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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의 인권 메시지 김정일이 가장 무서워해”
동지회 1230 2007-01-15 11:48:52
◇ 탈북자들의 인터넷 라디오 방송국 '자유북한방송'의 용천참사특집 제작 스튜디오./연합자료사진


[포커스] 주목받는 자유북한방송
< 이 기사는 주간조선 [1938호] 에 게재되었습니다>
재정난 속에 3년째 활동… 황장엽씨가 위원장, 탈북자인 김성민씨 등 9명이 운영
김성민 “한국이 북한의 빈곤 책임져야 한다는 이재정 통일부 장관의 발언은 궤변

지난해 연말 기자는 미국에서 북한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지인으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이 인사는 “(한국의 현실이) 답답해도 이렇게 답답할 수가 없다”면서 이메일을 써내려 갔다.

“김정일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미국의 선제공격이 아니라 북한인권이다. 김정일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남한의 KBS 방송이 아니라 탈북 동지들이 단파(短波)로 쏘아대는 자유북한방송이다.

김정일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미국이나 일본의 정찰위성이 아니라 남한의 탈북 투사들이 북한으로 띄워 보내는 애드벌룬이다. 김정일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은 부시 미국 대통령도 아니고 아베 일본 총리도 아닌, 제 속을 깊숙이 꿰뚫어보는 황장엽 선생이다.”

이런 메일을 받은 직후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앞으로 손도끼와 황장엽씨 얼굴에 붉은 페인트를 뿌린 사진이 든 소포가 배달됐다. 황장엽씨는 지난해 11월 강연에서 “북한문제는 김정일 정권이 제거돼야 근본적으로 해결된다”고 말했다.

황장엽씨에 대한 테러 위협은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2004년에는 식칼이 꽂힌 황장엽씨 사진이 배달된 적도 있었다. 북한으로부터 테러 위협을 받고 있는 황장엽씨가 바로 자유북한방송 방송위원장으로 있다.

‘김정일 정권이 두려워한다’는 자유북한방송(FNK)은 탈북자인 김성민 탈북자동지회장이 운영하고 있다. 자유북한방송 웹사이트에는 주소가 나와 있다. 전날 김성민씨와 통화했을 때 실제 주소는 웹사이트상과 다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실제 주소를 찾는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약속한 시각은 1월 3일 오전 9시. 취재진은 딱 3분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김성민씨의 공식직함은 자유북한방송 방송국장. 김성민 국장은 악수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냅따, 잘 찾으시네요. 묻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은 여기 오면서 계속 전화하는데요.”

악센트에서 북한 말투가 확 풍겼다. 김성민 국장은 1962년 북한 자강도 희천시 출생이다. 김형직사범대 작가양성반을 거쳐 자주포군단 예술선전대 작가로 활동했다.

정치장교인 김씨가 처음 북한을 탈출한 것은 1996년. 중국 옌지에서 지내던 김씨는 1997년 2월 다롄항에서 베트남행 선박을 타려다 검거되었다. 중국 도문에서 7일 동안 조사를 받고 함경북도 온성으로 끌려가 다시 7일간 조사를 받았다. 김씨는 온성에서 평양으로 호송되던 중 기차에서 뛰어내려 다시 탈북에 성공했다.

“만일 평양행 열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저는 없었죠. 처음엔 나처럼 도망친 경우가 별로 없는 줄 알고 얘기했는데, 나중에 보니 3~4회 붙잡혔다가 도망친 사람도 많았습네다. 가장 많은 경우는 7번이 최고였지요.”

김성민 국장은 이재정 통일부 장관의 북한 굶주림 발언과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다.

“이 사회가 북한의 굶주림에 대해 도와줄 도덕적 의무는 분명 있습니다. 같은 겨레니까. 그러나 대한민국이 북한 사회를 책임져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김정일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대한민국에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습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네다.”

김성민 국장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깡내밥(강냉이밥)이라도 굶지 않으면 하는 게 북한 사람입니다. 이밥에 돼지고기는 꿈도 꾸지 않습네다. 내가 군대 생활을 16년 해봐서 잘 알아요. 군비(軍費)를 1%만 떼내도 이게 해결됩니다. 이종석은 교묘하게 했지만 이 사람은 아주 둔하게 나오데요. 내가 그 사람 얘길 듣고 기절할 뻔했시요.”

