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당시 38선의 경계상태 등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있어서 어느 분의 수기 내용 중 한 부분을 아래와 같이 인용합니다.
"1947년 이모 할머니댁이 38선이 가까운 양양 광정리 머일에 사실 때에 일어난 일이다.
이모 할머님의 둘째 아드님, 당시 중학교 3학년인 석빈 아저씨와 몇몇 친구가 서로 짜고 38선 넘어 남쪽으로 몰래 숨어서 나간 일이 있었다.
그때 광정리 쪽은 38선이 가까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숨어서 왕복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이유는 공산주의 김일성 우상 숭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인데, 담임 선생이 너무 심하게 학생들을 몰아치는 바람에 담임 선생의 인격에 대해 반발하는 행동이었다고 한다.
모두들 내려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대한민국 국방군 경비 초소에 들키고 말아 모두들 한 곳에 모여 있게 되었는데 국방군이 이들을 보고 내려온 사유를 자세히 말하라고 하니, 어린 학생들이 담임 선생님이 너무 못살게 굴어 기분 나뻐서 내려 왔다고 하니, 국방군이 어린 소년들을 설득하기를, 너희들은 한참 공부할 나이이고 또 부모와 떨어져서는 살지 못하는 나이라고 하면서 어서 다시 넘어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어른들 말씀을 잘 들으라고 당부를 하고 잘 설득하는 바람에, 순진한 그들은 다시 몰래 넘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이 사실을 담임 선생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그때의 학생들을 모두 호출하고 족쳐 대는 바람에 이들은 일시에 사상범으로 몰려 조사를 받게 되었고, 학생들 가족까지 모두 조사하게 되었는데 몇몇의 학생들의 형들도 억울하게도 사상범으로 몰아, 함경도 아오지 탄광으로 징역을 보내게 되니 부모들과 친척들은 갑자기 벼락을 맞은 꼴이 되어 이 지방은 슬픔으로 가득 하였다.
석순 아저씨도 동생 때문에 같은 벼락을 맞듯이 쇠사슬 차고 아오지 탄광으로 가게 되니 이모 할머님과 할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하고 그 이후 슬픔 속에서 인생을 사시게 되었다."
특히 6.25가 가까워지면서 남북간의 국지적 전투가 종종 벌어지고 있었으나 당시만 하더라도 38선의 경계상태가 비교적 허술했던 관계로 월남이나 월북 등등 목적성 왕래는 간헐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국 구소련과 미국의 희생물이 된셈이고 구소련이 악의축을 만든 셈이죠.
김일성이가 6.25일으키는 바람에 철천지 원수가 되었지요
그후 6.25때 좌빨들이 남한사람들을 못에 박아죽이기도 하고 돌멩이로 쳐죽이고 잔인하게 수백만명을 죽여서 남한사람들에겐 잊지못할 원한이 쌓인것입니다
5.60년대 북을 자연스럽게 증오하게 되었고
통일의 길은 멀어졌고 지금까지 오게 된것이지요..
"1947년 이모 할머니댁이 38선이 가까운 양양 광정리 머일에 사실 때에 일어난 일이다.
이모 할머님의 둘째 아드님, 당시 중학교 3학년인 석빈 아저씨와 몇몇 친구가 서로 짜고 38선 넘어 남쪽으로 몰래 숨어서 나간 일이 있었다.
그때 광정리 쪽은 38선이 가까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숨어서 왕복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이유는 공산주의 김일성 우상 숭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인데, 담임 선생이 너무 심하게 학생들을 몰아치는 바람에 담임 선생의 인격에 대해 반발하는 행동이었다고 한다.
모두들 내려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대한민국 국방군 경비 초소에 들키고 말아 모두들 한 곳에 모여 있게 되었는데 국방군이 이들을 보고 내려온 사유를 자세히 말하라고 하니, 어린 학생들이 담임 선생님이 너무 못살게 굴어 기분 나뻐서 내려 왔다고 하니, 국방군이 어린 소년들을 설득하기를, 너희들은 한참 공부할 나이이고 또 부모와 떨어져서는 살지 못하는 나이라고 하면서 어서 다시 넘어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어른들 말씀을 잘 들으라고 당부를 하고 잘 설득하는 바람에, 순진한 그들은 다시 몰래 넘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이 사실을 담임 선생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그때의 학생들을 모두 호출하고 족쳐 대는 바람에 이들은 일시에 사상범으로 몰려 조사를 받게 되었고, 학생들 가족까지 모두 조사하게 되었는데 몇몇의 학생들의 형들도 억울하게도 사상범으로 몰아, 함경도 아오지 탄광으로 징역을 보내게 되니 부모들과 친척들은 갑자기 벼락을 맞은 꼴이 되어 이 지방은 슬픔으로 가득 하였다.
석순 아저씨도 동생 때문에 같은 벼락을 맞듯이 쇠사슬 차고 아오지 탄광으로 가게 되니 이모 할머님과 할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하고 그 이후 슬픔 속에서 인생을 사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