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천국의 국경을 넘다' 4부작으로 제작·방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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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8-03-03 03:30 [크로스미디어]천국의 국경을 넘다 탈북 10년 보고서 "신문·방송 겸영 허가된 일본에서도 시도 못한 도전" ●세계로 확대되는 크로스미디어 세계 주요방송사들, 편성놓고 본지와 협의 진행 "소외됐던 탈북자 인권 정면으로 다뤄 기대 커" 美방송 PD는 "믿기 힘든 작품… 에미상 자격" 조선일보가 제작한 방송물이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에 방송된다. '글로벌 크로스미디어(Global Cross-media)기획'이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지역 민영TV 연합과 손잡고 크로스미디어기획 '아워아시아(Our Asia)'를 두 차례에 걸쳐 선보였다. 크로스미디어 기획은 신문, 방송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한 가지 보도물을 동시에 내보내는 뉴스 서비스다. 이제 크로스미디어 기획은 전 세계 주요 방송사와 손잡고 국내를 넘어 세계로 확대됐다. 글로벌 크로스미디어 기획에 동참한 해외 방송사의 면면은 화려하다. 아시아권은 일본 민영방송인 TBS, 그 외 전 지역은 영국 BBC가 'On The Border(국경에서)'를 독점 방영한다. 독점 기간은 오는 5월까지다. 이밖에도 세계 주요 방송사들이 'On The Border' 편성을 놓고 본지와 추가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10년 동안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는 탈북자 문제를 다루기 위해 지난해 5월 특별취재팀을 구성했다. 탈북자라는 세계적인 관심사에 대한 심층취재는 BBC를 비롯한 해외 유수 방송사들의 관심으로 이어져 이번 글로벌 크로스미디어 기획이 성사됐다. 고화질(HD) 촬영분은 모두 250시간이다. 이 영상을 4시간으로 압축한 것이 다큐멘터리 '천국의 국경을 넘다'. 이 작품은 해외에는 'On The Border'라는 제목으로 방송된다. 메리 윌킨슨(Wilkinson) BBC World 에디터는 "강력한(powerful) 다큐멘터리가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미국의 한 방송국 프로듀서는 "믿기 힘든(unbelievable) 이 작품은 에미상(Emmy Award)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이 방송사와는 공동 취재를 협의 중이다. 3일 '뉴스23', '이브닝5'를 통해 보도를 시작하는 일본 TBS는 크로스미디어 방식의 기획취재를 자사에 도입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본지를 방문한 가네히라 시게노리(金平茂紀) 보도국장 겸 이사는 "신문과 방송의 겸영이 허가된 일본에서도 시도하지 못한 창의적인 도전"이라고 평가했다. 구보(久保雄一) '뉴스 23' 기자는 "일본 신문과 크로스미디어 기획을 진행하는 걸 내부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내 독자와 시청자는 신문은 물론 지역 민영TV, 케이블TV, 위성TV, 인터넷, DVD 등 다양한 창구를 통해 '천국의 국경을 넘다'를 만나게 된다. 