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아비에 팔려가고, 머슴.구걸로 연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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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2008-01-06 13:19 충격인터뷰 탈북자 유명 女가수의 5년 노예생활 풀스토리 우리 사회의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북한이탈주민(이하 탈북자)들. 이들은 가난과 배고픔에 굶주리다 북한을 떠나 같은 민족국가인 한국을 찾고 있지만 탈북자라는 이름하에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으며, 중국 등의 제3국에서는 난민이란 이름으로 인종차별과 성적유린을 당하고 있다. 여성탈북자의 경우 인신매매를 통한 성노리개로 전락하고 있으며, 남성탈북자들은 머슴살이나 구걸을 하며 목숨을 연명해 가는 실정이다. 이들은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도망자 신분이기 때문에 중국 공안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총에 맞아 죽임을 당하거나 붙잡혀 북으로 다시 송환, 감옥에 갇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게 탈북자들의 증언이다. 설령 운이 좋아 한국(또는 제3국)에 입국한다고 해도 경제적 생활고를 겪으며 힘든 타향살이를 감내하고 있다. 조금 더 북쪽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곳에서도 환대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조국과 국제사회는 냉혹한 현실 그 자체이다 . 시사주간지 은 1998년 탈북, 2003년 한국에 입국한 한옥정(29.전 달래음악단 가수)씨를 만나 그녀의 경험담을 토대로 현재 탈북자들이 겪고 있는 인권유린 실상을 들어봤다. "사실 취재 연락을 받고 걱정을 많이 했어요. 제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일들을 또다시 떠올려야 하는 게 두려웠고, 남한사람들이 탈북자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데 저의 말로 인해 더 나쁘게 인식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에요 . 9살인 제 딸애가 엄마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눈치가 보이고요." 지난해 7월 한 방송에서는 머리에 꽃을 꽂고 한복을 차려입은 5인조 여성그룹이 출연, 북한 말씨로 자신들을 '달래음악단'이라고 소개하고 북한 노래 '반갑습니다'와 남측노래 '홍콩아가씨' 등을 부르는 모습이 방영돼 화재를 모았다. 탈북자 여성들로 구성된 달래음악단은 민족성을 살린 이색적인 복장과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북한 고유의 음색으로 남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 그러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무슨 이유에서인지 TV에서 더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 달래음악단 리더였던 한옥정(보컬)씨는 "다는 밝힐 수가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올해 5월 팀이 해체가 됐다"며 "그래도 그때 마음껏 노래하고 전공을 살려 방송을 많이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 아쉬움을 달랬다. 현재 한씨는 솔로앨범을 준비 중이며 아직 소속사를 정하진 않았다고 했다. 한씨는 1978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6살부터 노래를 불렀다. 가창력을 인정받아 극단에서 노래를 부르며 인기를 얻었고 여가수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북한경제가 전체적으로 어려웠지만 하루 한 끼로 연명하는 다른 집에 비해 가정형편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가수 주현미의 노래를 듣고 그때부터 팬이 됐으며, 한국에 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여러 통로를 거쳐 밀수품이 들어 와요. 밀수업자한테서 주현미씨 테이프를 사게 됐는데 창법도 그렇고 노래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그때부터 홀딱 빠졌죠. 밀수품은 암암리에 팔기 때문에 부르는 게 값인데 배는 곯아도 테이프는 빠짐없이 사서 들었어요.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는 불법복제까지 해서 들었죠." 그녀가 탈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중국으로 간 언니를 찾기 위해서였다. 