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지 탄광, 국군포로들의 비참한 삶 |
---|
자유북한방송 2007-11-07 국군포로들의 비참한 삶을 직접 목격한 탈북여성과의 인터뷰 지난 10여 년간 남한사회에서는 국군포로와 납북자 송환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어 왔다. 지난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을 만나면 국군포로문제를 매듭지어 달라는 국군포로 가족과 국민들의 간절한 의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여전히 “북한에 국군포로와 납북자는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북한의 주장대로 국군포로와 납북자가 없단 말인가?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국군포로, 납북자는 북한에 현존한다. 그들은 오늘도 아오지 탄광을 비롯한 3D업종에 종사하면서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기자는 북한 아오지 탄광에서 국군포로들의 비참한 삶을 직접 체험한 탈북여성 김광숙씨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 인터뷰과정을 전문 그대로 게재한다. 기자: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지난 2005년도에 대한민국에 오신 김광숙씨를 모시겠습니다. 먼저 소개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광숙: 저의 이름은 김광숙이구요, 나이는 50세입니다. 고향은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구이구요, 북청고등전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시집을 간 후 7월 7일 군수공장에서 잠간 근무 하다가 6.13 탄광(아오지 탄광)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러다 탄광에서 배급을 안주고 먹을 것이 떨어지면서 살 수가 없어 1999년 2월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에서 6년간 숨어 지내다 2005년 6월 3일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기자: 네, 함경북도 온성군이면 또 온성군 남양구면 국경을 마주하고 중국 도문 맞은편에 있죠? 온성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김광숙: 남양은 중국의 도문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국경도시입니다. 비록 작은 소도시 이지만 공기도 맑고 깨끗한 고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순수해서 작은 것이 생겨도 서로 나누어 먹을 정도로 이웃 간의 정이 좋았던 동네입니다. 그러다가 내가 아오지 탄광에 시집오면서부터 배급이 중단되고 먹을 것이 없어지자 사람들이 옆집에서 굶어 죽어도 모른 체 외면하는 무서운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탄광에 다니던 제 남편도 결국 거기서 굶어죽었습니다. 기자: 네~ 원래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원래는 그렇게 착하고 이웃과의 정이 좋았던 온성사람들이 무섭게 변한 것은 세월을 잘 못 만난 탓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럼 전문학교를 졸업하시고 7월 7일 화학공장(군수공장)에서 일하셨는데 그 곳에 대해서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김광숙: 7월7일 공장은 종업원 약 7천명의 연합기업소입니다. 여기에는 1월20일 공장과 1월7일 공장이 속해있습니다. 7월 7일 공장에서 질안비료와 암모니아수를 생산해 1월 20일 공장에 넘기면 1월 20일 공장에서 화약을 만들 수 있는 중간공정의 혼합물을 만들어 1월 7일 공장에 넘겨 거기서 화약이 생산됩니다. 제가 공장에 들어갔을 때는 임신한 상태였고 집에는 이미 3명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4명의 아이를 키우며 매일 출근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루 8시간 동안 탄광에서 콘베아로 들어오는 석탄을 건조시켜 보일러에 넣는 일을 했는데, 하루 1.5t에서 2t의 석탄을 혼자서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공장 기술자로 일하던 남편이 폭발사고로 다쳐 하반신 불구가 되었습니다. 운신도 못하는 남편과 4명의 아이들을 혼자서 먹여 살리는 게 너무 힘에 부쳤습니다. 거기다 공장에서 배급마저 제대로 안주니 더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배급도 잘 주고 생산물이 있는 비료직장에 보내달라고 공장당위원회에 제기했습니다. 남편이 공장을 위해 일하다 폐인이 됐는데 먹고 살게 해달라고 제기했더니 당장 옮기기는 힘드니 먼저 변소청소를 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래서 두달 동안 변소청소를 하면서 모욕도 많이 받고 서러움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참고 견디면 비료직장에 들어가 배급도 타 먹을 수 있고 비료도 빼내서 팔아먹을 수 있으니 이를 악물고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비료직장에 들어가기 전에 남편이 먼저 사망했습니다. 남편이 죽고 나는 자식들이라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비료를 조금씩 몰래 양말과 허리에 감추어 가지고 나와 모아 10~20리 되는 농촌에 가서 옥수수와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비료직장도 5~7월이 지나면 생산을 못합니다. 