지역 민영TV는 강원민방(GTB), 대구방송(TBC), 제주방송(JIBS), 청주방송(CJB·가나다 순) 등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에서 방송된다. [크로스미디어]천국의 국경을 넘다 탈북 10년 보고서 탈북자 특별다큐멘터리 '천국의 국경을 넘다'는 모두 4부작으로 제작됐다. 제목 '천국의 국경'은 북한 정부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명칭 '지상천국' '지상낙원'에서 따왔다. 1부는 '국경에 서다'라는 제목으로 탈북 사태 10년을 맞은 중국-북한 국경지대의 전반적인 모습을 담았다. 2부 제목은 '유령이 된 아이들'. 이러저러한 이유로 중국에 살게 된 탈북 여성들의 자녀들 이야기를 다뤘다. 불법체류자 신분인 엄마 때문에 그 자녀들 또한 무국적, 불법체류자다. 이로 인해 각종 법적 보호는 물론 의료, 교육 혜택에서 소외돼 있는 아이들을 다뤘다. 3부는 '죽음보다 긴 여행 1만㎞'. 세계 언론 최초로 탈북자들을 동행해 중국에서 라오스, 태국으로 이어지는 탈중 루트의 동행취재기다. 끝으로 4부는 세계 최초로 취재에 성공한 러시아 시베리아 제16벌목소 잠입 르포다. 벌목소를 탈출했던 한 탈북자를 따라 '범의 아가리' 속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천국의 국경을 넘다' 4편은 국내에는 지역 민방과 케이블TV를 통해 방송되고, BBC와 TBS는 자체 편집을 통해 보도한다. 10개월간 중·러시아·태국 등 9개국 2만㎞ 누벼 ●취재과정 비화 조선일보 특별취재팀은 지난해 5월부터 10개월 동안 한국은 물론 중국, 러시아, 라오스, 태국, 일본 등 세계 9개국을 이동하며 탈북자 인권문제를 취재했다. 장장 2만㎞의 여정이었다. 중국 톈진(天津), 2007년 5월 28일. 본격적인 취재가 시작된 날이다. 공항에서부터 공안이 따라붙었다. 잦은 국경 출입 때문이다. 미행은 공안과 국경수비대가 번갈아 맡았다. 공안이 경고했다. "주시하고 있으니까 조심하시오." 우리는 아예 국경마을에 살기로 했다. 몇 달간 생활이 계속되자 미행이 뜸해졌다. 그 와중에 강 너머 북한마을을 촬영하다 국경수비대에 끌려갔다. 간첩 혐의라고 했다. 이후로도 두 번을 더 잡혔다. 캠코더를 버리고 테이프만 들고 도망쳤다. 오랜 취재기간 동안 안면을 튼 마을 주민들이 우리를 구해줬다. 중국과 라오스의 국경, 2007년 8월 20일. 취재팀은 탈북자라고 신분을 속였다. 금방 길 안내인이 신분을 눈치챘다. 그는 거절했다.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위험해." 그를 찾아갔다. 가슴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당신을 속인 것은 사과한다. 나는 한국 기자다. 내 민족의 비극을 내 눈으로 보고 싶다." 그는 동행을 허락했다. 다음날 우리는 국경을 넘었다. 16시간의 산길. 누런 메콩강 물을 떠서 마셨다. 긴장 속에 중-라오스 국경을 넘은 취재팀은 라오스에 대기 중이던 2차 취재팀에게 촬영테이프와 장비를 넘기고 산길을 거슬러 중국으로 돌아갔다. 라오스 입국비자가 없는 취재진도 불법입국자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숲속 거머리들이 달라붙어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중국쪽을 담당했던 취재팀은 쉴 틈도 없이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모두 여섯 번에 걸쳐 이 일대에서 밀입국을 해야 했다. 나중에 토머스 오닐(O'Neill) 내셔널지오그래픽 기자가 말했다. "정말 미쳤구나!" 러시아 므르뜨깃, 2007년 11월 3일. 우리는 시베리아의 북한 벌목소를 찾아갔다. 길 안내를 맡은 탈북자가 만류했다. "한국인이 들어가면 당장 들통이 날 거라고. 