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삶은 어디에 (제19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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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현실문학(http://www.alonk.com/) 장편소설 삶은 어디에 (제19회) 2. 비 극 열 차. 다음날, 낮 열 두시 십 분. 평양발 혜산행 제9열차는 긴 기적 소리를 내지르며 ㄱ시역 홈에 들어섰다. 맨 앞 화물칸과 침대 그 다음 상급차 바곤을 제외한 나머지 열개의 유리 한 장 제대로 없는 차 바곤마다 사람들로 인산 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니 산이나 바다라기보다는 완전 콩나물 시루다. 어디 할 것 없이 차 바곤엔 한 치의 공간도 없이 사람들로 꽈악 채워졌다. 승강대 계단까지. 심지어 차체 밑 바퀴 돌아가는 앞에 나무로 궤짝처럼 만들어 매달아 놓은 그 안에까지 새우등처럼 꼬부리고 들어가 처박혀 있는 사람까지 있다. 그게 사람 타고 가라고 만든 것이 아니고 예비 부품 같은 것을 넣기 위해 만들어 단 것은 분명했지만 뚜껑까지 뜯어버리고 척 들어 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부럽게까지 보인다. 그렇게라도 열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지금 이 판에서는 난 사람인것이다. 드넓은 홈에는 발 들여놓을 자리가 비좁을 정도로 사람 천지였다. 열차가 멎자 와, 하고 사람물결은 맹렬한 기세로 바곤마다 달라붙었다. 그들이 목표 삼고 매달리는 것은 열차 창문이다. 승강대로 오른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등에 고기짐을 진 아낙네들이 손에 담배 아니면 술병 같은 것을 들고 유리 없는 창문 앞에 서서 안에 타고 있는 사람에게 좀 받아 달라고 사정을 거듭한다. 아낙들이 던져 넣은 담배들이 우박처럼 창문 안으로 날아갔다. 먹은 소. 똥 눈다고 담배곽을 주머니에 쑤셔넣은 이상 올려주지 않을 수는 없다. 이제는 하도 익숙한 창문 넘기여서 안의 사람이 손만 잡아 웬만한 힘만 빌려주면 아낙들은 배낭을 진채로 휭휭 날아 들어간다. 들어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제 몸 세울 곳은 생긴다. 108명 정원의 열차 바곤(객차)이지만 그 10배 20배까지도 사람이 탈 수는 있는 것이다. 변소, 화구실, 세면장은 물론 의자등받이 위에까지 사람이 걸터앉고 심지어 짐 올려놓는 선반에도 체통 작은 사람과 아이들이 두 눈을 디룩거리며 올라앉아 있다. ㄱ시 역에서의 열차 정차시간은 10분이었지만 오르지 못한 사람들의 성화로 보통 30분 이상 지체해서야 겨우 출발할 수 있었다. 오늘은 어제 하루 9열차 운행이 중지된 탓에 그런지 사람의 머리 수가 평일보다 1.5배 정도는 더 증가한 듯 싶다. 문기와 마윤, 그리고 길재는 사람들 뒤에 서서 아우성치는 그들의 열띤 얼굴들을 얼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특히 문기는 지금 눈앞에 펄쳐진 풍경이 꿈인 듯 싶었다. 뭐 혜산쪽에 친척이 없기도 하거니와 공무로서도 이 9열차를 타 본 일이 없었던 문기여서 그 놀라움은 한층 더했다. 비로소 어제 오전에 찾아 왔던 한미숙이라는 여자가 열차 타기가 보통 힘들지 않을거라고 하던 말이 새삼 생각났다. 하지만 짐을 진 아낙들도 어떻게든 잡아타는 판에 빈 몸인 자기가 설마 타지 못할까 하는 뱃심이 생겼다. 셋은 오늘 아침 김행우의 헌 담요에 싼 시신을 뒷산 공동 묘지에 안장해 주었다. 지금껏 그 집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송영숙에게 미음도 먹여주고 자기들도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의미로 술 몇 병 사다놓고 마시다가 나온 길이다. 