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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행군 시기를그린 장편소설 <삶은 어디에> (제20회)
REPUBLIC OF KOREA 북한맨 0 326 2007-11-15 02:01:41
(http://www.alonk.com/) 에 연재하는 장편소설입니다.


삶은 어디에 (제20회)

리지명

(지난 회에 이어 계속)

뿡- 열차는 시원하게 펼쳐진 동해안 기슭을 따라 뱀 같은 몸체를 힘겹게 움직이며 긴 기적 소리를 뱉어냈다. 열차라고 왜 힘들지 않으랴. 유리 한장 붙어 있지 않은 헐렁한 몸에 염치없이 다닥다닥 달라 붙은 인간들, 열차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사람 뭉치가 기어가는 듯한 형상이다. 지붕, 창문, 승강계단, 어디라 할 것 없이 엉켜붙은 인간무리. 그들은 열차 견인기의 견인 능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아니 하는 듯 싶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제 살 궁리만 하는 그 무지함에 짓눌려 열차는 울며 흐느끼며 또 다시 붕-하고 신음 같은 소리를 내지른다. 덜커덕, 덜컥. 철길 이음짬을 지나며 내는 열차 바퀴 소리를 귓 곁에 들으며 장신미는 한태규가 앉은 건너편 좌석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한 의자 건너 맞은 켠에 한태규는 이 쪽을 등지고 앉았고 그와 이야기하는 사내는 신미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들이 탄 상급차는 여느 바곤과 달리 자기 정원을 초과하지 않고 있었다. 공무로 다니는 간부급 출장원들과 고급 군관들 그리고 무역 부문에 종사하는 부의 소유자들이 이용하는 열차 바곤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사내인 듯도 했지만 신미는 부디 누구다 하고 꼭 짚어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그 쪽을 보면서도 머릿 속으로 강기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ㄱ시에 들어와서부터 전혀 보지 못한 강기수였다. 여느 때 같았으면 열 번도 더 집으로 찾아왔을 것이지만 이번만큼은 그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마치 ㄱ시로 오지 않고 ㅎ시에 그냥 남아 있는 사람처럼, 그것은 신미의 불안한 마음을 더욱 옥지어 들게 만들었다. 신미는 무릎에 올려 놓고 있는 가방속 (뱀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그까짓 술 한병이 뭐라고 상이라면서 주던 리영식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처럼 아편 운반인으로써 이처럼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않고 홀가분하게 열차 의자 위에 몸을 싣고 달려 보기는 처음이다. 그러나 위험천만한 물건을 가지고 갈 때 보다 더 짙은 불안감이 지금 자기 온 몸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차표를 검사하며 다가오던 여객 전무도 신미앞에 와서는 한번 히죽 웃고는 그대로 지나간다. 열차원도 멀리서부터 그녀를 알아보고 해죽거리며 그녀 앞에 다가왔어도 신미는 아무런 반응없이 고자세로 앉아 있다. 상대방이 무안할 정도로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는 미모의 여성을 두고 특별히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9열차는 길주역에서 두 개로 갈라진다. 열 세 개의 열차 바곤을 달고는 백암령을 넘어갈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침대와 상급과 등 차 바곤 일곱 개를 달고 견인기가 떠난 다음 한 시간 뒤에 길주 청년역 객화차대 견인기가 나머지 바곤들을 끌고 뒤 따라 떠난다.
열차가 길주 청년역에 도착하자 신미는 차에서 내려섰다. 내리는 사람은 몇이 없고 오르는 사람뿐인 상황이어서 역 홈은 또 한번 북새통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는 ㄱ역 보다는 덜하다. 길주 사람들은 이 9열차를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 객화차대에서 따로 길주-혜산 열차를 운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9열차에 오르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다. 어디라 할 것 없이 사람 천지인 이 혼잡 속에서 강 기수를 찾아내기란 솔밭에서 바늘 찾기였지만 신미는 혹시나 하고 한 번 돌아보는 것이었다.
김춘희의 남편 최문기도 이 차를 탔는지 궁금했다. 열차 맨 뒤꽁무니 바곤 지붕에 타고 있던 강기수는 차가 멎자 냉큼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사람 무리 속에 섞여 상급차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예견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태규는 지붕위에 타지 않았다. 그가 불편한 차 지붕위에 올라올리 없었지만 혹시나 하고 기대한 자기가 어리석어 보였다.
