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1억달러 있으면 7차 당대회 열겠다' 숙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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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NK 2007-12-27 17:57 [北기업소 간부 인터뷰④] “장마당이 기적 창출” -새로운 장마당에 대하여 몇 가지만 더 언급하자. 이전 장마당과 고난의 행군으로 인해 생긴 장마당 간의 차이가 무엇인가? "이전 장마당에 비한 새장마당의 특징은 우선 전민(全民) 참여의 장마당이라는 데 있다. 또한 식량을 비교적 버젓이 내놓고 팔게 된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장마당 전민 참여란 ‘직장 이탈’ 즉 무결(결근)을 의미하는데 이는 조선의 법에 의하면 (노동)단련대행에 속한다. 또한 장마당에 의한 식량구매는 2중 식량공급으로써 국가가 최대 범죄처럼 여겨왔다. 장사꾼들은 이러한 국가의 법에 대항할 정당성을 바로 국가로부터 보장 받아야 했다. 그 허가증이 다름 아닌 ‘미공급’이었다. 국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국가와 장사꾼 사이에 밀고 당기는 과정이 지속되긴 했으나. 수 차례에 걸친 국가의 배급제 회복시도는 (매)번마다 실패했고, 배급제 기관 측이 현재에 와서 일보일보 장마당에 발목을 잠그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시점에서 보면, 관민이 대립 협조하여 배급제를 스스로 해체 되게 만들고 장마당을 전개해가고 있는 셈이다. 그 추동력은 바로 장마당의 우월성, 장마당의 위력에 있다. 내가 말하는 이 ‘새 장마당’을 국가가 구획 지은 종합시장으로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현재의 장마당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공간을 초월하여 그 음성적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현 정책이나 제도로서는 실체를 알아보기 어렵도록 발전 성장한 것이다. 가령 주택매매를 보자. 주택매매는 법적으로 정의하기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매매 이외의 방도는 없다. 국제적 원조물자 배급도 그렇다. 원조물자를 배급함에 있어서 이 장마당을 거치지 않는 방법을 국가는 도저히 확립할 수 없는 게 현 실정이다. 구제하려는 조선사람 하나하나를 외국인이 찾아 다니며 직접 나누어 주지 않는 한 이 장마당의 중개 역할을 배제할 수는 없다. 입당에도 장마당이 침투하였고, 입대, 승진, 졸업, 평양 거주, 간부 배치에도 다 장마당이 개입 되였다. 개인이 중국제 발전발동기를 주문하면 중국에서 곧 수입이 돼 온다. 이제는 “국가가 내(나눠)주고 인민이 타는 공급제(배급제)”로부터 “손님이 사주고 상인이 봉사하는 장마당”으로 변해 사람들이 경제생활의 질적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당과 국가가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모른다. 계획 경제가 못한 기적을 이루어 낸 장마당의 권위는 확고부동하다." -장마당이 국가 배급제 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이미 증명이 됐다. 장마당을 통해 주민들이 얻게 된 구체적인 이익은 무엇인가? 고기 맛이라도 더 보지 않았는가? "장마당이 배급제를 이기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 ‘기적’의 창조가 있다. 물론 파탄 된 배급제를 대신하여 기아에서 인민을 구원한 공적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외의 가시적 공로들도 적지 않은바 몇 가지 만을 꼽아 보기로 하자. 평양 시민은 60년대 초까지 먹어 보고 잊어버렸던 생선 맛을 새 장마당이 생긴 90년대 후반에 와서야 비로서 다시 찾게 됐다. 60년대 후반부터 평양시민들에게 동해의 냉동 수산물을 공급한다던 방침은 70년대에 들어서자 여러 가지 이유로 유야무야 되었다. 80년대에 와서야 평양시민 수산물 공급 방침이 서장과 서창, 두 수산물 직매점을 통한 배정 체계로 줄어든 상태에서 겨우 실현 되었다. 그것도 냉동품에 불과했지만 그러한 물고기 맛을 보는 혜택을 지닌 시민 대표조차도 간부들이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지금 평양의 새 장마당에 가 보면 어제 바다에서 잡은 생물 가재미도 돈만 내면 살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국가가 인민에게 30년간 선전만 하였으나 결실을 맺지 못한 역사적 과제를 ‘고난의 행군’으로 생겨난 새 장마당이 하루 아침에 실현해 낸 기적의 힘은 과연 어디에 원천을 두고 있는가? 간부 전용 공급소나 외국인 전용 상점에만 있었던 남방 과일(귤, 파인애플, 바나나 등)과 외국제품을 장마당은 사시사철 아낌없이 팔고 있다. 