길재는 원래 ㅎ시에 갈 생각이 없었으나 짝패 마윤이가 가는 바람에 이럴바엔 함께 가보자며 따라나섰다. 무엇을 넣었는지 불룩한 배낭을 두개씩이나 들었다. 열차 이음짬에 발을 넣고 사람들이 지붕위로 오르는 것을 본 길재가 문기의 옆구리를 툭 지르며 우리도 어서 오르자고 한다. 정말 눈썰미 없이 멍하니 서서 지체하다간 열차를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문기는 그렇게 하자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윤과 길재가 배낭을 들어 양 어깨에 메고 발길을 떼려는데 아저씨 하고 부르며 한 여인이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 ??" 셋은 경악하다시피 깜짝 놀란 모습으로 그 여인을 쳐다보았다. "아주머니가 웬일이요?" 여인은 송영숙이다. "나도 가야해요. 이걸 ㅎ시에 가서 팔지 못하면 우리 식구 모두 굶어 죽어요." "그게 뭔데요?" 길재가 눈을 휘등그레 뜨고 물었으나 송영숙은 곧장 대답을 못하고 쭈뼜거렸다. 배가 뚱뚱해 지도록 무엇인가 띠고 서있는 여인을 보고 문기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마윤과 길재는 벌써 알만 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어서 오르자고 재촉했다. 금방 남편을 묻고 기운을 차리지 못하던 여인, 오죽 했으면 이렇게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애들만 집에 남겨놓고 뛰쳐나왔을까. 그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무정한 세월이다. 문기나 길재 마윤이 왜 여인의 그 마음을 모르겠는가. 셋은 서로 도와가며 무사히 열차 지붕 위에 올라탔다. 빗물이 흘러내릴 수 있게 만든 둥그런 지붕 위였지만 그런대로 앉아 갈만 했다. 지붕 위도 빈틈 없이 벌써 사람들로 빼곡이 들어찼 다. 지붕 가녘으로 열차 안과 통하는 공기통 덮개인 듯한 등그런 턱이 줄을 맞춰 있을 뿐 바닥은 빤빤했다. 손에 잡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보면 안전 같은 것은 하늘이나 운수에 맡길 수밖에 없다. 문기는 당황스럽고 불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겉으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체했다. 이제 열차가 출발하면 그 진동에 의하거나 굽인돌이 커브 길을 돌아 갈때 미끌어 떨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까. 더욱이 등골 섬뜩하게 만드는 것은 머리위로 지나 간 시커먼 고압 전깃줄이다. 새끼 손가락 굵기 비슷한 전선은 아랫부분만 누렇게 제 빛 같이 보일 뿐 온통 시커멓다. 지붕 면과 줄 사이 거리는 사람이 앉은키와 거의 비슷하다. 거기에 이만 볼트의 전류가 흐른다. 혹시 일어설 때 자칫 잘못 하거나 전선 존재를 잠깐이라도 잊는 경우엔 그 선에 머리가 닿을 수 있다. 그런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실수하여 시커면 숯이 되어 사망한 사람만도 부지기수였다. 교통 수단이라고는 열차밖에 없는, 그 열차도 수가 적어 한 번 운행에 소똥 무더기에에 파리 달라붙듯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타지 말아야 할 곳까지 덕지덕지 붙었으니 사고가 어찌 잇따르지 않으랴. 하지만 이 9열차는 ㄱ시 주민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생명선이기도 했다. 이들이 이런 방법으로 고기짐과 쌀을 바꾸어 날라오지 않으면 시내 사람들은 절해고도에 갇힌 사람들과 똑 같은 신세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휘발유가 없어 자동차 운행은 ㅎ시까지 생각도 못하는 일이고 보면 참으로 이 9열차는 어떤 일이 있어도 운행을 정지시키지 말아야 할 생명선인 것이다. "뿡-" 열차가 긴 기적소리를 내질렀다. "음. 