북한에서는 대학을 졸업하면 각 지역별로 집단배치를 시켜 일을 하도록 하는데 그녀의 언니도 공업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집단배치를 받아 쇠돌을 캐고 돌을 나르는 등의 힘든 일을 해야 했다. 150cm의 왜소한 체격을 가진 언니는 체력적으로 너무 힘든 나머지 3년이 됐을 무렵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후 언니로부터 중국에 있다는 말과 '이곳이 북한보다 상황이 나으니까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선전대에서 사회주의를 지키자고 선전했던 한씨는 끝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언니가 탈북했기에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를 데리고 간 브로커(알선책)로부터 "언니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는 연락이 왔고, 어머니는 한씨와 여동생을 데리고 중국으로 갔다. 위험천만한 중국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고 개별적으로 가게 될 경우 가족이 뿔뿔이 흩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함께 찾아 나서기로 한 것이다. 언니를 찾기 위한 중국행이었지만 이들 앞에는 상상치도 못할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서 5년간 노예처럼 살아 브로커의 말만 믿고 중국에 왔지만 언니는 이미 인신매매로 팔려가고 없었고, 한씨와 동생도 인신매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중국에 온 지 이틀만이었어요. 택시를 나눠 타고 가던 중이었는데 앞차에는 엄마가, 뒤차에는 나와 동생이 타고 있었죠. 근데 사거리에서 드라마처럼 길이 엇갈려 버린 거예요. 결국 그렇게 저와 동생은 원치 않는 결혼생활을 해야 했어요." 그녀와 동생은 브로커의 꾐으로 영문도 모른 채 팔려갔고 어머니는 나이가 많아 파출부나 보모 등을 하며 남의집살이를 해야 했다고 한다. 한씨가 어머니를 백방으로 수소문해 빚을 내서 다시 찾았을 때(한 달 후)는 딸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까봐 전전긍긍하며 매일 눈물로 지새운 나머지 어머니의 검은머리가 새 하얘지고 눈두덩이 푹 꺼져 있었다고. 그녀는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하셨으면 그랬겠느냐"며 "지금도 가슴이 아픈 건 엄마 앞에서 딸자식이 팔려 가는 모습을 보여드린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작년 어머니의 눈 수술을 해드렸다고 한다. 한씨는 일부여성탈북자들이 인신매매를 당하고 있다고 했다. 일부남성탈북자들도 평생토록 머슴살이를 하거나 길바닥에서 구걸을 해 목숨을 연명해 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그녀는 "탈북자들이 중국인 집에서 종처럼 일하지만 일한 삯을 제대로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며 "혹여 주인에게 돈을 달라고 하면 주인이 '공안에 신고하겠다'는 등의 협박을 해 할 수 없이 돈을 떼인 채 도망을 치거나 숨어 지낼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저는 북한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자랐어요. 상위급은 못 되도 가수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편안하게 지냈는데 중국에 오면서 인생이 180도 달라졌어요. 중국남자를 만나 낡은 흙집에 살면서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해야 했고 배고프면 맨밥에다 소금을 찍어 먹었죠. 해뜨기 전 새벽 4~5시에 나가서 밤 8~9시에 들어오는 게 일상이었어요. 제 나이 21살에 아이를 낳았는데 봐 줄 사람이 없으니까 그때부터는 아이를 업고 논밭에 나갔죠." 한씨는 아이를 볼 때마다 그 당시 힘들었던 상황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쨍쨍 내리쬐는 햇볕아래서 아이를 업고, 무릎까지 빠지는 논바닥을 걸어다니며 비료를 뿌렸다. 더운 날씨에 지친 아이는 자주 실신을 했고 그럴 때면 아이를 쉬게 하기 위해 논두렁에 눕혀 나뭇가지로 햇볕 가림막을 해주었다. 아이를 논두렁에 눕혀놓고 일할 때가 많았는데 한번은 애가 뒤척이다 논두렁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급히 달려가 겨우 살려낸 일도 있었다. "5년을 꼬박 일을 했어요. 곁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왜 그렇게 사느냐고, 도망치라고 했고 사실 도망칠 기회도 많았어요. 근데 나마저 도망쳐 버리면 돈을 주고 산 중국인들이 탈북 여성들을 안 좋게 여겨 보복(신고)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저처럼 성실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를 악물고 버텼죠." 그러던 중, 중국으로 출장을 왔던 한국사람이 어머니가 파출부로 일하는 집에 머물면서 모녀의 사연을 듣게 됐고 그의 도움으로 중국에 있던 모든 가족이 한국에 올 수 있게 됐다고. 