물론 이 남방 과일이 전부 중국으로부터 수입돼 들어 온 다는 사실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김일성, 1억달러 숙원 못풀고 죽어 1억 달러만 있으면 상점마다 상품을 쌓아 놓고 조선 노동당 제7차 대회를 하겠다던 김일성은 그 숙원을 이루지 못한 채 사망했다. 바로 그 사망이 하나의 동기가 되여 처절한 고난의 행군이 일어나면서 그 부생물(副生物)로 취급 당하던 장마당이 오히려 숙원을 해결하는 기적을 일으켰던 것이다. 주민들도 왜 국영상점들은 텅텅 빈 채 문을 닫는데 장마당에는 이다지도 희귀한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이는지, 이게 대체 뉘 탓인지 잘 이해되지 않아 했다. 차츰 그 힘의 주인이 자기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가고는 있다. 이제는 일반주민들에게도 결혼 잔칫상, 생일상에 파인애플, 빠나나(바나나) 등 희귀한 과일을 올리는 새 풍습이 생겼다. 제 집에 일제 중고자전거와 중국 텔레비전을 갖추지 못하면 수치가 될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고난의 행군이라는 음영에 대조적인 밝음과 희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80년대, 룡성 요구르트 공장(편집자 주; 수입설비로 건설됨)에서 만들어 중앙 간부들과 그 가족에게만 공급하던 에스키모(아이스크림)는 인민들이 한번은 먹고 싶었던 소원의 식품이었다. 그러나 새 장마당은 이 소원도 단숨에 풀었다. 카카오(막대형 빙과류) 장사라고 하는 장사꾼들은 가동이 중지된 업무용 냉동기들에 제 돈을 투자하는 한편 에스키모 제조 기술을 배웠다. 바닐라 향과 카카오 가루는 밀수꾼과 외화상점으로부터 구입했다. 용기도 송이버섯을 담는 발포 스티롤(스티로폴) 상자로써 에스키모를 넣어도 녹지 않게 준비하였다. 이 에스키모와 카카오 두 종류의 제품은 냉동기에서 나오자마자 차량에 실려 각 도 소재지를 떠났다. 되거리꾼들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며 철도와 도로를 거쳐 자동차로, 자전거로, 등짐으로 속속 운반 돼 조선의 방방곡곡, 심심산촌과 어촌에까지 다 퍼져 나갔다. 이것이 새로운 전국적 장마당 유통체계가 생기면서 중앙당 간부들에게만 공급되던 에스키모를 전민이 일거에 먹도록 한 기적이었다. 또한 개인의 기념촬영은 사진에만 의존하는 것이 오랫동안 유지돼 온 전통적 풍습이었다. 조선에서 비디오 기념촬영은 오직 수령만이 '영화문헌'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었다. 장마당은 이 금기도 깼다. 이제는 일반 사람들도 결혼식과 졸업식은 의례히 비디오로 기념 촬영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대로 되어 버렸다. 심지어 부자들은 자식들의 성장을 기록하는 비디오를 편집하여 착착 보관하고 있다. 전국적 장마당이 없던 15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몇 가지로 간단히 언급하였지만 우리 사회에서 장마당의 권위는 더 이상 허물기 어려운 것으로 되였다. 그것이 인제는 제각기 새 터전을 닦으려고 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현 선군(先軍) 운동은 본질상 전 사회적으로 벌어지는 개인축재 운동이다. 일부에서는 개인축재가 상당량에 달하고 있다. 그 첫째가 단연 김정일이라는 것은 모두다 아는 비밀이다. 더 이상 재분배만 하는 것은 더 이상 긍정적인 사회발전 결과를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 현실이다. 이 개인축재를 생산에 건전하게 투자 가능케 하는 사회적 경제적 개혁만이 시급히 기다려지고 있다." -국가의 경제 정상화가 왜 고초를 겪고 있는가? "국가도 결코 가만히 있은 것은 아니나 경제 정상화는 애를 먹고 있다. 모든 것을 다 설명하자면 복잡하니 가장 중요한 식량문제 하나만 놓고 보자. 공업 기술수준이 낮은 우리나라에서 경제 정상화의 관건적 고리는 노력관리에 있다. 여기서도 노동에 대한 지불, 그 중에도 노임보다는 식량문제 해결에 있다. 이쯤 되면 예측도 분석도 안 되는 악성 인플레이션에 노동력 공급이 과잉인 상황에서 게다가 국제사회와 거의 고립까지 되어 있는 속에 문제 해결에 임해야 하는 국가의 경제정상화 시도가 얼마나 곤란한지를 약간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식량문제는 국내외 공급과 그 분배체계로 갈라 보는 것이 편리하다. 식량생산을 담당한 협동농장체계부터 먼저 보자. 한마디로 협동농장은 파괴적이다. 1962 년 숙천군을 시범단위로 조선에 수립된 새로운 농업지도체제는 중국의 인민공사를 모방한 것이었다. 즉 리 단위로 협동농장을 조직하고 리의 행정과 협동농장의 경영을 일체화 시킨 것이었다. 그 위에 군 협동농장 경영위원회, 도에 도 농촌경리위원회, 중앙에 농업위원회가 들어섰는데 이것은 조선농촌에 형성된 거대 기득권이고 공고한 하나의 이익집단이었다." ※ 림진강 구독신청www.asiapress.org/korea 데일리NK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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