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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여리고성은 무너진다. 북한주민을 해방하라고 외치자.
REPUBLIC OF KOREA 구국기도 0 261 2007-10-16 16:48:58
1. [악을 행하기를 꾀하는 자를 일컬어 사특한 자라 하느니라.] 악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국가마다 다르고 각 종교마다 다르다. 각 사람의 주관적으로 보는 악의 개념은 懸隔(현격)한 차이를 가지게 한다. 선하다 악하다는 개념을 하나님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눈에 보기에 따라서 선과 악이 구분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선과 악이 구분이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선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선이시고 그의 반대는 악이 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선과 악의 존재만 있을 뿐인데, 그 안에 선과 같은 악과, 악과 같은 선이라는 구분을 두려는 모양이 있다. 그런 것이 겉으로는 선과 같고 겉으로는 악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런 이중성(二重星)을 포함한 말과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중성을 구분하려는 사람들의 눈빛이 없다면 선한 사람으로 여겨 낭패를 당하게 되고 악한 사람으로 여겨 큰 실수를 하게 된다는 것에 있다. 여기에 양비론(兩非論)이나 양시론(兩是論)이 비빌 언덕을 찾으려고 기웃거리기도 한다.

2. 그것들의 기웃거림은 사람의 각 행동에는 그 속에 수많은 선과 악을 가지고 있을 수가 있기 때문에 담아내려는 그릇으로 써달라고 하는 의도인 것 같다. 이런 것은 수많은 선과 악의 기준선을 가지고 각기 보려는 주관적인 결론을 따라 양시론으로 담아내던지, 양비론으로 담아내던지 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인간의 주관은 참으로 다양한 눈빛 的(적)인 개념이 존재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든 그릇에 담기에 너무 벅찬 것이기도 하다. 이런 수많은 눈빛에서 인생은 航海(항해)하고 있고 이런 것들 속에서 하나로 묶는 헌법적인 공동의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이 성경을 인간에게 주신 것은 한마음과 한 뜻으로 하나님의 의지를 구현함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보는 인간의 수많은 주관적 견해는 결코 하나를 이뤄야 하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 排斥(배척)하려고 한다. 그런 눈빛을 갖게 하는 것의 차원은 각기 다르고 폭이 다르고 길이가 다르고 넓이가 다르다는 것에서 수많은 시각의 차이의 말들이 나오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주시는 豫言(예언)도 그렇게 보는 자들의 눈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고 주관적으로 해석해서 보려고 하는 것이다.

예언을 받는 자들 그 자체도 바르게 意譯(의역)하지 못하기도 하고 올바른 뜻으로 전달하지도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지는 그 수많은 혼돈인 각기 주관의 견해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는 길로 가게 한다. 이런 혼돈은 각기의 주관에 따른 행동에서 나타나는 반응이 엉켜버린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때문에 하나의 눈빛으로 통일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아날로그를 최소화하고 디지털의 極大化(극대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4. 디지털의 극대화는 결국 한 목소리, 한 뜻, 한 생각, 한 마음, 한 행동으로 이뤄지게 한다. 여기에는 하나님 안에서라는 하나의 큰 공간에 담겨지는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지게 하는 디지털의 공유적인 공동선의 구현적인 행동이 각기 역할적인 기능적인 또는 각 지체적인 반응으로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공동善(선)의 의미는 그런 데 있다고 본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선의 의미는 악마와의 대적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악마적인 행동은 무엇인가? 그것의 뿌리는 자기 사랑의 극대화요, 다른 말로는 이기심의 澎湃(팽배)라고 하는 것이다.

5. 그런 이기심의 팽배는 결국 힘을 통해서 발현되고 구현되고 펼쳐진다. 욕심의 달성을 이루는 큰 힘을 갖는 자들일수록 결국은 이기심을 달성하고 마침내 搾取(착취)하는 죄악을 서슴없이 짓게 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공산수령 세습독재와 같은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압제하여 얻어지는 것으로 자기들의 유익을 삼는 것이 바로 그런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산수령 세습독재의 의도는 개인의 이기심의 극대화와 충족에 있다. 이기심의 극대화는 모든 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선을 공유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모든 자들의 것을 착취하여 개인의 充足(충족)에 두고 있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은 언제든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선을 모든 피조물과 공유하시고 인간과도 공유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기심이 全無(전무)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모든 피조물을 위해 자기를 주시나 그 가지신 분량은 다함이 없으시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두를 위해 자신을 쏟아 부어 주시나 하나님의 충만을 유지 및 발생 및 확대하시는 것으로 성경에 啓示(계시)하고 있다. 그 좋은 예가 곧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福(복) 있다고 하는 것에 있다.

