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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사랑에 눈먼자들이 국가 운전대를 잡고 있다면...
REPUBLIC OF KOREA 구국기도 0 270 2007-10-26 15:02:20
1. [너는 행악자의 得意(득의)함을 인하여 忿(분)을 품지 말며 惡人(악인)의 亨通(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세상이 堪當(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자기 통제가 가능한 사람일 것이다. 이는 衝突(충돌)을 모르는 사람으로 난코스를 운전을 아주 부드럽게 하는 자기 統制(통제)가 가능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대체적으로 자기 통제가 가능한 사람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것은 언제든지 그를 통제하는 知的(지적)인 수준을 의미한다고 하는 것이 현대교육의 이론이다. 知性人(지성인)이 자기를 통제를 잘 할 수 있다는 이론은 오래되었다.

플라톤은 자유로운 陶冶(도야)의 공동체로써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아레테(德(덕))가 높이 평가 되어졌으며, 피타고라스의 비오스가 회상되었고 교수와 학습의 공동체가 생황공동체의 모습으로 실현된다고 역설한다. 인간의 정신의 생산적 힘을 제시하여 주는 교수의 기적, 회상과 의식의 심화 그리고 학습의 기적을 다루는 내용이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이 理性(이성) 또는 知性(지성)의 인도 아래 있으면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여러 꼴들을 하나의 통일된 전체적인 질서 안에서 自我(자아) 陶冶(도야)를 실현할 수 있다고 역설하는 내용들이다.

2. 인간은 교육하기에 가장 바람직한 상태에 있으며, 교육하기에 따라서 인간의 아레테는 實現(실현)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 같다. 아레테는 인간의 德(덕)을 의미하는 헬라어이다. 인간을 도야하는 교육을 통해서 인간은 덕이 있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역설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은 사랑의 힘에 예속된다는 것을 외면한 이런 사상이 그 시대를 휘어잡게 된다. 그는 절제, 용기, 지혜, 정의를 지속적으로 생각함과 교육함과 훈련함과 노력함으로 아레테에 도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생각하게 하는 훈련기법과 교육하는 능력과 그 기법과 훈련함과 지속적으로 도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하였다. 이런 것을 토대로 전인적인 아레테를 목표하게 된다. 그것은 곧 공동체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 그런 논리는 인간 속에 있는 여러 사랑의 의미를 無色(무색)하게 한다. 그런 사랑을 억제하는 것이 이성 혹은 지성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목표를 달성하려면 인간이 인간을 도야하는 과정을 통과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서 인간은 인간을 통제하여 德(덕)을 만들거나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

3. 이런 것은 인간의 여러 노력으로 인간 내면 통제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하는 것에 있다. 이들의 주장은 인간의 이성 또는 지성이 自我(자아)를 통제하고 통제된 자아(陶冶(도야))가 국가를 통제 또는 일원이 되어 공동의 목표인 아레테로 향해 가게 한다고 하는 말을 한다. 아레테라는 덕을 국가 공동의 목표로 삼아 가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아레테라는 말은 마음이 올바르고 人道(인도)에 합당한 일, 또 그로 말미암아 생기는 힘이라는 뜻으로 풀 수가 있다고 한다. 이런 것을 [국가가 큰 규모의 인간이라면, 인간은 작은 규모의 국가라고 하였고,

인간과 국가는 동본원적이고 동구조적라고 하였다] 공동의 목표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큰 덕을 위해 같은 동질의 작은 덕들이 더불어 모아져서 구성원이 되어 마침내 하나의 큰 덕이 된다는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덕의 의미를 또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인간의 모든 다스리는 법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레테의 중국식의 의미는 중국인들에게서 덕은 마음이 올바르고 인도(仁道)에 합당한 일, 또 그로 말미암아 생기는 힘으로 보았다고 한다.

4. 덕(德)이라는 글자는 원래 변(邊)이 없고, 방(傍)은 직(直)과 심(心)의 합성 글자라고 한다. 또한 덕이라고 하는 발음은 득(得)과 통한다고 여겼다. 즉, 곧을直(직) 마음心(심), 내 몸에 도야적인 고생을 통해 획득한 것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 덕을 가지면 倫理學(윤리학)적으로는 올바른 행위를 하게 되고 정치적으로는 형벌과 반대되는, 백성에 대한 은혜와 포상(褒賞)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孔子(공자)는 위정자가 스스로 바르게 섬으로써 백성을 감화시킨다고 하는 德治主義(덕치주의)를 제창했다. 道家(도가)계열에서는 윤리적인 가치관을 포함하지 않은 본유적 능력이나 속성을 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유럽의 덕은 그리스어의 아레테(arete), 라틴어의 비르투스(virtus;프랑스어의 vertu, 영어의 virtue는 여기서 파생), 독일어의 투겐트(Tugend) 등인데 모두 근원적인 뜻이 있다. 먼저, 아레테는 호메로스 등의 옛 시대에는 각 사물이 지닌 우수한 기능을 뜻하였다고 한다. 독일어의 투겐트(taugen)는 ‘기여한다’라고 하는 말에서 유래하며, 어떤 사물이나 인물이 소유하는 유능함, 탁월한 점을 뜻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덕은 본디 자연적 능력의 우수성을 뜻하고 있었으나, 이것이 윤리덕(倫理德)으로서 명확하게 체계화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친다.