그 사업가는 형편이 어려워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언니를 위해 결혼식을 치를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중국 구경도 시켜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그녀의 가족들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한씨는 "한국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는데 그 사람을 만나면서 한국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국내에 입국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했다. "한국에 가려면 목숨을 걸고 담장을 넘거나 공안 몰래 영사관 안으로 들어가야 해요. 그래서 짐을 나둔 채 영사관에 들어갔는데 그 사이 민박집 주인이 공안에 신고를 한 거예요. 다행히 우리는 위기를 피했지만 그 사람은 브로커로 오해받아 많은 벌금을 낸 후에야 겨우 풀려났어요." 한씨는 많은 탈북자들이 한국에 오고 싶어하지만 영사관 주변 감시가 삼엄하고 위험부담이 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탈북자 신분이라 신분증이 있을 리는 만무하고 말투 가 다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보이면 의심을 한다는 것. 공안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을 때 말을 못 알아듣거나 쉽게 대답을 못하면 탈북자로 간주하고 체포하기 때문에 함부로 거리를 돌아다닐 수도 없다고 했다. 때문에 영사관으로 가다 공안에 붙잡힌 사람도 많고, 국경에서 총에 맞아 죽은 사람, 몽골 쪽으로 망명을 가다 추워서 얼어주는 사람,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 미얀마 메콩 강을 건너다가 악어밥이 된 사람 등 그녀는 이렇게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라고 했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저도 이미 죽었거나 중국에서 숨어 지내며 힘들게 살고 있을지 몰라요. 인생의 큰 행운을 얻은 셈이죠." 경제적 부담 커 유럽행 생각 한씨 일행은 2003년 5월 한국에 입국했다. 하지만 아이는 출생지가 중국이기 때문에 여권문제로 인해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2004년 7월에야 데려올 수 있었다. "아이를 데리러 다시 중국에 갔는데 애를 맡긴 곳에서 돈을 요구했어요. 그래서 아이를 훔쳐오다시피 해서 데리고 나왔어요. 혹시라도 그들이 신고해 공안에 붙잡히면 북한으로 끌려가야 하니까 몇 백 리를 택시를 타고 가서 한참을 숨어 지냈죠. 영사관 주변은 감시가 삼엄하니까 미얀마, 태국 등을 경유해서 어렵사리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어요." 힘들게 찾아온 한국도 그녀에게 낯선 곳이기는 매한가지였다. 한씨는 어렸을 적부터 노래를 불러왔기에 주변의 도움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탈북자 신분의 미모를 갖춘 여가수의 등장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제한된 생활을 해야 했다. 자신이 중국에서 겪은 일(결혼)은 물론 아이가 있다는 사실마저 비밀로 해야했기에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고 그녀는 토로했다. 연예계 데뷔 후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일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아이에게 엄마라고 부르지 말라는 말까지 해야 했다. 경찰에 쫓겨다니는 도망자가 아닌 아이에게 떳떳한 엄마가 되고자 선택했던 한국행이었건만, 아이에게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방송을 시작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사실 그녀는 데뷔하기 전에 '다큐 여자'라는 방송에 아이엄마로 나왔지만 다른 멤버들에게 지장이 될까봐 아이 엄마라는 말을 못했다고 한다. "연예계에 데뷔하면 아이에게 떳떳한 엄마가 될 수 있고 , 가수의 꿈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었어요. 아이도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엄마가 방송 안 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요. 다른 사람들이 저를 북한사람이라고, 탈북자라고 부르는 것도 싫었나봐요. 팀이 해체된 후에는 오히려 딸애와 찜질방도 가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서 너무 좋아요." 한씨는 어머니를 비롯해 언니와 동생까지 모두 무사히 지내고 있음에 안도하면서도 북에 남겨두고 온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토로했다. 