리영식은 차 지붕에서 내리 떨궈 자연사로 위장하라고 지시했지만 그건 막연한 일 같았다. 죽어 주어야 할 놈이 상급차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는데야 무슨 다른 수가 있을까. 강기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ㅎ시에 들어가 김춘희를처치하면 그만한 돈은 지불하겠다고 한태규는 약속했다. 그 돈을 거머쥐자면 한태규를 이 열차에서 죽일것이 아니라 무사히 보내 주어야 했다. 그러나 한태규의 그 약속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가 문제다.
손에 피를 묻혔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닌 보살한다면 그때의 자기 모습만큼 처량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한태규를 지금껏 믿어 왔지만 이제부터는 경계해야 할 인물이다. 그를 죽인다는 것도 자기의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야 할 만큼 드센 놈이다. 아무 방비도 없이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을 경우 뒤로 몰래 접근하여 손을 써야만 자기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거였다. 정면 대결은 어림도 없는 상대였다. 그가 상급차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결국 자기는 리영식의 지시를 포기해야 했다.
강기수는 다시 한번 입술을 감빨며 상급차 바곤 쪽을 바라보다가 어떤 결심을 내린 듯 그 쪽으로 슬금슬금 걸어가기 시작했다. 열차가 떠날 무렵 강기수는 날쌔게 상급차 지붕위로 올랐다. 드디어 역을 출발한 열차는 남석을 향하여 맹렬한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차바곤 여섯 개를 떨어뜨려 놓고 달리는 만큼 아직은 평지 길이라 열차는 마치 튕겨난 공처럼 아무 부담없이 자기의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다
승강 계단을 올라서서 객실 안으로 통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좌측으로 자그마한 칸이 있다. 오른쪽은 세면장이고 왼편에 있는 작은 칸이 열차원실이다. 지금 열차원실 안에서는 두 남녀가 서로 껴안고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뜻밖에도 남자는 상사 연장(계급장)을 단 군인이었다. 팔에는 완장을 둘렀다. '검열원'이란 완장을 두른 체격 좋은 사내는 애송이 같은 어린 열차원 처녀의 앞가슴에 손을 집어넣고 키득거리고 있다.
처녀는 눈을 올려뜨고 사내를 째려 보고 있긴 했지만 입가에 흐르는 엷은 미소로 보아 과히 싫은 기색은 아닌 것 같다. 분명 아까 해물해물 웃으며 장신미에게 다가 왔다가 멍히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던 신미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바람에 무안한 듯 도로 가버린 그 열차원 처녀였다.
"아이참, 간지러워. 징글보, 제 정신이야?"
"가만 있어."
남자는 열이 오르는 듯 씩씩거리며 이번에는 아예 의자에 털썩 앉아 어린 여자를 제 무릎에 끌어 올려 앉혀 놓고 뒤로부터 두 손을 다 집어넣고 주물럭거린다. 여자의 얼굴이 빨갛게 불타 올랐다. 입에서는 색, 새액. 단김이 뿜어져 나왔다. 장소만 허락된다면 거추장스러운 옷 같은 것들을 모두 벗어버리고 싶도록 온 몸을 자극하는 남자의 짖궂은 공세 앞에 몸둘바를 모른다.
질풍같이 내 달리는 열차의 소음이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를 삼켜버려 누가 눈치챌 걱정은 없겠지만 그래도 근무중에 이러면 어쩌나 하는 초기 근심도 이제는 구중천에 날아가 버린 듯 싶다. 남자의 손이 거침없이 여자의 사타구니로 쑥 내려갔다. 벌써 오줌을 내 싼듯 질퍽하다.
으흐흐. 남자는 만족하다는 듯 괴상한 웃음을 흘리며 여자의 아랫 도리를 뱀 허물 벗기듯 쑥 내리 끌었다. 바지, 내의, 팬티까지 한꺼번에 무릎 아래도 밀려 내려가자 여자의 하신이 여지없이 드러 났다.
"어마나. 난 몰라."
발딱 남자의 품에서 튕기듯 빠져 나온 처녀는 제꺽 바지를 당겨 입으며 사내를 쏘아 본다.
"왜?"
뜻밖의 반항에 영문을 알수 없다는듯 두 눈을 디룩거리며 남자는 처녀를 쳐다보았다.
"안돼. 정신 나갔어. 반놈 같은게…"
"뭐 반놈? 이글 그저. 이리와."
남자는 다시 여자를 당겨 끌어안으며 바지 단추를 채우지 못하게 여자의 손을 잡아 쥐고 또 다시 속내의 고무줄을 늘구며 손을 들이밀었다.