6. 그런 이치를 따라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다 주셨다. 그분의 살과 피를 남김없이 인간들을 위해 공급해 주신 것이다. 하지만 復活(부활)하셨고 그의 살과 피를 영원히 떡을 떼는 것처럼 떼어 인간에게 구원의 양식으로 주어도 주어도 주어도 영원히 다함이 없고 전혀 부족함이 없는 부활의 능력의 根源(근원)이 되신 것이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이런 것은 언제든지 이분적인 思考方式(사고방식)으로 구사하여 억지 쓰듯이 담아내면 안 된다고 본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은 기본적이고 참된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라고 하는 것의 그릇에 억지로 담아내려는 것은 문제가 크다고 본다. 물을 담는 컵의 모양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인가를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는 것 같으나 안 주는 사람, 안 주는 것 같으나 주는 사람들이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해도 결과적인 행동으로 순종이냐 불순종이냐를 구분하는 것과 같이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얼마나 순종했느냐의 차이를 가지고 본다면 수많은 레벨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사람이 하나님의 선을 공유하는 측면과 인간의 주관적 선을 가진 측면의 행동이 나오게 되는데,

7. 그런 것을 多樣性(다양성)의 선으로 표현하기는 그렇다고 본다. 하나님의 것과 인간의 것의 혼합된 상태를 성경에서는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斷罪(단죄)한다. 주는 자가 되는가? 받는 자가 되는가라는 행동에만 두면 문제가 또 생긴다. 사랑으로 주는 자인가? 사랑으로 받는 자인가라고 물어 보아야 한다. 사랑으로 주고받는 자라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다. 여기서 사랑은 또다른 구별을 해야 한다. 인간의 利他(이타) 愛(애)적인 행동인가?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이타애인가로 또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타애로 주고받는 사랑을 서로 사랑이라고 하고,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공동선을 기초로 하여 利他的(이타적)인 중심을 다해 주고받는 것이고 그런 것으로 利己心(이기심)의 충족을 위해 사용치 않는다는 것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공산수령 세습독재와 親(친)한 자들은 서로가 서로의 극한 이기심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기로 협약을 하고 그것을 통해서 각기의 이기심을 충족하는 거래가 형성이 되는 것에 있다. 그런 것이 10.4선언문이고, 이것은 자유를 위한 선언이 아니라 공산수령 세습독재의 이익을 위한 선언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골자라고 하는데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8. 극한 이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것을 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福(복)이 있다는 것으로 담아내는 일은 부적절한 것이고, 不一致(불일치)한 表現(표현)이라고 본다. 아마도 많은 기독인들이 이번에 노씨가 김씨에게 많은 것을 주기로 한 것에, 그런 식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예수님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福(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문제가 크다고 본다. 이는 악마에게 주어도 복이 된다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탈레반에게 준 돈 1,000만 달러가 오히려 무기를 사는 돈이 되어 우리 자유세력의 큰 禍根(화근)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것의 결국은 복이 아니라 화라고 하는 것이다. 때문에 북한 김정일에게 퍼다 줄수록 남한에 대한 위험이 되는 것이고, 자유세계에 대한 커다란 위협이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에 있다. 이런 것은 공산수령 세습독재의 팽창을 가져올 뿐이지 자유의 확산을 무너지게 하고 오히려 자유 그 자체까지도 망하게 한다는 것에 큰 문제가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기독인들이 교회당에 앉아 마음껏 하나님을 섬기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하나님이 先烈(선열)들을 통해 지켜주신 소중한 자유이다.

9. 그 자유를 그런 식으로 모욕하는 것은 결국 남한 赤化(적화)로 이어지게 한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그런 것을 罪惡視(죄악시)해야 하는 것이 기독인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하든지 분명한 입장 정리를 해야 한다고 본다. 각 교회마다 자기들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본다. 이는 세상 정치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논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자유를, 신앙을 지키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자는 말이다. 하나님께 기도만 한다고 집에 불이 붙은 것이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아는 자들이 아닌가?