떠나려는가 보군." 문기는 저도 모르게 긴장되어 자리를 고쳐 앉는다. "어이구 아직 멀었소. 떠나지 못해 몸살 앓는 소리지. 저것 보우. 저 판에 떠나기는 어딜 떠나겠소?" 마윤이 차 바곤 아래를 가리키며 지껄였다. 문기도 그 쪽을 내려 다 보았다. 승강대마다 오르지 못한 사람들이 몰려서서 아우성이다. 그리고 창문 안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제발 올려 달라고 사정사정 하는 아낙네들이 안타깝게 발을 구르는 소리가 귀 아프게 들려왔다. 어떤 아낙은 눈물이 글썽해가지고 "전 가야 해요. 벌써 3일째 기차를 타지 못해 못 갔어요. 아저씨. 내 올라가면 한 턱 단단히 내겠으니 좀 받아줘요? 네." 하며 배낭을 올리밀고 있었다. 문기네는 흥미가 있는 듯 그 쪽을 내려다보았다. 유리가 없는 창 문안에서 석줄배기(상병) 군인 하나가 떡 버티고 서서 "그래 뭘 주갔시오?" 하며 얄궂은 웃음을 흘리며 능글거리고 있었다. "군대 아저씨 걱정 말아요. 담배면 담배, 술이면 술, 자 빨리요." 서로 서로 손을 내미는 여자들 속에서 그 중 반반해 보이는 여자들의 손만 골라 그 군인이라는 작자는 짐을 받아 주고 손을 잡아 끌어 올린다. 나이든 아낙네들은 얼굴에 땀을 뚝뚝 떨구며 그 모양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며 욕을 퍼붓는다. "어이 군대! 내 아들도 군대처럼 석줄이야. 빨리 나부터 좀 잡아 달라구." 그러나 그 말이 그 군인에겐 마이동풍이다. 물에 빠진 년처럼 안타깝게 허우적거려 보아야 잡아주기는커녕 본 척도 안한다. "이건 정말. 나이가 웬쑤다. 주름쌀 가진 년은 기차도 못타겠네. 야. 내게도 장백삼(중국산 담배이름)이 있다. 녀석. 그래도 안 잡아 주겠냐." 그러자 그 군인이 입을 삐쭉하며 놀려대듯 외쳤다. "오마니요. 저쪽 창문에 가 보라요. 오마니처럼 뚱뚱한 사람 여기 올라설 자리 모자라요." 그러면서 이번에는 가시나 같은 말도 없이 서있는 여자의 손을 손짓해 불러 잡아쥐고 번쩍 끌어 올리다가 창 턱에 몸이 오르자 덥썩 안아 끌어 들였다. "저 새끼 저거 미친 새끼 저 따위가 다 군대라구. 눈 시려 못 보겠다. 젠장." 길재가 격분하여 주먹을 불끈 쥐며 투덜거렸다. 문기는 히죽히죽 웃으며 윗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붙혀 물고 길재와 마을에게도 한대씩 권했다. 담배를 받아 쥐던 길재가 "저거 보오 저거…" 하며 저쪽 창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청년 대 여섯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사람들을 왁 밀쳐 버리고 안 에서 좋아하건 말건 관계없이 후닥닥 그 중 하나가 창턱을 흙발로 짓이기며 들어간다. 뒤에서 올라가는 놈이 엉덩이를 받쳐주니 그 오르는 속도가 순식간이다. "자, 빨리" 오른자가 손을 내밀자 열개 넘은 물고기 배낭이 연속 빨려 들어간다. 그걸 받아 사람이 있건 없건 마구 안쪽에 쥐여 뿌리니 축축히 물기가 배인 배낭이 제 바지 가랑이에 비린내를 묻혀 놓아도 누구하나 찍 소리 한 마디 내지 못했다. 우락부락한 청년 패거리다 보니 반발했다간 된통 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배낭을 안으로 집어넣고 나머지 넷이 연줄연줄 줄넘기하듯 올라간다. 일이 그쯤 되자 또 맴돌이치던 아낙네들이 이 창문으로 와르르 몰려왔다. "아저씨, 나두 좀 올려줘요. 네. 같이 살아야지 안 그래요. 자 빨리. 아, 뭐해요." 제일 먼저 창턱에 다가붙은 해사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이러면서 손을 내 밀자 그중 체격이 우람한 자가 쓱 나서며 "올려주면 정말 같이 살겠소?" 하며 이죽거렸다. 그 여자 또한 걸죽이다. "네 올려만 주면 그건 문제없어요. 아저씨 얼굴 정말 욕심나게 생겼는데 자, 빨리 이 손. 내 올라가면 아저씨 안아줄게." 그러자 그 북새통에서도 와 하고 웃음이 터졌다. "에라. 오늘 또 색시 하나 얻었다." 평안도 내긴듯한 그 청년이 너스레를 떨며 여인이 내민 손을 잡아끌어 올렸다. 