5. ‘이웃과 국가 공동체에 기여한다’가 덕이 된 것은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사색을 거친 후,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덕을 헥시스(hexis)로 규정하였다. 헥시스란, 인간이 후천적으로 획득한 일정한 행위능력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인간의 노력으로 자기 통제가 가능하다는 논리가 나오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는 생래적으로 몸에 지닌 본성적인 덕, 또는 선에 대한 好意的(호의적) 태도가 있지만 이것은 情緖的(정서적)인 것으로서 확고한 기초는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이것들은 인간의 지성이 사랑의 힘에 예속된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고, 오히려 제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고, 인간의 본질의 여러 본능을 억제할 수 있는 기법을 찾는 데만 주력한 면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 속에 태생적으로 가지고 나온 이러한 소질을 이성 또는 지성적 선택에 따라 자각적 행위로 反復(반복)함으로써, 부동의 행위능력으로 형성되었을 때 본래의 뜻으로서의 덕이 생긴다고 주장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한국의 아레테는 곧 덕은 한국유학사에서 덕 槪念(개념)의 변천은 중국유학에서의 변천 양상과 비슷하다.

6. 특히 性理學(성리학)이 수입되기 이전에는, 군주의 덕을 주장하였다. 군주가 자기를 다스려야 백성을 올바로 다스리고 그것이 덕이 된다는 이론이라고 한다. 그것이 곧 덕치주의이고, 성리학 전래 후에 조선시대 성리학은 심(心)·성(性)·정(情)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여러 논변을 전개하였으나, 덕이나 명덕(明德)의 개념 자체에 대해서는 중국 성리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실학파에 이르러 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함께 명덕의 개념을 재정립하려는 시도가 생겨났다고 한다.

특히 정약용(丁若鏞)은 명덕에 대한 성리학적 해석을 부정하고 명덕은 효(孝)·제(悌)·자(慈)라고 정의하였으며, 선진유학(先進儒學)의 실천성을 중시하여 명덕을 실천과 독립된 실체로 보는 견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정통 성리학을 계승한 입장에서는 여전히 명덕을 인간의 보편적 실체로 보는 입장을 견지하였는데, 조선 후기로 오면서 그 개념을 더욱 명백히 하려는 시도가 일어났으나 자아를 수신하는 한계적 상황이 천차만별을 겪게 된다. 특히 마음과 명덕을 형이하(形而下)와 형이상(形而上)으로 분별하여 논리적 이론을 전개하였으나.

7. 결론은 왕의 덕치주의와 자아의 도야적인 修身齊家(수신제가)와 자아절제에 대한 노력에 치중하게 된다. 이런 내용들을 살펴보면 모두가 다 인간의 마음 곧 생각을 성격을 다스리는 것에 그 목표를 두고 있다고 본다. 과연 인간은 자기의 본능적인 것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고, 그 통제가 지극히 높은 德((덕),이웃 사랑)의 의미에 도달할 수가 있는가이다. 때문에 오늘날의 한국의 교육의 덕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産業化(산업화)가 되고 먹고 사는 문제가 결합된 학문의 의미가 결국 入試(입시)를 위한 교육으로 전락된 지도 오래되었다.

그런 교육은 도야적 차원이 아니라 망국적 차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인간 자신을 통제하는 힘을 기르는 방법을 공부하는 것이 교육인데, 그런 교육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다. 다만 본능을 위해 사는 자들로 만들어 가고 있다. 거기에는 이웃은 존재되지 않는다. 있다면 憎惡(증오)의 대상일 뿐이다. 善意(선의)의 경쟁력이 아닌 증오의 경쟁력으로 파괴된 교육은 이미 벌써 진행되었다. 거기에 인간은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하는 것에 의미를 다루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곧 많은 지성이나 훈련된 이성이라도 사랑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간과한다.

8. 또 그것 곧 이성은 사랑을 극복할 수 없다고 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울러 忌避(기피)하게 한다. 어차피 인간은 사랑이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존재이다. 이성 또는 지성만을 가지고는 사랑을 統制(통제)하기가 쉽지 않다고 본다. 때문에 인간은 사랑을 주인으로 모시는 종으로 산다고 봐야 한다. 사랑의 奴隸(노예)라는 말이다. 과연 이성 또는 지성을 통제해서 이웃을 드높이 섬겨낼 수가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인간을 섬기는 능력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자는 말이다.

때문에 고도로 높은 도야적인 능력을 가진 자들 외에는 타인에게 덕을 끼칠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된다고 하여도 全人的(전인적)인 것이어야 하기에 부족한 부문에서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그런 모든 부족함을 극복하고 전인적으로 공동체를 섬기는 공동의 이익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것이 곧 통제의 美學(미학)이라고 하는 국제경쟁력의 의미가 존재한다. 과연 우리 한국인의 교육은 무엇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고 보는가이다. 인간을 국제경쟁력을 갖도록 통제하는 능력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한다.