"이러지 말어. 그러다 누가 들어오면…"
"문 걸었어. 빨리."
"제발 그만. 이게 군대라는게 맨날 빧쳐 가지구 "
여자는 손톱을 잔뜩 살구어 가지고 당장 할퀴기라도 할 듯 사내의 눈 앞에 벌려 대고는 눈을 뚝 부릅떴다.
"어쩌란? 긁으란? 하두 조르기에 좀 만져 보라고 허용하니까 씨까지 심자고 덤벼. 야 너 여자 수업 좀 더 해야겠다."
"쳇. 백당년. 네가 남자 수업 더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여자가 냉정해지자 이쯤 하면 분위기 다 망쳐 먹었다는 듯 남자는 옷 매무새를 바로하는 어린 처녀를 못 마땅히 흘겨 본다.
"남자 수업이 뭔데? 때도 시도 없이 덤벼대는 너 같은 애들한테 아무 때건 발가벗고 하자는 대로 내 몸 맡기라는 거야 "
"그까짓 바람 맞을 대로 다 할퀴구간 몸뚱아리 뭐가 그리 대단하다구 흥. 제법인데."
"까불지 말아. 너 정 그러다간 군사복무 제대로 마치지 못해. 여자 밝혀두 정도가 있지. 이래봬두 아직 숫처녀야. 뭐 바람이 어쩌고 어쨌어. 나중엔 별 소릴 다 듣겠네. 야. 너 같이 바람 난 수캐들 때문에 우리 여자애들 몸 건사하기 바쁜거야. 너 따위 애숭이들 여잘 알면 얼마나 알아. 모르면 수업을 성근하게 받아 알았니?"
벽에 붙은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춰보며 여자는 계속 옹알거린다. 기막히다는 듯 입 짝 벌리고 여자를 바라보던 남자는 안되겠는지 의자 위에 놓았던 자동총을 어깨에 메더니 나가려고 문고리를 벗겼다.
그러는 걸 획 돌아서며 여자가 다시 문 걸쇠를 걸었다.
"왜 그래?"
"부탁이 있어,"
"무슨 부탁 비켜?"
"정말이야. 침대 칸에 가서 상위(대위와 중위 사이 계급)동질 만나볼까?"
"뭐라구? 너 오늘 왜 이래?"
남자는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야. 리 상사. 내가 그리 호락호락해 보이더니? 여자라구 너무 얕잡아 보지 말아 며칠씩 기찰타고 다니다 보면 별 희한한 녀석을 다 만나게 돼. 네 말대로 거친 바람, 솔바람 맞을대로 맞는게 우리들 열차원들이지. 그거 너한테만 달린줄 아니? 그거 달구 우쭐거리는 사낸 너뿐이 아니야. 그저 그렇구 그런 흥측한거 함부로 내흔들 생각했으면 보답두 있어야지. 안 그러니?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숫처녀 몸뚱일 주무를 대로 주물렀으면 그 대가가 있어야 할 게 아니야?"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럼 뭘 요구하는데."
"솔직히 말해. 너 날 어떻게 생각하니. 앞으로 같이 살 여자로 생각하니? 아니면 심심풀이 상대로 보는거야?"
"너 정말 먹은 나이치곤 지나치게 찌들었구나. 됐어. 보답은 후에 하구 나 지금 나가 봐야돼, 검열시간이야."
"그럼 상위동지 만나러 갈까?"
상위란 그들의 상관이다. 길주에 본거지를 둔 열차 경무부 소속 군인들인 이들의 상관인 경무관이다
"그래. 어쩌라니?"
남자는 한 풀 꺽인 듯 하다.
"내 말 똑바로 들어. 너 검 열차 탈때마다 단속임네 하고 여자애들, 이 칸에 끌구 들어와 어찌구 어찐걸 내가 모를 것 같아서 가만있는 줄 아니? 내가 오늘 겪어 보니까 무슨 짓을 하였는지 알긴 다 알겠다만 그냥 가겠으면 가봐, 난 나대로 하겠으니까?"
성큼 다가선 여자는 문고리를 벗겨 놓는다. 그리고는 어서 나가라 고 손짓한다. 남자는 총을 쥔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달려들어 목조르기라도 하고 싶었다 아니면 총탁으로 저 주절거리는 얄팍한 입술에 한 대 먹여 다시는 나불거리지 못하게 박살을 내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제 무덤 파기라는 걸 아무리 설익은 감자 떡 같은 녀석이라 한들 왜 모르랴.