그런데 머리가 안으로 들어 왔는데도 여인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고 바등거린다. 등에 진 배낭이 창문 위턱에 걸려 그 모양인 것을 보고 그 청년이 버럭 화를 냈다. "제길 이거, 배낭 벗어 먼저 올려 보내야디, 이런 답답한 여자 어딨어야."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그 여자의 뺨을 꼬집어 버렸다. "아갸. 가만 내 손 꽉 잡아줘요." 하며 여자는 몸을 옆으로 홱 돌리고는 "자 당겨요." 한다. 청년이 어이샤 하며 여자의 배낭 아구리까지 쥐고 와짝 잡아당기자 여인이 이번에는 "앗" 하며 비명을 질렀다. 뒤에서 또 한 여인이 올라가는 여자의 발을 잡고 매달린 것이었다. 청년이 힘주어 당기는 바람에 여자의 몸이 쑥 들어가고 창턱에 다리가 가로 놓이자 요때라고 생각한 바깥에 있던 여자가 그 발목을 틀어잡고 배낭진 몸을 솟구쳤던 것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그러나 아프거나 말거나 뒤의 여자는 사정 두지 않고 마구 헤집고 창턱에 매달려 들어온다. 그 모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문기는 쉽지 않구나. 아내 역시 이런 고역속에서 ㅎ시로 드나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옆에서 길재가 마윤을 보고 지껄였다. "여. 이 마개야." "왜 그래." "내 말 좀 들어봐. 세계 올림픽 경기대회 종목에 아낙네 장애물 극복경기 같은 것은 없을까?" "아니, 이 자식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릴. 야 이놈아 세상에 아낙네 경기가 어디 있어?" "유감이군. 그것만 있으면 문제 없는데." "뭐가?" "일등 말이야." "누가?" "누군 누구야. 저 아주머니들이지. 저 뚱뚱한 고기배낭 지구두 창 턱쯤은 막 날아 넘는게 네 놈 눈엔 안 보여?" "오. 난 또 그러구 보면 정말 그런 경기 있었으면 좋긴 하겠다. 그러면 저 여자들 저런 고생 안해두 될 걸. 그것 참." "고생 안해두 된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놈아. 올림픽 선수권 보유자가 고기배낭 지고 장살 다니겠어?" 둘이 시까스르는 말을 귓결에 흘리며 열차 견인기 쪽을 무심코 내다보던 문기의 눈이 한 곳에서 멈춰섰다. 그 여자를 본 것이다. 한미숙. 앞으로부터 세 번째 차 바곤 상급차 승강대로 방금 오르려고 발을 드는 그 여자. 분명 틀림없었다. 오르려던 한미숙이 뒤에 선 사내가 뭐라고 말하는 듯 다시 발을 홈에 내리운다. 누굴까, 문기의 시선은 다시 여자로부터 그 사내에게로 옮겨졌다. 깡마른 체구의 사내다. 전혀 생소한 느낌이 안 들었다. 문기는 뚫어지게 그 쪽을 직시했다. 뭐라고 얘기하던 사내가 문기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날선 매부리코 우묵 들어간 작은 눈, 얄팍한 입술의 사나이, 한태규다. 문기는 다시 두 눈을 두리번거리며 재삼 확인하듯 뚫어지게 그 쪽을 내려다 보았다. 다섯 번째 차 바곤, 열차 바곤 하나 사이를 두고 내려다 보는 문기의 눈이 한태규의 모습을 오인할 수는 없는 거였다. 분명 한태규다. 그렇다면 한미숙은 어찌하여 한태규와 함께 있는 것인가. 이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오른다. 저 여자는 한태규의 끄나풀인가? 그렇게 까지 점찍을 수는 없어도 한 통속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그들 둘이 상급차 안으로 사라지자 문기의 의심은 더욱 짙어 갔다. 어딘가 모르게 암 여우에게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잘된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김행우의 두 눈을 감기면서 당장 한태규에게 달려가 쳐죽이지 못하는 것을 분하게 여긴 최문기다. 