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에 '결과적 책임' 있는 日 정부 나몰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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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07-11-01 17:51 민단 센터서 그나마 도움의 손길… 10만엔 정착금·임시숙소 등 알선 70년대 북송됐다 2003년 일본에 돌아온 재일동포 김영미(40대ㆍ여ㆍ가명)씨는 북한을 탈출했다 강제송환되고 다시 탈출하는 과정의 참혹상을 민단의 탈북지원센터에서 증언했다. 다음은 그 내용 요약이다. 2000년6월30일 새벽 3시 다른 여성 3명과 함께 은신해 있던 중국 K성의 한 가옥에 공안원들이 들이닥쳤다. 공포에 질려 북한에 송환되지 않게만 해달라고 울며 애원했지만 S간수소(감옥)로 끌려갔다. 감금된 지 40일이 된 7월13일, 우리 4명은 장대비 속에서 차에 태워져 중국 국경 마을로 향했다. 틈을 봐서 달아날까도 했지만 너무나 위험한 모험이었고, 심신이 기진맥진해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들이 도착한 곳은 중국과 북한 국경의 경비대 구치소였다. 며칠 후 우리를 포함해 30여명은 수갑이 채워진 채로 마이크로버스에 태워졌다. 버스는 10분 정도 달려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가르는 다리를 건넜다. 북한의 보위부 지도원이 나타나서 우리들의 이름과 주소를 적은 후 2사람씩 밧줄로 묶어서 트럭에 싣고 보위부로 끌고 갔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엄중한 짐 검사를 받은 후 작은 방에 14~15명이 함께 수용됐다. 밀가루에 옥수수 가루와 껍질을 섞어 풀처럼 만든 죽이 하루 세번 식사로 나왔다. 다행히 초범인 때문인지 소문처럼 잔혹하게 고문받는 일은 없었다. 15일째 되던 날 간수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다시 끌려간 지역에서의 1개월의 심문은 한층 괴로웠다. 어두컴컴한 독방에 하루종일 앉은 자세로 꿈쩍할 수 없었다. 말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은 채로 그저 앉아 있어야 하는 생활은 상상 이상의 괴로움이었다. 밤에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밤 10시면 취침해야 하는데 어둡고 습한 방에는 벌레가 득실거려 밤새 잠을 설쳐야 했다. 북한에 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회한으로 벽에 머리를 들이박기도 했다. 34일이 흐른 어느 날, 나는 갑작스럽게 석방됐다. 사회로 복귀해 6개월을 지냈지만 그 곳에서 더 이상 생활할 수 없었다. 또다시 국경을 넘었다. 중국에서의 고단한 도피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언제 다시 붙잡혀 북송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이를 악물고 살아 남겠다고 결심했다. 김철훈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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