"그래. 그 부탁이라는게 뭐야."
상사는 총대를 세워 놓고 담배를 꺼내 피워 물었다. 그러자 여자는 저 혼자 벙긋 웃더니 조르르 상사 곁에 바싹 붙어 앉았다. 조금전과 달리 상사는 무슨 오물이 날아온 듯 한번 희끗 쳐다보더니 주춤 물러앉기까지 한다.
"왜? 내가 싫어?"
조금전 심각한 상황과는 달리 언제 그런일 있었느냐는 식이었지만 남자는 여전히 무거운 기분이다.
"너 정말 무서운 애로구나. 헛 나참. 이랬다, 저랬다…"
"군대라는게 왜 이리 소심할까. 어쩌나 한번 팽 해본건데 뭐 그렇게 심각하게 그래. 촌부같이. 그러게 너 아직 인간수업 좀더 받아야 돼."
"인간 수업? 여자 수업 아니구?"
"여잔 아직 멀었구. 네 말처럼 이랬다, 저랬다 하는게 여자야. 알겠니?"
"왜 그래야 하는데?"
"그래야만 살 수 있으니까. 상황에 따라 대처하지 않으면 맨 날 당하기만 하게? 너 같은 어리석은 애들은 그걸 보구 이랬다, 저랬다 한다구 표현 하지만."
"그럼 본심은 아니다 그거야?"
"그럼. 아니지 않구. 정말 내가 경무관한테 가는줄 알았니?"
"글쎄…"
"가서 뭐 하게. 리주열 상사가 내 바질 벗겼어요. 이런 말하겠니?"
"아이구. 요걸. 괜히 속 섬뜩했네."
상사는 다시 얼굴 근육을 확 풀어 버리며 그녀의 가슴속에 손을어 넣으려고 한다.
"그러게. 넌 수업을 더 받아야 한다는 거야. 알겠어. 이것 봐라. 또 방자해 지는걸."
"그래 그만 두자. 근데 부탁이란 뭐야."
'딴게 아니구 내 말 들어봐!"
여자는 리주열의 귀에다 입을 대고 한참이나 속살거렸다.
"음. 그러니까 오늘은 본척도 안한다 이거니?"
"그래. 그 여자 굉장한 장사꾼이야. 드문히 열차에서 만나는데 그때마다 값비싼 중국 물건들을 가지고 있었어. 근데 오늘은 밥 한끼 먹으라는 소리도 없어,"
"그러니까 뭐. 으흐흐 알겠어. 그까짓 계집. 너 정말 배고프겠구나."
"아침에 빵 한 개 먹구 지금껏 먹은게 없어. 네가 돌봐주잖으면 돌아 갈때도 나 기아속의 주인공이야. 그리 알고 뭘 좀 어떻게 해 봐."
"알았어. 그 대신 날 어두워지면 딱 이러는 거다."
상사는 엄지 손가락을 쑥 장지에 끼우며 한 눈을 찡긋한다. 몹시추한 행동이었지만 여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이미 익숙해진 사람처럼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럼 먼저 나가 봐. 조금 있다 내가 행동할게."
조금 후 상급차 객실안에서는 째랑째랑한 열차원 처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님 여러분. 열차가 다음에 설 역은 운흥역입니다. 운흥역에서 내리실 분들은 미리 준비 하셨다가 오른 편에 있는 역 홈에 열차가 완전히 멎은 다음 천천히 내려 주십시오."
한태규는 마주 앉은 장신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켰다. 옆에 앉았던 사람이 뭐가 그리 급한지 '에이 내려야지' 하며 의자 밑에 넣어 두었던 배낭을 끌어당겨 등에 지더니 앞쪽으로 나가 버렸다. 한태규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창문 유리에 바싹 얼굴을 갖다 붙이고 신미에게 가까이 오라고 눈짓을 하였다.
신미는 내키지 않았지만 별 수 없이 자기 얼굴을 그의 얼굴 앞으로 접근시켰다. 아무도 그들을 눈여걱 보지 않았지만 한태규는 몹시 주위를 경계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대장이 내준 것이 뱀술 한 병 뿐은 아니지?"
순간 신미는 대답에 앞서 어지간히 놀라는 기색이다.
"뭐 이상하게 생각할건 없어. 기지 창고에서 내간 것이니까!"
"네에."
그제야 장신미는 의혹이 풀리는 듯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태규의 작은 눈이 찌를 듯 곧바로 신미를 직시한다. 신미는 어쩔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속일 것도 없었다.