김성민 국장이 탈북을 결심한 것은 혈육 때문이었다. 그의 부친은 3형제 중 장남이었다. 부친의 둘째 동생과 막내 동생이 6ㆍ25 전쟁 중 월남했다. 작가동맹 시인으로 작가동맹 시(詩)분과위원장을 지낸 부친 김순석은 그가 열네 살 때 사망했다. 그는 인민군 정치장교로 있으면서 남쪽의 아버지 형제가 돌아가시기 전에 꼭 가서 만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1996년 처음 탈북한 뒤 주로 중국 옌지에 머물며 남한의 작은아버지들을 수소문했다. 그는 틈틈이 자신이 보고 느낀 탈북자의 생활상을 시사월간지에 싣기도 했다. 수소문한 결과 둘째 작은아버지만 생존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둘째 작은아버지는 한국에서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다.

1997년 그는 둘째 작은아버지의 도움으로 베이징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같은 해 서울에서 조선족 여성을 만나 슬하에 딸 하나를 두고 있다. 남한 생활에 잘 적응한 김씨는 2003년 자유북한방송 개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때 사업가인 둘째 작은아버지 김관석씨로부터 결정적인 도움을 받는다. 김관석씨는 세 번에 걸쳐 5000만원씩 1억5000만원을 조카에게 지원했다.

사업을 하는 사촌형도 역시 6000만원을 지원했다. 북한 노동당 비서 출신인 황장엽씨는 그에게 예금통장을 건네기도 했다. 또한 북한에서 망명한 고위층 출신들에게 100만원씩 갹출했다.

또한 안응모 이북5도청 회장도 모금한 돈을 준비자금으로 내놓았다. 또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기업가 등 독지가들이 자유북한방송의 탄생을 후원했다.

자유북한방송이 한창 개국을 준비 중이던 2004년 3월, 서울에서 남북장관급 회담이 열렸다. 이때 북한 측 대표는 기조연설을 통해 공개적으로 자유북한방송을 언급했다.

북한 측 대표는 “탈북자들이 하는 대북방송을 그만두게 하라. 이것은 남조선 당국자들의 책임이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김성민 국장은 ‘방송 때문에 남북장관급 회담이 깨지면 안 되는데…’하는 걱정을 했고, 여러 날 잠을 자지 못하며 불안에 떨기도 했다.

그는 정세현 통일부 장관의 발언으로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정세현 장관은 “한국에 그런 인터넷 방송은 허다하다. 자유북한방송은 라디오 방송과 다르다. 개인이 하는 것을 국가가 뭐라고 말할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2004년 4월 20일 인터넷으로 첫 방송을 시작했다. 자유북한방송은 설립 목적에서 “인간의 존엄이 파리 목숨처럼 버려지는 세계 최악의 인권 유린 국가가 바로 북한”이라고 규정했다.

자유북한방송은 또한 “1990년대에 북한 정권은 300만이 넘는 아사자가 발생했음에도 600만톤의 옥수수를 살 수 있는 8억9000만달러를 들여 김일성의 시신을 치장하는 데 쏟아 부었다”면서 “김일성ㆍ김정일 부자의 대를 이은 독재와 우상화 속에 북한의 인민은 21세기의 가장 처참한 노예로 살고 있다”고 밝혔다.

자유북한방송은 또 “인민의 피와 고통으로 독재의 왕국을 유지하려는 김정일 체제에 일말의 미련이라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북한 인민의 존엄과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면서 “북한 인민의 자유와 인권을 외면한 협력과 교류는 독재의 광기를 녹이는 햇볕이 될 수 없고 남북한 모두의 평화를 이룩할 수는 더더욱 없다”고 주장했다.

우여곡절 끝에 첫 방송을 시작했지만 김 국장은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다. 밤늦게 집에 돌아가다가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소스라치게 놀라기를 반복했다. ‘까불지 말라’는 전화가 매일 열 통 이상 왔고, 협박 이메일은 그의 표현을 빌리면 ‘썩어지게 날아왔다’.

자유북한방송을 운영하는 사람은 모두 9명. 북한에서 온 사람이 7명이고, 남한 출신이 2명이다. 탈북자 중에는 인민군 대남방송원, 대남선전원, 정치장교, 일호화가(김일성 부자 초상화가) 등이 있다. 남한 출신 두 명은 방송 엔지니어다.