생산을 못하면 비료직장 사람들도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달에 절반씩이라도 배급을 주는 탄광에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6월 13일 탄광(아오지)으로 갔습니다. 기자: 네 그런데 7월 7일 공장 같은 군수공장에서 직장을 이동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텐데 김광숙: 예, 직장에서 직장을 옮겨 가는데 대단히 힘들어요. 우리 같은 경우는 우리 남편이 하도 거기서 기술자로 지내면서 사고를 당했고, 아이들이 4명씩이나 되니까 할 수 없이 보내 준거지요. 기자: 그러면 6.18(아오지)탄광은 어떤 곳입니까? 특히 아오지 탄광이라고 하면 아주 성분이 나쁜 사람들이나 숙청 대상, 그리고 국군포로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추방지로 알고 있습니다. 아오지 탄광은 어떤 탄광이고 그 곳 탄광의 사정은 어떤지 한 가지씩 얘기를 해주십시오. 김광숙: 예, 지금은 이름을 고쳐서 6월 13일 탄광이 됐지만 그 전에는 아오지 탄광이라 불렀습니다. 아오지 탄광은 죄인들이 주로 일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죄인들만 탄광에 있으니까 가스 폭발사고가 많고, 그들이 탈주하기 위한 굴을 사방에 뚫어 놓는 등 사고가 끊이지 않아 제대군인들을 투입했습니다. 6월 13일 탄광이라는 이름은 김정일이 6월 13일 탄광을 방문한 날을 기념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아오지 탄광은 땅속으로 512m 깊이까지 들어가는 수직갱 탄광 이예요. 수직갱으로 케지(전차)를 타고 들어가면 110m 지점에서 한번 멈추고 다시 317m에서 멈추고 다시 내려가 412m에서 멈추고 512m까지 들어갑니다. 25명이 케지를 타고 내려가는데 처음에는 귀가 들리지 않아요. 300m를 넘으면 사람들이 귀를 막고 침을 넘기면서 들어가야 합니다. 기자: 네, 아오지 탄광을 비롯한 온성지구 탄광들에는 국군포로가 굉장히 많이 있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김광숙 씨가 아오지 탄광에서 일을 하실 때 국군포로를 직접 보신 적이 있습니까? 김광숙: 네, 우리 6.13탄광(아오지탄광)에 국군포로가 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은덕 오봉탄광이라고 있는데 거기에 국군포로가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국군포로라는 네 글자 때문에 사람값에 들지 못하고 제일 천한 막장에서 일했습니다. 국군포로의 자식들은 대를 이어가며 탄광에서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은덕에 석탄공업대학이 있는데 대학에서 방학이 되면 대학생들을 국군포로들의 주거 지역에 보내 계속 자수하라는 강연을 시킵니다. 기자: 아니, 국군포로들은 이미 6.25 때 북한에서 심문을 받았을 것 아닙니까? 미해명 사건에 연루됐거나 북한체제에 반대하는 말을 했다면 이미 다 잡혀가고 문제가 없는 사람들, 해명이 된 사람들을 탄광이나 광산에 보내는데요, 그 사람들한테 또 자수하라고 하면 뭘 자수하라는 건가요? 김광숙: 네, 그러니까 그 사람들(국군포로)이 솔직하게 말하지 안한 부분이 있을 것 같으니까, 한마디로 너희들을 완전히 믿지 못하겠으니 계속 죄를 자수해라 그런 뜻이지요. 그래서 자꾸 대학생들을 보내 포로들에게 자수하라고 인민반회의 소집하고 강연을 하는 것입니다. 예하면 국군포로 본인 자신은 직접 아무 죄도 없지만 다른 사람의 죄라도 아는 게 있으면 자수를 하라는 말입니다. 혹시 국군포로 중에도 남쪽에서 임무를 받고 침투한 간첩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탄광에서 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국군포로들이 자꾸 도망치려고 하기 때문에 주모자를 알아내 정치범으로 잡아넣으려는 거지요. 우리는 그걸 현실로 직접 봤어요. 우리 동네에 살던 국군포로가 탄광 케지(전차)가 추락 사고가 일자 적의 임무를 받고 고의적으로 사고를 일으켰다는 누명을 쓰고 정치범으로 끌려갔습니다. 새벽 5시에 보위부에서 들이닥쳐 짐을 싣는데, 그 집 아들이 학교에 가겠다고 말했더니 보위부 사람이 그 아들의 멱살을 틀어잡고 땅에다 내동댕이 치더라구요. 그러자 15살 먹은 애가 다시 일어나 보위지도원에게 왜 그러냐고 따지고 드니까 그 자가 애를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는 곧장 애 아버지에게 다가가 ‘이새끼야, 자수하라고 했는데 왜 자수를 안했나 응? 속에 있는 말 다 하라고 했는데 왜 안했나?’라고 하면서 때렸습니다. 15살짜리 아들애가 아버지가 맞는 것을 보고 흥분해서 보위지도원에게 달려드니까 죽도록 패더니 쓰러진 애를 자동차 적재함에다 뿌려 던졌어요. 그렇게 임시 먹고 살 수 있는 짐과 그 집 식구들하고 같이 실어 갔습니다. 기자: 네, 국군포로라는 이유로 온갖 정치적 탄압과 박해를 받고 있는 그분들의 피눈물 나는 삶을 직접 곁에서 체험하셨군요. 후에도 기억에 남는 사건 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김광숙: 네 우리 앞집도 할머니하고, 아들하고, 손자와 딸까지 다 붙잡아 갔어요. 부인한테는 가겠는가? 안 가겠는가 여부를 물어본 뒤 부인이 안 가겠다고 하니까 안 데려가더라구요. 식구 5명만 데리고 갔죠. 그런데 국군포로 남편의 성이 전씨였고 마지막 글자에 철이 들어갔습니다. 어쨌든 우리 동네에는 국군포로가 4명정도 있었는데 다 그렇게 잡혀 갔어요. 국군포로들은 주로 왜정 때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서 지어놓은 함바라고, 북한에서는 비지께(성냥곽) 집이라고 부르는데서 10세대 씩 모여 살았습니다. 대체로 오봉탄광에 국군포로가 제일 많았고, 우리 6.13(아오지)탄광에도 좀 있긴 했습니다. 그런데 국군포로들이 자꾸 도망치고 하니까 보위지도원들이 사람을 붙여서 계속 감시를 합니다. 혹시 탄광에서 배급을 줄때면 다른 사람들은 한번에 다 주는데 국군포로들은 보위지도원이 사람을 시켜 매일 먹을 치만 갖다 줍니다. 집에 있는지 매일 확인을 하는 거지요. 김대성 기자 lstarkim@naver.com
신고 0명
게시물신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