9. 이성 또는 지성이 사랑을 통제할 수가 없다면 그 사랑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소위말해서 김정일의 주구들이 스톡홀름 러브에 빠져서 사랑의 흥분을 가지고 김정일을 돕는다면 국가를 사랑해야 한다는 이성 또는 지성을 무너지게 한다는 것에 있다. 이런 사랑의 의미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힘에 있다고 본다. 사랑은 사랑만이 制壓(제압)한다는 것이 그 원리이다. 사랑만이 사랑을 제압한다는 말은 사랑은 보다 더 큰 사랑에 의해 제압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사랑을 어떻게 발생시킬 것인가를 두고 생각하는 것이다.

김정일은 악마이다. 그런 악마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마의 짓거리이다. 하지만 그 악마를 사랑하는 자들이 한국에 있다. 특히 권력의 핵심에 있다면, 그들이 결사옹위를 외치면서 김정일을 神(신)으로 떠받든다면, 理性(이성)통제나 知性(지성)통제는 사실상 물건너간 것이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 말미암는 이성 및 지성통제가 불가능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일에 대한 스톡홀름 러브가 대한민국을 증오하게 하는 것을 만들어 낸다. 동시에 김정일을 사랑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김정일을 사랑하면 할수록 대한민국을 증오하게 되고 그런 사랑이 확산이 될수록 대한민국을 증오하는 자들이 수가 늘어나게 된다. 여기에 분명한 對處(대처)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10. 이런 사랑은 이성 또는 지성으로 통제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사랑은 사랑으로 제압해야 한다. 대한민국을 사랑하게 하는 힘을 키우는 것인데, 무슨 수로 키울 수 있는가를 提示(제시)해야 한다. 잠자는 애국심을 호소한다고 가능하다면 이성 또는 지성이 사랑을 일으킬 수 있다는 논리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성 또는 지성이나 그런 것이 사랑을 일으킬 수가 없다는 것은 現象學的(현상학적)인 내용에서 쉽게 발견하게 된다. 사랑은 그것을 포함하는 영역의 밖에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국민의 애국심을 일으키려는 정부의 노력이 없는 현실을 개탄하는 것으로 恨(한)을 품게 된다. 그들이 김정일을 사랑하는 자들 속에서 포위되어 있다고 假想(가상)한다면 이해될 수 있는 현실이기에 애국자들은 막막한 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국가기관의 사보타지를 반역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국민저항권적으로 몰아붙여 극복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 나름대로 疊疊山中(첩첩산중)에 있다. 사랑은 불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이나 지성은 결국 자기 속에서 왕 노릇하는 사랑의 종일뿐이라고 하는 것을. 때문에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11. 하나님께 구국기도하자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 구원의 출구를 삼자고 소리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북한주민을 보는 오늘날의 이성 또는 지성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의 고통이라고 외면하게 한다. 하지만 북한주민의 혹독한 고통이 곧 자기들의 가족에게 사랑의 대상에게 밀어닥칠 것으로 본다면 입장은 다르게 되는데, 거기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위한 여러 노력과 수를 찾는 것이 대응논리의 分散(분산)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평화통일론이 힘을 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

분산논리가 가지는 바로 그런 사랑을 밑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臨時變通(임시변통)이 될 수는 있으나 後遺症(후유증)은 아주 심각하다. 김정일 그가 힘을 얻어 마침내 남한을 赤化(적화)하게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힘을 하나님께 받는 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매우 강력한 사랑이기에 다른 사랑을 제압하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힘은 결국은 인간을 통제하고 마침내 북한주민을 위해 희생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 힘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은 우리 곁에 함께 하신다.

12. 누구든지 사랑으로 북한주민을 보게 되면 그들을 慘酷(참혹)함에서 건지고자 하는 사랑의 명령을 듣게 된다. 사랑의 명령을 따라 사랑을 하고자 하나님께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된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無限(무한)한 분량을 공급하시는 길이 열리게 된다. 하여 마침내 사랑은 사랑을 낳게 된다. 대한민국은 각기 小我(소아)적 사랑에 이끌리는 지성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타적 사랑에 이끌리는 지성인들을 갖게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 길에서 북한주민을 해방하는 길이 보이고, 거기서 이 나라의 위기를 건져내는 길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를 하나님의 성령이 주는 사랑의 통제라고 한다.

이타적 사랑의 統制(통제) 美學(미학)을 우리는 깊이 있게 생각할 때라고 본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통제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최고의 지혜자인 동시에 아울러 최고의 사랑의 본질의 소유자이시다. 이분이 예수 이름으로 주시는 성령의 내적 통제를 받게 된다면 가장 이상적인 사랑의 통제를 받는 사랑의 종이 되고, 아울러 지혜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랑을 공급받는 자들과 그런 사랑을 공급하는 길을 여는 자들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랑을 투여할 대상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먼저 그 이타적인 사랑을 가지고 북한주민의 그 참혹한 고통을 돌아보는 길에 대한민국이 사는 길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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