시면 강동구의 Bosch 대리점에 와서 식사를 해결하며 간혹 용돈을 빌려 달래 겨울을 지내고 봄이 되자 다시 조립식 집이 있는 남해로 내려갔다.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철이 되어“ 꼭 한번 보고싶다”고 전화해와 출장겸 다녀오기로 하고 승용차로 일직 출발하여 삼천포항에 도착했다.
늘하던 대로 부두가 수산시장에서
“숭어회를 떠달라”주문하고 막걸리와 함께 차에 실고 친구 집에 전화를 걸었다.
“ 지금 삼천포항에 도착해 숭어 회치고 있으니 좀 기다려라”고 하자 이친구는 “숭어는 살이 연해 맛이 없으니 광어 자연산으로 교환하여 오라” 다 아는 사실을 말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음속에 “금광이라도 발견한 것일까!” 생각하며 형편이 나아 졌으면 자기가 준비하면 않되나 의혹 반 호기심이 댕겼다
그때는 창선대교가 건설중이어서 승용차를 배로 날라 삼천포와 창선사이를 왕래할 당시다.
마음이 급해 서둘러 지족대교 못미처 오른쪽 언덕배기에 있는 친구 집을 향해 달렸다.
평소에는 창선 섬 일주도로 남쪽으로 그림처럼 펼쳐진 남쪽바다 경관을 구경하며 천천히 가는 여행길 인데 “자연산 광어 주문에 ?” 등급이 상승한 것으로 생각되는 친구 형편이 보고 싶어 마음이 급해 졌다.
친구의 조립식 집은 원래 밭떼기를 토지로 용도변경하여 건축한 창선섬 끝머리 언덕에 있었다.
거실 창으로 보이는 남쪽바다에서 갈라저 들어온 바다물이 강같이 흐르는 아름다운 풍경(scenery)이 연출되는 장소였다.
잠시 후 친구집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숭어회를 안주로 막걸리 잔을 나누며“살고 있는 형편이 좋아진것 같지 않은데 웬고급 입맛이란 말인가” 이해 할 수 없는 의식의 벽에 부딪쳤다.
잠시쉬고 대화하다 친구와 같이 지족다리 건너 삼거리슈퍼로 쌀과 부식을 사러 갔다.
창선과 지족을 연결하는 지족대교는 뉴스에 한동안 나온적이 있었던 부실공사로 건축수명을 못 채우고1991년에 무너진 한국최초 교량으로 5년 걸려 새로건설한 작은 해협을 건너는 교량이다.
슈퍼에서 L 이 당분간 지낼 수 있는 20k포대 쌀과 식료품. 보일러기름을 사서 차에 싣고 친구 집에 내려 놓았으나 시간이 남아 군청에 용무를 보고 오기로 했다.
“3시간 정도 걸리니 식사준비나 하라” 당부했다. 남해 군은 L의 집에서 왕복 32K 거리였다.
용무가 끝나 저녁 해가 저물어 친구 집에 돌아가니 식사준비 하고 있었다.
“그 동안 무얼 했냐”고 물으니
“먼 동네에 불쌍한 사람이 있어 아까 슈퍼서 사온 쌀절반을 갖다주고 오는 길” 이라 대답했다.
어려운 사정을 보면 나도 주머니 터는 성격이지만 L의 행동은 무슨 이유인지 앞 뒤가 맞지 않았다.
이친구가 하는 행동을 어떻게 이혜해야 하나? 무엇 때문인가 ?
인내로 의혹을 누르며 숭어회와 막걸리 곁들은 저녁식사를 하며 예기을 걸어 보기로 했다.
무슨 사연이 있을것 같았다.
“그 동안 어떻게 살았냐 ? ” 물으니
“ 설천이라는 동리에 전직이 무슨 조합장이라는 사람과 친하게 되었는데 (친북 조직원 법무사 사무장이 소개시켜줌)이 사람이 자연산 회를 항상 대접해줘 이제 회라면 신물이 난다”는 대답으로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이제는 먹고 사는데는 걱정이 없다”며 사는 형편과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서울로 올라가 살 수 있다며 그 동안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등의 말을하여 궁금증이 더했으나 물어볼 짬을 주지 않았다.
식사후 T V 방송 뉴스에서 2002년 대통령후보 출마명단을 발표하자 친구가 설거지 그릇을 정리하다 말고
“다른 대통령후보 출마자들은 다 이해가 가는데 장세동후보 출마 이유는 정말 모르겠다 ”고 의아해? 물어 왔다.
"김대중이 재임중의 부정비리로 일신의 안전을 위해 노무현후보를 대통령에 밀고 있는데 장세동 후보는 전라도 고흥사람으로 전두환 전대통령의 심복인 것은 다아는 사실이 아닌가
전두환 전대통령은 노무현후보 장인을 감옥서 죽게한 책임이 있다고 노후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광주사건 청문회 때 퇴장하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뒷전에다 명패를 던진 행동으로 알 수있지 않는가 .
만약 노무현후보가 대통령에 당선 되면 보복이 두려워 장세동후보 낙선이야 뻔하지만 다만 몇십만표라도 호남표를 갈라 놓기 위해 장세동후보가 출마하는 것이다 ” 말해 주었다.
그러자“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 가난한 사람이 살기 좋아 질거라”고 동문서답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다음날 친구와 작별하고 서울로 올라온 3.4 후
“장세동 후보가 대통령후보를 사퇴한다”는 뉴스가 방송에 나오는 것을 보고 창선 섬에 살고 있는 L의 모든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조직이 L 를 포섭해 정보수집과 선거운동원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런 결론을 내릴 때 그동안 미지수의 행동이 이해되고 앞 뒤가 명확해 졌다.
뿐 아니라 그간 남해 사업일부가 묘하게 엉크러져 손실 본것에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 조직의 지령과 보상에 친구를 배신하고 뒷통수를 친 것이다
노무현 당선으로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 서울에 온 남해친구로 부터 전화가 왔다.
목소리도 당당하게 “서울에 왔으니 그 동안 신세도 갚고 만나자” 하여
“이젠 너와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이유를 묻길래
“조국의 자유와 정의를 위해 빨갱이(red organization)세력과 투쟁하고 있는데 저들에 매수되어 배신했으니 이젠 친구라 생각지 않는다” 말했다.
이후 L 로 부터 연락은 없었으나 조직원으로 호구지책 한다고 알고 있다.
가난에 고생하는 사람을 포섭하여 적색분자로 이용하는 것은 좌파의 기본이라 이상할것도 없었다.
나중 알게 되었지만 조직에 포섭 되면 처음부터 빨갱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뇌교육을 통해 점차로 과정을 거쳐 골수분자로 변하는 것도 보게 되었다.
중국에 단기 체류하다 온뒤 확연히 달라진 또다른 친구 J , 우정, 신의 는 내 팽게치고 배신으로 친구등에 칼을 꼽는 조직의 세뇌교육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옛친구가 빨갱이 조직원이 되어 도움을 배신으로 보답하는 한국의 현실이 되었다.
좋아하는 회원 : 15

좋아요
신고 0  게시물신고

댓글입력
로그인   회원가입
이전글
고생한 부모, 불량배 자식, 거지 손자
다음글
북한주민을 짓이겨 얻어 누리는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