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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주민 참담함을 돌아보는 자 복받는다.
Korea, Republic o 구국기도 0 468 2007-06-04 10:50:21
1.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모든 것은 심고 거두는 것이다. 오늘날 사채시장이 TV를 통해 무이자~ 무이자, 지시암시를 주면서 하면서 서민들의 곁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물론 그런 사채가 큰 부정과 일시적 긍정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고 하는 소리들이 우리 곁에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아픔이고 그런 아픔이 우리나라의 서민들을 어디로 끌고가는가 하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지금의 정부의 속내는 무엇인가? 서민경제의 파탄은 무엇인가? 그런 것은 어떤 종류로 우리 사회를 요동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본다. 가진 자들의 천민자본주의가 서민들의 삶을 수전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쩐의 전쟁으로 몰락되게 하는 결과를 갖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우리의 적은 김정일이다. 하지만 서민들의 적은 돈이다. 라고 한다면 敵이라는 목표를 공유하여 나가는 전쟁터에서 두 敵을 목표로 한다면 무엇을 얻어 낼 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우려하는 지도자는 보이지 않는다고 본다. 무엇이 우리의 敵인가? 敵을 이기는 길은 또한 무엇인가? 우리 사회의 국가위기에 대한 무반응은 무엇이 그 원인인가? 어쩌면 적들이 全방위적으로 교란을 하고 있다면 도대체 우리사회를 지켜내는 全방위논리라는 것은 있는 것인가? 돈 없는 자들의 절망감은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단어 속에 담아만 내면 그 카타르시스를 양쪽에 다 줄 수가 있다고 보는 것인가?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단어 한 마디 뒤에서 겪는 서민들의 절망감은 무엇인가? 그런 절망감은 천지개벽적인 것은 아닐까?

3. 없는 자들의 천지개벽적인 심리는 가진 자들을 증오하게 하는 정책에 맞물리는 부분의 심리전 스파크 현상을 우려하게 된다면, 그런 스파크가 서민들의 애환과 절망에서 나오는 분노의 가스를 폭발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면 무엇을 얻어 낼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런 밑바닥을 가지고 국가 위기에서 과연 전투라도 제대로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전투할 때 서민들은 개벽 쪽에 선다면 이 땅의 가진 자들의 입지는 좁아진다고 한다면 어떤 것을 과연 얻을 수가 있을 것인가? 우리가 보기에는 과연 이 세대가 가진 부요가 장구한 재물로 이어질 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슬퍼 보이는 현실에서 다가오는 것의 미래와 그 일부는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진심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의 모든 것은 무엇인가? 만일 해방구라도 발생한다면 그 천지개벽적인 분출되는 심리를 가진 서민들의 아픔은 무엇으로 나타날 것인가?

4. 全방위적으로 나타나는 이런 사회함몰 현상의 진실한 내역은 무엇일까? 이런 것을 연구고찰해 볼 수 있는 연구 재료는 있는 것일까? 우리가 보기에는 무엇을 보던지 재료가 없는 것이 분명한 분노를 갖게 하는 또 하나는 전문가들의 유기적이고 미필적인 태업을 보게 된다. 이런 문제를 깊이 있게 살펴 볼 수 가 있다면 우리가 지금의 원인이 만들어 내는 미래는 과연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의 개연성을 찾아 낼 수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런 것이 없다면, 다만 직관적 통찰력을 통해서 생각해 보는 것인데, 문제는 증거적인 재료를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때문에 자료 조작으로 얼마든지 현상학적인 고찰을 오도 및 호도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판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구국의 의미는 무엇인가? 진정으로 구국은 가난한 서민들을 돌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자는 말이다. 그런 인식을 기초로 해서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본다.

5. 우리가 우려하는 미래는 무엇인가? 서민들이 공격의 목표를 김정일이나, 북한주민의 구출에 두지 않고 자신들의 절망적 사채에, 경제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서민들의 공격 목표를 김정일과 북한주민의 해방에 둔다면 어떤 결과를 가질 수가 있다고 보는 것일까? 지금 자유 대한민국은 과연 사채시장이 이렇게 창궐하도록 하는 것이 시장자본주의의 순기능이라고 보고 있는 것일까? 그런 것이 김정일 주구들의 술수, 의도적으로 만들어 발생된 내용이라고 하는 것일까? 이런 것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미래를 구원하는 것의 길은 발견할 수가 있는가? 미래의 구원은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그런 구원의 길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우리의 서민들의 미래를 구출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런 것을 계몽하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이웃 사랑을 권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낼 수가 있다고 본다. 그런 것을 무엇으로 계몽할 수 있는 것인가?