"돈 두장을 주더군요. 한 장씩 가지라면서."
"누구와. 강기수와?"
"네."
"두 장이란 말이지. 알았어. 그 외 다른 것은 없구?"
"없어요."
"정말 없었어?"
신미는 속이 섬찍했지만 개인 신상을 침해당한 치욕스런 그런일까지 말할 수는 없었기에 고개를 흔들었다. 대신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함께 기차 타러 나오면서 최문기에게 갔다온 경과에 대해서는 누누히 말해 주었지만 한태규의 속심을 조금이나마 헤집을 말이 생각나지 않아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었던 신미다.
"저 한 가지 물어도 좋아요?"
"뭔데?"
뭔가 생각을 쫓는 듯 창밖을 내다보던 한태규가 머리를 돌렸다.
"최문기라는 사람의 딸이 혹시 소장 동지 친딸 아니세요?"
"뭐?"
용의 주도한 사람인 한태규는 절대로 놀라지 않는다는 듯 평범한 어조로 반문했지만 담배를 쥔 오른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신미는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 소장의 입에서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 것인가 하는 기대감도 가져본다.
"그건 어떻게 하는 질문인가? 최문기가 뭐라고 하던가?"
"아닙니다. 얼결에 아이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까 한은순이라고 했어요. 거기다 소장 동지까지 그 애가 몇 살인지 알아 오라고 한 말이 생각나서 물어본 것뿐이에요."
"음…"
한태규는 대답을 않고 애궂은 담배만 깊숙이 빨아 공중에 내뿜었다. 잿빛 연기가 타래를 치며 몰려 올라갔다.
"그런것까지 신미가 알 필요는 없어 공연히 머리만 아플테니까."
역시 한태규답게 단마디로 자른다.
그러나 이왕 내친 걸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태규에게 덧 질문을 한다해도 묵묵 부답이라는 것을 모르는 신미가 아니었지만 어쩐지 묻고 싶어졌다. 그가 대체로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 이상 별로 두려워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최문기라는 사람이 우리의 동지는 아니라고 말씀 하셨는데 그럼 무엇 때문에 이 차를 타고 ㅎ시에 함에 가는 것인지 난 무척 알고 싶군요."
"그건 ㅎ시에 도착하면 자연 알게 될거야. 그런데 왜 그리 상관없는 일까지 신경쓰는 거지?"
"제가 한 일 아닙니까. 저로서는 무언가 딱히 짚을 수는 없지만 어쩐지 예상을 뒤집을 일이 꼭 일어 날것만 같아요."
"신미의 예상이란 뭐게?"
한태규의 우멍한 눈이 가늘게 쪼프려졌다.
"뭐랄까요. 이를테면 평범하다고 봐야지요. 그저 지금까지처럼 아무일 없이 나르고 팔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만 진행되는 그 과정이겠지요."
"그러니까 그 과정이 뒤집힌다 그거겠소."
"네."
"흠. 신미 생각이 틀린건 아니야. 일은 이미 뒤집혀 졌으니까. 다만."
말하다 말고 한태규는 의미심장한 눈길을 신미에게 주었다.
"뭐에요. 말해 주세요."
"어떤 일이든 반드시 그 종결이 있는 거요. 현명한 사람은 그 종결이 파격적이든 운명적이든 좀체로 충격을 받지 않는다는 거야. 나 역시 조용히 예전처럼 그렇게 무엇인가 팔고 사며 굴곡 없이 살고 싶소. 하지만 세상살이가 어디 그런가. 사람이란 그런 우여곡절 속에서 세상을 사는 묘기를 터득하는 것이지. 최문기, 그 사람이 라고 그저 조용히 일개 가장으로 맘편히 살수만은 없겠지. 저지른 일이 있으면 그 여파는 반드시 밀려들게 마련이야. 신미가 자책할 일은 아니거든. 자책은 세상사는 묘기가 아니야. 그건 어리석은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구질구질한 보따리일 뿐이야. 알아두라구."
이때 경무원 완장을 두른 두 명의 군인이 뚜벅뚜벅 군화발 소리를내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우람지게 생긴 상사 연장을 단 군인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상등병 연장을 단 군인은 맞은켠에 앉은 군관에게 거수 경례를 하며 증명서를 보자고 했다. 한태규는 별 싱거운 놈 다 보겠다는 듯 한번 힐끗 리주열을 쏘아 보고는 말없이 신분증과 여행증명서를 꺼내주었다.

(다음에 계속)

(http://www.alonk.com/) 에 연재하는 장편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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