그녀는 KTV '가족노래자랑'에 동생과 함께 출연해 "아버지가 방송을 보시면 꼭 한국에 찾아오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고, 때마침 중국에 나와 있던 아버지 친구가 방송을 보고 이를 아버지에게 전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녀는 "친척으로부터 아버지가 중국 북경에 있는 한국영사관으로 가던 도중에 공안에 붙잡혀 북한으로 송환된 후 정치범 수용소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회한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감옥에 있다고도 하고 돌아가셨다고도 하고 소문만 무성할 뿐 아버지의 생사여부를 알 수가 없어요. 탈북자 문제는 예민한 사항이라 북한에서도 철저하게 비밀로 해요. 브로커가 '아버지가 어느 수용소에 있는지 파악했다며 돈만 주면 구할 수도 있다'는 말을 했지만 수천만원이 넘는 거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도조차 못하고 있어요." 그녀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죄인 것만 같다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자기만 먹고살겠다고 아무 것도 못하는 내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라고 아픈 속내를 드러냈다. 단지 북쪽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고 했다. "먹고살기 힘드니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한국으로, 유럽으로 가고 있어요. 솔직히 배고프지 않다면 누가 고향을 버리겠어요. 나도 지금이라도 북한에서 죄를 묻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경제상황이 나아진다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한씨는 한국에 정착한 지 4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이곳이 낯선 이국 땅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이제까지 살아온 환경이 너무 다르고 '탈북자'를 다르게 보는 시각이 아직도 존재하기 때문에 직장을 얻는 것도, 자식을 키우는 것도 장애가 많다는 것. 특히, 사교육비 부담이 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다고 호소했다. 그녀도 다른 엄마들처럼 자녀교육 문제가 가장 큰 고민이다. 현재 기본 과목인 국영수를 비롯해 피아노 학원을 보내고 있지만 고정적인 수입이 없다보니 다달이 들어가는 7만~8만원 가량의 학원비(한 과목 당)를 내고 나면 집안 살림이 빠듯하다. 정부에서 준 임대아파트에서 지내고는 있지만 임대비와 관리비, 각종 공과금, 식대비 등 한 달 150만원 이상이 지출되고 있어 다니던 서울예술대학도 휴학하고 일을 알아보면서 생계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녀는 가끔 TV나 라디오에 출연해 받는 돈과 아르바이트 명목으로 받는 공연비, 초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 통일교육에 대한 시간강사로 활동하며 받는 돈만으로는 교육비를 대기도 버겁다고 말했다. "현재 탈북자에게 지원되는 보조금(정착비, 기초생활수급자 6개월 지급)만으로는 생활유지가 어려워요. 탈북자들이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언어와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독립된 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어요. 탈북자들이 정착하기까지 기간을 늘려주고, 아이가 있는 경우 교육비를 감면해 주는 제도를 마련해 주었으면 합니다." 신분보호, 직업선택자유 보장돼야 탈북자들에 대한 한국사회의 차별과 냉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옥정씨는 경제적 부담과 더불어 탈북자에 대한 차별적 시각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특히 탈북자들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22XX로 통일시켜놨기 때문에 주민번호만 보면 그 사람이 탈북자인지 아닌지를 알게 된다는 것. 때문에 직업선택에서도 탈북자들은 3D업종 등의 비정규직 외에는 달리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고 했다. 실제로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1만여 명 가운데 50% 가량이 제조업 분야의 단순노무직에 종사하고 있다. 적성에 맞는 일을 하고 싶어도 전문기술이 부족하고 교육기회도 매우 적은 실정이다. 그녀는 "탈북자들이 적응을 못하는 측면도 있지만 사람들에게는 '탈북자'라는 이유가 더 큰 문제인 것 같다"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동사무소에 갔는데 아이 주민등록번호를 보더니 그 직원이 '너두 탈북자니'라고 물어봐요. 아이는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모르니까 저한테 탈북자가 뭐냐고 물어보고요. 