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살 새터민의 쌉싸래한 설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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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8-01-28 15:21 박기성 기자 = 경기도 안산의 탈북 청소년 지원시설 '다리공동체'에 사는 김준호(22.가명) 씨는 함경북도 무산이 고향인 탈북 새터민이다. 열흘 뒤면 남한에 정착하고 여섯 번째 설을 맞는다. 재외국민 특례 케이스로 대학에 합격해 한 달여 뒤부터 시작될 대학생활 준비에 바쁜 그를 28일 공동체 사무실에서 만났다. "북한에서는 음력 설을 쇠지 않고 양력 1월 1일이 명절이예요. 날짜만 다르지 분위기와 풍습은 여기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명절이 되면 관청에서 아이들에게 과자를 선물하고 집집마다 쌀을 배급한다. 모처럼 명절 음식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 아이들은 마을을 돌며 이웃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는다. 자녀를 앞세우고 담임 선생님 집을 찾아 인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준호 씨의 기억 속에는 어린 시절 이렇게 보냈던 고향의 명절 풍경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설은 그에게 이런 아릿한 추억과 함께 중국과의 국경을 넘나들던 꽃제비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설 음식을 준비할 형편이 안돼 낙심하고 있던 부모님을 위해 처음 국경을 넘게 됐기 때문이다. "세는 나이로 열세 살 되던 해 끼니를 걸러야 할 정도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네 살 위인 누나랑 둘이 처음으로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설을 닷새 앞둔, 그러니까 1997년 12월 27일의 일을 준호 씨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둘은 그날 밤 국경을 지키는 경비대원들의 눈을 피해 한 길 이상 깊이로 꽁꽁 언 두만강을 가로질러 중국 땅을 밟았다. 거기서 며칠 동안 집집이 다니며 구걸한 쌀을 가지고 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처음 하는 일이라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설 정도로 겁이 몹시 났지만 무사히 돌아오고 나니 다시 갈 수도 있겠다는 용기가 싹텄다. 준호 씨의 꽃제비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후 넉달 사이 세 차례나 더 국경을 넘나들었고 한 번은 경비대에 붙들려 꽃제비 수용소에 수감됐다 사흘 만에 도망치기도 했다. 네 번째 중국으로 건너갔을 때 아예 그 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영양실조와 지병으로 고생하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수용소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내린 결정이었다. "누이 둘은 일찌감치 중국으로 팔려 갔고 바로 위 누이도 중국으로 돈 벌러 간 뒤로 소식이 끊겨 고향에는 이제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의 눈가가 이내 붉어졌다. 준호 씨는 중국의 접경지역에서 구걸로 연명하는 꽃제비치고는 매우 운이 좋았다. 그 곳에서 오래지 않아 미국 국적의 한국계 선교사 부부를 만났고 4년 간 함께 지내다 이들의 주선으로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중국에 있는 동안 이 부부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중국어를 배워 둔 것이 이번에 대학을 진학하는 데도 힘이 됐다. 그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할 예정이다. 준호 씨는 대학생이 되는 것이 즐겁기만 하지는 않다고 했다. 무엇보다 서울 근교의 임대아파트로 분가해 나가 혼자 지낼 일이 걱정이다. 그는 "설 명절 전에 나가려고 지난 주말에 이사 갈 집 청소를 마쳤다"면서 "공동체 식구들과의 이별이 두렵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5년여동안 정들었던 다리공동체와 때론 형처럼 때론 아버지처럼 의지했던 그 곳 사무국장 마석훈 선생을 될 수 있으면 찾지 않겠다고 했다. "새로 맞게 될 환경, 새로 맺게 될 사람들과의 관계에 충실해지기 위해서 그러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지만 앞으로는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갈 겁니다" 마 국장은 "속만 썩이던 녀석을 안 보게 돼서 속이 시원하다"고 했지만 이별을 앞둔 착찹함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는 "딸 자식을 시집보내는 마음이 이런 걸 것"이라면서 "잘 자라 준 준호가 대견스럽다"고 했다. jeansa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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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열심이 대학공부를 마치고 남한땅에서 성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