이 9열차를 탄 것으로 보아 그리고 한미숙과 동행한 것으로 보아 한태규도 ㅎ시에 가는 것만은 명백하다. 문기는 이번길에 반드시 ㅎ시에서 한태규를 만나 김행우를 죽게 만든 그 모든 행위를 따져 보리라 생각했다. 아직도 김행우의 절규가 귀에 생생하다. 어쩌면 그렇게까지 사람이 잔혹할 수 있단 말인가. 그를 죽이려고 자전거 사고를 만들어내고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어머니의 부조금까지 중도에서 가로채는 비열한, 최문기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말없이 앉아 있는 송영숙을 돌아 보았다.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는 여인이다. 김행우의 마지막 부탁도 있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김행우 본인의 말이고 이제 한태규를 만나봐야 문제는 사실인가 거짓인가를 확정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행우 같은 순박한 인간이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었지만 문기로서는 섣불리 한 사람의 말만 듣고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는 거였다. 이제 모든 것이 밝혀질 그때 송영숙에게도 '얘기해 주리라' 생각한 문기였다. 한미숙, 그 여자는 좋은 여자 같지는 않다. 이제 아내를 만나면 알게 될 것이다. 문기는 또 다시 견인기 쪽을 바라보았다, 빨리 떠나 ㅎ시에 도착하여 아내를 만나보고 싶었다. "뿡-" 마치 그의 생각을 알아주기라도 한 듯 긴 기적 소리를 내며 덜커덕-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붕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떠나긴 떠나는군…" "아저씨 이 차가 어둡기 전에 ㅎ시에 도착할까요?"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만 안될거우다." "연착 없이 그냥 달리면야 안될 것두 없지. 다섯시간이면 정시 운행이거든." "정시 운행 같은 소릴. 이제부터 열시간 안에 ㅎ시에 닿으면 내 손에 장을 지져라." "빨리 가야 할텐데 벌써부터 배가 고플라니. 젠장." "야, 이 놈아 대가리 전기줄에 닿을라." 별의별 수작질이 다 나오다가 열차가 점점 속력을 가하자 모두 입을 다물어 버린다. 문기는 처음 타보는 차 지붕 위라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참 동안 달리는 대로 몸을 맡겨 보니 매사에 조심하면 안전 같은 것은 별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스쳐가는 바람이다. 온갖 꽃이 피어나는 5월이라지만 아직 쌀쌀한 바닷바람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서 온 몸이 얼어들기 시작했다. "헝님. 비닐막 안가져 왔소?" 마윤이 걱정스레 물었다. "미처 생각 못했어." "그럼 이걸 같이 써요." "아, 괜찮아. 그까짓 바다 기슭만 지나가면 일 없겠지." "형님, 차 굴(터널) 들어갈 때 특별히 조심하우." "왜?" "그땐 이놈의 전기줄이 더 낮아진단 말이요. 차굴이 다가오면 무조건 엎드리우." "알겠어." 아무래도 안 되겠던지 마윤이 길재의 비닐막을 같이 쓰고 제 것은 문기에게 넘겨주었다. 문기는 안 받으려다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송영숙을 보고 비닐막을 들고가 그녀에게 씌여 주었다. "고맙습니다." 아직 슬픔이 가득 어린 여인의 파리한 얼굴엔 미안한 기색이 어린다. "이렇게 다녀보긴 처음이지요?" 문기가 물었다. "네." "뭘 가지구 갑니까?" 송영숙은 시무룩히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문기는 어색해 하는 여인에게 더 묻기가 멋쩍기도 해 묻는 것을 그만 두고 탄식 비슷한 소리를 뱉었다. "모진 세월입니다. 