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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진통제 혼자 맞기 싫다"
동지회 1016 2005-01-20 09:55:43
김정일 "진통제 혼자 맞기 싫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하 김정일)은 즉흥적이다.

80년대 초반 김정일의 집무실 정문에서 일이다. 전문섭 호위사령관(경호실장)이 번호판 없는 벤츠 자동차를 타고 들어갔다. 정문을 지키던 경호원은 이 차를 김정일의 차로 착각하고 그냥 통과시켰다.

이 보고를 받은 김정일로부터 당장 불호령이 떨어졌다. “적들이 혁명의 수뇌부인 나를 노리고 온갖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며 6명의 경호원을 처벌하라고 했다.

이들은 낮엔 대열(제식)훈련을 하고 밤엔 사상투쟁을 했다. 김정일은 차형(차의 모양)을 분간하지 못하면 자신의 차를 세워도 좋다고 명령했다. 며칠 뒤 다른 근무자는 진짜 김정일의 차를 세우려고 했다.

차가 멈추지 않자 이 근무자는 총을 뽑아들고 차를 막았다. 차가 급제동하자 김정일이 내렸다. 김정일은 “차도 못 알아본다”며 근무자를 사상투쟁 무대에 올렸다.(김정일 경호원 출신 이영국)

김정일은 비밀파티를 하다가도 “야 오늘은 남조선 영화 한편 보자”고 한다. 그러면 술을 마시던 파티 참석자들은 함께 영화를 봐야 한다.

이런 때 보는 영화가 남한에서 제작된 ‘미워도 다시 한번’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이다. 근무자들은 김정일이 언제 영화를 보자고 하고, 언제 사격을 하자고 할지 몰라 항상 파티가 끝날 때까지 대기해야 한다.(김정일 처조카 이한영)

남들과 대화할 때도 김정일은 대화 주제를 자주 넘나든다. 2001년 러시아 방문길에는 한참을 러시아에 대해 얘기하다가 돌연 평양에서 있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에 대해 말했다.

김정일은 올브라이트에게 “어떻게 마지막 남은 ‘공산주의 악마’를 만나기를 결심했나”라고 물었다고 했다.

김정일은 이어 “올브라이트는 처음부터 나를 마치 법정에서 신문하듯 했습니다. 나는 모든 질문에 답했고, 그녀는 내가 사전에 준비한 원고를 이용해서 답하는지 아니면 즉흥적으로 답하는지 유심히 살폈지요. 나는 내 생각을 간단명료하게 밝혔지요. 그녀는 내 성격이 맘에 드는 모양이었어요”라고 설명했다.(폴리코프스키 러시아연방 극동지구 대통령 전권대리)

북한의 선전 매체들은 김정일을 ‘광폭(廣幅)정치’ ‘인덕(仁德)정치’의 화신(化身)으로 묘사한다. ‘통이 크고 인덕이 있다’는 뜻이다. 노동신문은 ‘이민위천(以民爲天·백성을 하늘같이 여김)’을 선전하기도 한다.

김정일은 실제로 ‘통 크게’ 행동하기도 한다. 남한의 영화감독 신상옥과 영화배우 최은희를 납치한 후 해준 ‘대우’에서 엿볼 수 있다. 납치(78년) 후 5년이 지났을 때 유럽여행을 허락했고, 84년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와 오스트리아 빈에 영화사를 차리게도 해줬다.

신상옥, 최은희씨가 북한을 탈출했을 때 그들의 은행계좌에는 220만달러(현재가치로 24억여원)가 들어 있었다.(신상옥·최은희 비록·신씨는 후에 이 돈을 돌려줬다고 했다.)

신상옥·최은희씨가 유럽에서 영화 제작을 하고 있을 때 김정일의 한 측근이 “그 사람들 뛰려고 그러지 않을까요”라고 말하자 김정일은 “뛰긴 왜 뛰어. 돈 걱정없이 맘대로 영화를 만들지 않나…”라고 말한 적도 있다.

김정일은 한번 믿었다 싶으면 ‘통 크게’ 밀어주는 면모도 있다. 협상을 할 때도 “좋소”라며 상대방의 제의를 그 자리에서 수용한 적도 있다.(이영국)

김정일 스스로가 ‘통 크게’ 보이려고 한 측면도 있다. 그는 아버지 김일성의 신임을 얻기 위해 8㎞의 서해갑문, 세계최대 높이 김일성 동상(디딤돌 3m, 동상 20m, 총부지 24만평), 주체사상탑(170m), 105층짜리 유경호텔(공사중단) 등을 직접 기획했다.

2002년 8월에는 러시아 방문길에 올가 말리체바 러시아 기자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기자의 질문은 간단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은 누구인가요” “지난번 러시아 방문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정도다.

인터뷰를 마친 후 김정일은 “나에 대해 좋게든 나쁘게든 자유롭게 쓰시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써도 상관없소”라고 했다. 김정일은 ‘통 큰’ 표현을 했지만, 사실 쓸 내용도 별로 없었다. 김정일은 또 자신에게 우호적인 기자 외에는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

김정일은 “적들이 나쁘게 나올 때는 적들보다 더 큰소리를 치면 적들이 주저앉는다”고 하다가도 “판문점이 열리면 45분 안에 미군이 들어온다”고 걱정했다(이영국)는 증언도 있다.

김정일은 몸이 아파 극소량의 진통제를 맞아야 할 때가 있었는데 혼자 맞기 싫다고 해서 비서실 직원 5~6명이 아픈 데도 없이 함께 주사를 맞은 적도 있었다.(김정일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

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남한과의 대결 의식은 대단했다. 김정일이 어느 날 중부전선에 나와서 쌍안경을 쓰고 남한 쪽을 바라보다 남한 군인들이 태권도 훈련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김정일은 “남조선 괴뢰들이 우리를 먹자고 저렇게 피눈이 되어 훈련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앞으로 전국에 태권도 기풍을 불게하고 대중 체육으로 내밀어 국방에 이바지하여야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79년부터 북한에 15호 격술연구소, 사회안전부 정치대학 특수체육학부, 무력부 내 태권도 연구소가 생겼다.

김정일의 이런 행동양태에 대해 공산주의 종주국 러시아의 모스크바 방송은 97년 ‘다큐멘터리 김정일편’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김정일은 일찍이 생모(김정숙)를 여의고 계모(김성애) 밑에서 자라 애정 결핍 콤플렉스와 아버지 콤플렉스를 동시에 겪고 있는 인물이다.

이 때문에 작고 뚱뚱한 유라(김정일의 어릴 때 러시아 이름)는 미모와 큰 키를 계모로부터 물려받은 이복 동생(김평일)을 미워했으며, 연상의 여인(성혜림)을 좋아하게 됐을 것이다.

또 다른 한편 그는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항상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주변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사물을 극단화시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손광주 The Daily NK발행인/nk.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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