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납북 미귀환자 485명‥70·80년대 집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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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생존 국군포로 548명, 6.25전쟁 납북자도 상당수 정부가 납북자 지원법 마련을 위해 본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북한의 남한 주민 납북 실태와 규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납북문제는 그동안 남북 당국 간 명확히 정리하지 못했고 관련 정보도 적어 납북자 가족들도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최근에는 정부가 탈북자 등을 통해 간접적인 실태 파악에 나서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납북 1970∼1980년대 집중 = 북한의 남한 주민 납북은 1970∼1980년대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북한은 아직도 납북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남한에서도 처음에는 ’실종’으로 파악했다가 뒤늦게 납북으로 확인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납북문제는 지난달 말 ’납북 고교생’ 김영남(45)씨의 남측 가족 상봉행사를 계기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1977년 8월과 이듬해 8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발생한 고교생 납북은 여름 방학을 맞아 전남 홍도해수욕장에 피서간 이민교(당시 18세.평택 태광고교 2년)씨와 최승민(당시 17세.평택 태광고교 2년)씨 납북으로 시작됐다. 이어 1978년 8월 전북 선유도해수욕장에서 김영남(당시 16세. 군산기계공고 1년)씨가 북으로 끌려갔고, 이보다 5일 뒤인 8월10일 전남 홍도해수욕장에서 홍건표(당시 17세.천안상고 3년)씨와 이명우(당시 17세.천안농고 3년)씨가 납치됐다. 이들 고교생은 당시에는 실종 처리됐으나 1995년 체포된 남파 간첩 김동식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모두 강제 납북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북한은 1970년 6월21일 연평도 근해서 승무원 20명이 탄 해군수송선을 나포해간 것을 비롯해 1980년 1월26일 서해상에서 조업중 선원 24명과 해왕 6, 7호 어선을 나포하는 등 1980대에 집중적으로 어부를 태운 어선을 끌고 갔다. 북한은 또 1987년 1월15일 백령도 근해서 선원 12명을 태운 어선 동진 27호를 납치해간 뒤 동진호가 정탐행위를 위해 침투했던 간첩선이며 선원들이 귀환을 원치 않는다며 송환을 거부하기도 했다. ◆납북자 규모는 = 납북자는 6.25전쟁 이후 납북자와 6.25전쟁 중 납북자, 국군포로 크게 분류되고 있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납북자는 모두 3천790명에 달하며, 이 중 3천305명이 귀환했고 미귀환자는 485명인 것으로 통일부는 집계하고 있다. 미귀환 납북자의 85%는 어선과 함께 피랍된 어부들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남한에 살고 있는 미귀환자의 가족은 2천∼3천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최근 국가정보원은 1973년 납북된 대용호 선원 일부를 추가해 미귀환자가 489명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전후 납북자 가운데 탈북자들의 진술 등을 통해 생사가 확인된 경우는 103명으로 집계됐다. 국군포로는 당시 총 4만1천971명 가운데 포로송환 협상을 통해 8천726명이 귀환했고 1만3천836명이 전사로 처리됐다. 탈북자 등을 통해 신원이 확인된 국군포로는 모두 1천734명이며 현재 북한 생존자는 548명, 사망자는 885명, 행방불명자는 301명 등인 것으로 국정원은 파악하고 있다. 6.25전쟁 중 납북자는 8만여명인 것으로 당시 통계연감이 기록하고 있으나 1956년 6월15일부터 8월15일까지의 대한적십자사가 벌인 조사 결과는 7천34명으로 나와 큰 차이를 보였다./연합 200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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