아주머닐 보니 내가 지금껏 너무 편안히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른지. 한계는 모르겠지만 아주머니처럼 강한 분이라면 넘지 못할 것도 없겠죠…" 말하다 말고 문기는 송영숙의 비닐막에 쌓인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의 눈가에서 굵은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금방 남편을 묻고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이 구차한 여로에 나섰을까.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죽고만 싶은 여인의 마음이었다. 자기 혼자라면 능히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딸이 있다. 엄마까지 없다면 그 애들 또한 살아남지 못할 것은 뻔하다. 그러나 여인에겐 이제 더 어찌할 힘이 없었다. 대여섯 키로그램 됨즉한 허리에 찬 동이 결국 그를 이 9열차에 오르게 했다. 한 가닥의 희망, 그것이 아이들을 살리고 엄마 노룻 할 수 있는 계기로 될 수만 있다면 9열차가 아니라 저승사자라도 웃으면서 올라탈 송영숙의 간절한 마음이었다. 이 희망마저 없었다면 여인은 남편의 시신 위에 엎드린 채 영영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송영숙은 무겁게 처지는 짐을 다시 한번 추슬렸다. 처음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동을 찬 배가 압박되어 견디기 힘들었다. 엉덩이와 허리 부위가 피가 통하지 않는 듯 감각마저 없어진다. 좀 풀어놓고 싶었지만 곁눈이 무섭다. 그것은 걸리면 빼앗긴다는, 그렇게 되면 자신뿐이 아닌 두 어린 자식까지 굶겨 죽인다는 자체 공포감에서 오는 공연한 걱정거리였지만 송영숙으로서는 달리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지붕위에 오른 사람 거개가 다 자기처럼 물건을 자기식 방법으로 소지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미리 알고 있었다면 그와 같은 경계심은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긴장하고 조심할 수록 나쁜 것은 없다. 그까짓 육신이 당하는 부담감 같은 것은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다. 그저 무사히 ㅎ시에 도착하여 물건을 제 값 받고 팔고 그 돈으로 쌀을 사 가지고 다시 되돌아 올 수만 있다면 그리고 배고픈 애들에게 한 끼나마 쌀밥을 해먹이고 나머지는 팔아 다시 생선 꿰미라도 사들고 시장 한쪽 구석에 앉아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만약 그 소박한 바램마저 이루지 못하고 도중에서 살붙이처럼 안고가는 이 물건을 빼앗기기라도 한다면? 송영숙은 앞이 아찔했다.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누구도 담보할 수 없는 일이다. 문득 한 달 전 원산 시내 밤거리에서 무자비한 주먹을 맞고 쓰러져버렸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다. 아, 제발 그와 같은 불행은 다시 반복되지 말았으면. 만약 그리 된다면 그것으로 자기와 아이들의 생은 끝날 것이 분명하다. 이것마저 없다면 더는 살아갈 길이 없다. 송영숙은 또 다시 아래로 처지는 동짐을 추켜 올렸다. 그리고는 이를 옥물었다. 죽으면 죽었지, 이것만은 빼앗기지 않으리라고. 세 생명의 명줄이 달린 이것만은 목숨으로 지키리라고 마음 속으로 다짐을 거듭했다. 다음에 계속 http://www.alonk.com/category/?cid=21021100 (전 회의 내용을 보시려면 [북한현실문학](http://www.alonk.com/) 를 방문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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