저는 그렇다 하더라도 내 아이가 탈북자라고 따돌림 받고 평생 차별 속에서 살아야 할 걸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그녀는 아이가 행여 탈북자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을 것이 우려돼 아이가 한국에 들어왔던 6살부터 혹독하게 컴퓨터를 비롯해 한국어 교육을 시켰다고 말했다. "저는 아이를 생각해서 그랬는데 하루는 아이가 너무 잠이 오니까 자기 팔을 꽉 물어버린 거예요. 시커멓게 멍든 것을 보고 내가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회한이 들더군요. 그런 피나는 노력 덕분에 반에서 3, 4 등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해요." 그녀는 "이곳에서 탈북자라고 취급을 받는 거나 다른 나라에서 난민으로 취급을 받는 거은 차별받는 것 똑같기 때문에 유럽으로 갈 생각도 했다”고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한국에서는 신분노출문제도 있고, 사교육비 부담이 크기 때문에 차라리 사회보장제도가 잘된 유럽에 가면 경제적 부담은 덜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다른 탈북자들도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한씨는 탈북자에 대한 언론보도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탈북자들이 어떤 상황에 직면해 있고,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 사실 그대로를 보여줘야 하지만 단순히 탈북자들이 못사는 것에 대해서만 보도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북한 살 만하네, 근데 왜 탈북자가 생기느냐"고 묻기도 하고, 혹자들은 "땅도 좁고 우리들도 먹고살기 힘든데 왜 너네들까지 와서 더 힘들게 하느냐"고 말해 탈북자들이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실향민들과 비교하며 "그들은 빈 주머니로 와서도 잘살았는데 너희들은 적응도 못하고 불평만 한다"는 비난을 쏟고 있다는 것. 그녀는 "탈북자들이 나 하나 잘살자고 한국에 오는 게 아니다"며 "한국에서 번 돈의 상당수가 북한에 있는 가족과 친척들에게 보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탈북자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번 돈의 일부를 중국에 있는 현지브로커(돈 전달자) 계좌로 송금하고, 브로커는 30%의 수수료를 떼고 나머지 70%를 북한에 있는 친척에게 보내주고 있다는 것. 그녀는 한국이 북한에 지원하는 식량과 물자에 대해 "고위관료들에게 돌아갈 뿐 일반 서민들은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때문에 북한에서 배고픔으로 굶주리고 있을 친척들을 위해 계속 돈을 보낼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했다. 그녀는 "브로커들 중에는 괜찮은 사람도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지금처럼 돈도 북한으로 송금할 수 있으니까요. 브로커들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그 사람들이 없으면 북한 사람들은 다 굶어 죽어요." 그녀는 "탈북자들도 정말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다"며 "돈을 달라고 하는 게 아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면 우리들도 떳떳하게 잘살 수 있다. 그리고 우리도 잘살려고 왔기에 지금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라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또한 한국민들도 '탈북자'라고 따로 구분 짓거나 배척하지 말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줬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임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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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고 꾸밈없는 이야기가 저를 울립니다.
옥정씨에게도 쓰라린고통이 잇는줄은 몰랏네요.. 물론 탈북자 모든분들이 말이죠.. 사회보장제도 가 많이 개선되고 차별없는 사회가 빨리오길빕니다
한국민들도 못하면 차별받는마당에 탈북자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억압당하고.. 이건 정말 생각만해도 끔직합니다... 하지만.. .이건알아두세요...한국에와서 사는건 어렵지만... 노력만하면 된다고생각합니다... 문화에 빨리적응하고 교육원에서 좀더 오랜기간동안 문화를 습득하고 보내줫음합니다... 그리고 탈북자가족들에게 큰 혜택이나 보장 등 많이잇으면 합니다...한국도 같은 나라입니다.. 유럽이나 아메리카는 큰 문화차이나 말도안통하고 더힘듭니다.. 한국.. 어렵다고 생각하지마세요 " 별것아닙니다" 노력만하시면 정말 살기좋은나라가 한국입니다!! " 모든 탈북자분들 힘내시고 화이팅입니다 " !!
그럼 아이는 하프 중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