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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서 北送된 국군포로 가족의 비극
REPUBLIC OF KOREA 동지회 1121 2007-06-27 10:40:54
작년 10월 중국 선양(瀋陽) 주재 한국 영사관의 보호를 받다가 중국 공안(경찰)에 붙잡혀 강제 북송된 국군포로 K씨 가족(26일자 A6면 참조)의 불행은 1977년 K씨가 ‘정치범’으로 끌려가면서 시작됐다.

K씨의 맏딸이 탈북 후 남한에 정착한 남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K씨는 1949년 국군에 입대해 6·25전쟁 초기 북한군의 포로가 됐다.

이후 K씨는 함경북도 탄광에서 ‘괴뢰군 포로 43호’란 딱지를 붙인 채 노역에 동원됐다. 50년대 후반 B씨와 결혼해 6남매(3남3녀)를 뒀지만 자녀들은 ‘출신 성분’ 때문에 대부분 초등학교만 마치고 탄광으로 끌려갔다. 특히 맏딸은 어릴 때부터 노래에 소질을 보여 음악대학 진학을 꿈꿨지만 역시 탄광으로 가야 했다. K씨의 맏딸은 편지에서 “아버지가 너무 원통해 먼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 속에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고 썼다. K씨는 술자리에서 이런 불만을 토로했다가 ‘77년 9월 새벽’ 어디론가 끌려갔다. 이후 30년 동안 생사조차 모른다고 한다.


부인 B씨는 온갖 천대 속에 6남매를 키웠다. 남한에 있는 K씨 큰아들은 “30대에 ‘생과부’가 된 어머니는 고생을 하도 해 허리를 못 편다”고 했다. B씨는 99년 맏딸·셋째아들 등과 탈북해 7년간 중국에서 숨어 지냈다. 큰아들은 98년 먼저 북한을 탈출, 중국에 있었다. 큰아들이 2005년 남한행에 성공하자 B씨는 작년 10월 맏딸 가족과 함께 선양 영사관까지는 들어갔다. 남편의 고향 땅과 큰아들의 얼굴이 손에 잡힐 듯했다.

그러나 B씨는 믿었던 한국 영사관이 안내한 민박집에서 중국 공안에 체포돼 다시 북으로 끌려갔다. 맏딸과 두 손녀도 같이 북송됐다.

북한에 있는 K씨 둘째아들은 편지에서 “어머니가 (작년) 12월 3일 사망했다”며 “시신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고 썼다. 사망확인증까지 편지에 첨부했다. 남한의 큰아들은 “어머니가 얼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고생만 하시다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남한 영사관의 허술한 조치로 체포된 지 50여일 만에 동사(凍死)한 것이다. 북한의 둘째아들은 “어머니의 영정을 앞에 놓고 마음대로 울지도 못했다”고 썼다. 북한 보위부의 눈길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함께 끌려간 맏딸과 그녀의 두 자녀는 아직 관리소(형무소)에 있다고 한다.

1998년 큰아들은 아내와 딸을 데리고 탈북했었다. 그는 베이징 대사관을 거쳐 선양 영사관을 찾아 국군포로 가족임을 밝히고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큰아들은 “그때 영사관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고 남북관계가 잘 풀리려고 하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한국 돈 3만원쯤을 여비로 줬다고 했다. 장남은 “그 뒤로 7년간 남한에 갈 생각을 못했다”고 했다.

현재 K씨 가족 중 부인은 사망했고, 큰아들과 셋째아들은 남한에, 세 딸과 둘째아들은 북한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 10월 정부의 소홀함이 대한민국을 위해 싸웠던 한 가족의 운명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셈이 되고 말았다./nk.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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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이상 2007-07-01 15:38:26
    한국의 탈북자에 대한 관심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것은 한국의 탈북자라면 알고도 나머지가 있다. 이런 정책을 하루속히 바꾸지 않으면 국군포로던 아니면 그 누구도 북송되지 않으리라고 장담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노무현 정부는 다시 한번 깨달고 새로운 정부는 개혁을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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