기자로 있는 주성일씨는 2002년 DMZ 철책선을 뚫고 월남했다. 이후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현재는 자유북한방송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자유북한방송에서는 자체 뉴스를 제작하지 않는다. 주로 연합뉴스와 조선일보에 실린 북한 관련 뉴스를 그대로 보도한다.

자유북한방송은 KBS 사회교육방송 시절 인기를 끌었던 ‘노동당 간부들에게’ ‘역사의 진실’ ‘탈북자들의 증언’의 프로그램 제목을 그대로 살려 진행하고 있다. 김성민 국장은 “과거 KBS 사회교육방송이 맡고 있던 역할을 자유북한방송이 이어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자유북한방송은 이와 함께 ‘황장엽 코너’도 신설했다. ‘황장엽 코너’에서는 황장엽씨가 남한에서 보는 북한의 진실, 남한에서 보는 민주주의 이해를 강연한다.

자유북한방송 측은 북한 주민이 자유북한방송을 많이 청취하는 게 곧 북한 민주화를 앞당기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과거 동유럽 공산권에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은 것도 라디오 방송이었다.

탈북자선교회와 북한민주화운동본부 측이 애드벌룬을 통한 ‘전단 살포’를 맡고 있다. 김성민 국장은 “그 애드벌룬에 자유북한방송 주파수가 적힌 쪽지를 넣어 보낸다”고 말했다. 2006년 6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탈북자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탈북자 중 17%가 자유북한방송을 들었다고 대답했다.

김성민 국장은 “중국에 출장 나온 북한 사람이 중요 문건을 사진으로 보내주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자유북한방송의 존재가 북한 주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자유북한방송의 웹사이트 순위는 2007년 1월 현재 1499등. 2004년 첫 방송을 쏘았을 때 순위는 3만7000등이었다. 김성민 국장은 “처음 시작 당시에는 지난 대선 때 노무현 후보를 지원한 인터넷 매체 ‘라디오21’을 경쟁상대로 삼았다”면서 “그런데 지금 ‘라디오21’은 자유북한방송에 훨씬 뒤지는 7000등 정도가 된다”고 말했다.

현재 자유북한방송은 광고수입이 전혀 없다. 김성민 국장은 “100위 안에 들어가야만 광고가 붙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안정적인 수입원이 없이 후원금으로만 운영하다 보니 자유북한방송은 2005년 말부터 운영난에 직면했다. 그러나 2006년 중반부터 일본과 미국에서 민간 후원기구가 결성되면서 재정난의 숨통이 트였다.

김성민 국장은 2004~2006년에 미국과 일본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미국 의회 청문회에도 4번이나 참석해 증언했다. 미 국무성에도 10번 이상 방문했다. 2006년 4월에는 탈북자 강철환씨와 함께 백악관을 방문, 부시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2007년으로 김성민 국장은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 지 10년이 되었다. 김성민 국장은 한국생활 10년의 소감을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서 북한인권운동을 하면서 국회의원은 딱 두 사람 만났습네다. 현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송영선 한나라당 의원입니다. 국회의원뿐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도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이 없어요. 미국과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nk.조선

자유북한방송 설립 연혁

2003년 준비 시작
2004년 1월 준비자금 4000만원 확보
2004년 4월 본 방송 개시
2005년 1월 VOA(미국의 소리방송) 통신 제공
2005년 2월 공중파(단파)시스템 운영
2005년 12월 SW 5880㎑ 단파주파수 확정
2006년 4월 2개의 채널로 단파 라디오 운영
11750㎑(19:00~19:30), 9760㎑(02:00~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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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토회복 2007-01-16 19:41:29
    정부는 북한 정부의 고위층을 상대로 통일사업을 해나가고,
    여러분은 일반 인민들을 상대로 계도해 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정부 욕할 필요없고,정부가 여러분을 탄압할 일도 없어요.
    서로가 맡은 자리에서 수준에 맞게 일 해나가면,
    저절로 역할 분담이 되는 것입니다.
    저도 돈 벌어서 여러분께 지원 좀 해야겠네요.
    그럼 계속 수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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