6. 날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로 국가의 위기를 건져내는 길이라고 본다. 그런 위기를 건져내는 길의 방법은 여러 가지라고 보는 것이지만 그 바닥이 되는 서민들을 버려두고 중산층을 중심으로 이 나라를 구출하려고 한다면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서민들은 절대 가난에 내몰리고 있고 그들을 더욱 錢의 노예로 만들어 가는 것을 외면하면 천지개벽을 바라는 限으로 氣化되고 있다면.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접근하는 모두의 노력은 없다. 자업자득으로 보려는 冷笑에 걸친 판단이 서민들의 인생을 오히려 괴롭히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낙오된 자들이 겪어야 하는 인생 몰락이라고 하는 것의 냉소에 곁들려 있는 것이다. 살맛이 안 나는 서민들을 두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는, 인생의 인간 간의 거리가 오히려 더 멀어지는 間隙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어찌 될 것인가를 생각한다.

7. 우리는 그런 간격을 좁히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부동산 붐에 빠져서 많은 자들이 허덕이고 있다는 것인데, 우리사회의 버려진 이웃들을 돌아보는 작업을 하는데, 이런 것을 다 해결하려는 것의 내용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해결하려는가? 양극화를 외치는 자들이 사회안전망을 운운하면서 정치적인 냄새가 나는 접근으로 좁혀가려고 한다면, 그 사이에 숨겨진 뇌화부동으로 폭동을 유발하려는 자들의 공작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의 의미가 숨어 있다는 것을 보게 한다. 우리가 섬세하게 모든 것을 다 살펴 내는 것의 기초를 통해서 우리가 주장하는 것을 공감하고 함께 하는 서민들이 되도록 인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삶이 돈으로 채워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있는 한 진정한 인생을 즐길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팽배시키는 것이다. 그런 사회로 몰락한다면 그것은 앞으로 구국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여도 여전히 사회불안과 악성자본의 암적인 사회역기능을 광범위하게 떠안고 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8. 때문에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좌표를 분명히 하고 그런 좌표 선 안에 나타나는 적들의 공작이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살펴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우선의 순위를 어디에 두고자 하는 것일까? 이다. 돈을 꾸러 오신 가난한 자들(하나님)의 손길에 먼저 드리는 것을 의미해야 하는 것임을 우리는 자본의 의미로 생각하자는 말이다. 돈은 있는 자와의 거래로 본다면 채무이행에 가장 신용도가 높은 자는 하나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자들은 하나님께 돈을 꾸어 주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이 확실하게 갚아 주신다고 하는 것의 내용과 그 보다 더 많은 혜택을 주신다고 하는 것의 내용은 성경에 가득하게 약속하고 있다. 성경에 가득한 내용을 믿고 살아야 하는 기독인들이 오히려 성경을 불신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은 없지만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는 말은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9.살기 좋은 세상을 가려면 낙타같이 쌓아 둔 모든 보물을 이웃을 구제하는데 총력하는 부자가 되어 그 가진 재테크로 항상 새로운 부요를 창출하는 기회와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보상받으라는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요는 확산을 목표로 해야 한다. 축적을 목표로 하는 자들은 결과적으로 망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이다. 이런 재테크 특히 장구한 재물의 의미적인 것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산다. 다만 통속적인 생각, 곧 재물은 축적되어야 제맛이라고 하는 것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재테크의 창조적인 아이템이나, 그런 기회를 갖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발생된 논리라고 보는 것이다. 장구한 재물이라는 것은 순환이다. 부요를 확산시키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런 직분을 주신다는 것인데, 이름하여 부요확산의 직분이다. 그런 직분에게는 재테크의 능력과 기회를 늘 공급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예언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런 것을 보면서도 믿지 않고 사는 세대를 탓해야 하는 것을 기초로 하여 논리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10.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고 본다. 성경을 믿지 않는 자들이 기독교라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그들이 지금 오히려 부동산 붐을 타고 부요를 누리고 있고 그런 가치를 하나님의 주신 축복으로 강변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는 것은 바로 그런데 있는 것이다. 가난한 서민들과의 공정한 경쟁을 통해 부요가 결정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서민들의 고통이 발생하게 하는 주요 원인이다. 때문에 사회적인 구제를 통해 그런 불만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오로지 우리가 보기에는 그런 두 가지를 다 해소하는 길에는 북한주민을 돌아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본다. 자본주의(천민자본주의의 잘못을 자본주의의 탓으로 여기고)를 원망하는 자들은 북한주민이 당하는 처절한 고통 속에서 현재를 감사하게 되고, 아울러 공동의 敵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북한주민을 돌아봐야 하고 그런 사랑은 곧 우리 사회의 낙오된 이웃을 사채의 노예 된 이웃을 건져 내는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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