불을 끄면서도 얼마든지 기도할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기 가진 하나님의 공동선을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自由(자유)를 지키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 것을 보면서 우리는 주기도문에 있는 예수님의 기도문을 헛되게 暗誦(암송)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뤄지기를 기도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 인간 속으로 들어가는 기름부음을 예수이름으로 행사하고 계신다.

10. 그런 사랑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 사랑을 따라 이타적인 자살도 마다하지 않고 이웃을 위해 죽는 희생의 제물로 드려지는 세상을 열어야 한다는 내용이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하지 않고 그런 일까지 하나님이 하시도록 기도하는 자들이 있다. 참으로 악한 짓이라고 본다. 악한 자의 죄를 묵인하는 것은 共犯(공범)亞流(아류)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분명하게 외쳐야 한다. 북한주민을 그 참혹한 독재, 곧 공산수령 세습독재에서 벗어나게 하는 개혁의 개자도 펼치지 못한 노무현식의 퍼주기 정책을 그쳐야 한다고.

그런 퍼주기는 오히려 북한주민을 더 큰 고통 속으로 압제의 가속을 하는 김정일 체제유지의 견고한 힘으로 가게 된다고 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악한 결정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에 충분한데, 오히려 일부 교회들의 침묵은 하나님의 더욱 큰 진노를 살 것으로 보여 진다. 오히려 노무현의 행동을 성경적으로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고 하는 것에 담아내는 거짓 선지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짓은 하나님을 경악하게 하고 진노에 진노를 더 하게 할 것으로 사료된다. 이제 우리는 이타적 사랑의 발로의 의미와 이기심의 극대화를 통한 착취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11. 강도만난 이웃의 고통을 돌아보는 이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고 본다. 우리의 이웃은 강도만난 자들이고 그들은 60년 동안 처참하게 혹독하게 짓이겨져 있다. 저들의 해방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자유세계에서 시장자본주의 下(하)에서 생존 그 자체도 어렵게 될 수밖에 없는 기반 그 자체도 없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인식을 한 자들이 통일비용을 산출하고 통일을 반대하는 것과 오히려 현재처럼 퍼주는 퍼주기를 정당화 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분명하게 반대를 표하자. 돈보다 소중한 자유를 위해 북한 주민의 인권과 해방에 힘을 쏟아 그들을 살리는 퍼주기는 복을 받을 행동임을 직시하자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여러 가지 말장난으로 담아내어 혼돈케 하는 사악한 논리들을 邪慝(사특)하다고 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성경책 그 자체에서 스스로 용어를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려고 한다. 오로지 거짓 선지자들, 특히 김정일 공산수령 세습독재자들을 추종하고 美化(미화)하는 목사들, 신학자들, 철학자들이 만들어 낸 논리를 따라 성경을 이해하려는 짓이나 시키려는 짓을 이제 그만 그쳐야 한다고 본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성경의 절대성을 이용하여 군중을 미혹하고 선전선동을 하려는 것에 있다. 바로 그런 것에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직시하고 강력 대처해야 한다.

12. [악을 행하기를 꾀하는 자를 일컬어 사특한 자라 하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은 악의 의미와 그 행동 이전의 심리와 도모와 공모를 아울러 사특한 자라고 하는 정의를 내리고 있음을 보게 한다. 악을 행하는데 곧 이기심으로 착취하고 사는 김정일 공산수령 세습독재를 미화하는데 필요한 것의 방법론적인 연구를 통해 그런 일을 이끌어 내는 자들이 바로 사특하다는 말이다. 이런 말은 곧 종교 사기꾼이라는 말로 해석함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들이 만들어 낸 말들 속에서 오늘날의 10.4선언이 나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본다.

聖職者가 통일부장관에 앉아 일한다고 하는 것에 문제를 걸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신학 사상이나 주관적인 견해가 마치도 하나님의 보시는 작가적 시점과 일치한 것처럼 여기게 하는 것의 사특함을 지탄하자는 말이다. 그는 김정일의 주체神교의 선지자가 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이타적 사랑, 아가페의 선지자는 될 수 없다는 것을 특히 강조하자는 것이다. 이제 부지런히 일어나 외쳐야 한다. 이 나라를 미혹하게 하는 저 거짓 선지자들의 蠱惑(고혹)한 목소리 평화통일이라고 하는 것에 속지 말자고 특히 강조하자.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북한주민을 돌아보자고 우리 한 마음으로 한 목소리 되어 소리 높여 외치자. 김정일의 여리고성은 하나님의 손길에 무너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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