잡히면 빠져나올 방법이 없어." 우리는 벌목공 숙소까지 들어갔다. 러시아 택시기사가 앞장섰다. 내부를 모두 몰래 촬영하는데, 낌새를 챈 당 간부가 손가락질을 했다. "도망가자." 우리는 정신없이 달아났다. 중국 국경마을, 2007년 11월 21일. 두 번째 인신매매 촬영에 성공했다. 국경생활에 익숙한 우리는 별 긴장감이 없었다. 그런데 길 안내인이 말했다. 며칠 전 북한 인신매매 브로커가 중국인을 국경에서 칼로 찔렀다는 것이다. 중국인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여자 가격을 흥정하다 벌어진 일이었다. 영국 런던, 2008년 2월 3일. BBC 본사에서 협상을 진행 중이다. 담당 기자가 촬영 영상을 믿지 못한다. 취재팀이 말했다. "목숨을 걸고 취재한 내용이다. 일말의 거짓도 없다." 현장에서 매일 쓴 일기를 보여줬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반드시 편성을 하겠어, 이건 우리한테도 대단한 영광이야." "스물다섯 살은 5000위안(약 68만원), 깎을거면 다른데 가" (1) 팔려가는 '조선의 딸들' 취재팀이 윤희씨를 만난 곳은 중국 투먼(圖們) 근처 두만강변, 보름을 사흘 앞둔 새벽이었다. 갈대밭이 비명을 질렀다. 강은 바람과 달빛으로 일렁였다. 쏟아지는 달빛에도 강 건너 마을은 어둠에 잠겨 있다. 중국·북한 국경수비대의 감시를 피해 덤불 속에 몸을 숨긴 지 네 시간. 희끄무레한 물체 두 개가 강 너머 갈대밭을 뚫고 강물에 들어섰다. 하나는 앞에 서고 다른 하나는 뒤에 섰다. 벌거벗은 사람이다. 적외선 렌즈 녹색 화면 속으로 사람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아랫도리를 모두 벗은 한 남자와 팬티만 입은 여자. 벌거벗은 남녀가 강을 건너고 있다. 야윈 다리가 출렁이는 강물을 힘겹게 헤쳤다. 남자는 뒤따르는 여자 손목을 이끌고 앞장서 걷는다. 어느새 강물은 허리까지 차올랐다. 강물을 바라보던 여자가 갑자기 제자리에 섰다. 현기증이 난 모양이다. 남자가 주위를 잽싸게 둘러봤다. 손에 힘을 주고 여자를 세차게 당겼다. 불과 40m의 강을 건너는 데 10분이 넘게 걸렸다. 남자는 북한의 인신매매 브로커, 여자는 그의 '상품'이다. 국경을 넘은 그들은 온몸을 떨었다. 서둘러 손에 들고 온 옷을 입었다. 왜 옷을 벗고 왔을까. "물에 젖으면 안 되니까." 브로커는 곧 북한으로 돌아가야 한다. 옷이 젖으면 의심을 받을 게 분명했다. 여자도 옷이 젖으면 당장 중국에서 갈아입을 옷이 없다. 그들이 벌거벗은 이유다. "이름이 뭐예요?" "문윤흽니다, 문윤희." 여자가 덜덜 떨며 말했다. 나이는 스물다섯이다. "스물다섯인데 5000원은 줘야지." 중국 돈 5000위안은 한국 돈으로 약 68만원이다. 가격을 흥정하려 하자 그가 버럭 화를 냈다. "스무 살부터 스물넷까지는 7000원, 서른이 넘으면 3000원이야. 깎을 거면 다른 데로 가란 말이오." 그는 정액제를 강조했다. 윤희씨가 보자기를 끌러 옷을 입고 신발을 신는 동안 누군가가 브로커에게 돈을 건넸다. 국내 탈북지원단체 두리하나선교회에서 온 사람이다. 이 단체는 여자를 사려는 중국인들 대신에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여자들을 탈출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브로커가 돈다발을 셌다. 5000위안. 굶주림을 피한 대신, 스물다섯 살 처녀가 씨받이와 품앗이로 평생을 보내야 할 대가가 한국 돈으로 68만원이다. 북한 한 달 월급의 30배. 이 가운데 윤희씨네 곡식 빚의 절반, 4만6000원을 빼고 전액이 브로커에게 돌아간다. 브로커가 흡족하게 웃으며 한마디 던진다. "잘 돌봐주오." 지켜보던 취재팀 누군가가 내뱉었다. "뭐, 잘 돌봐달라고?" 다음날 은신처에서 윤희씨를 만났다. 그녀는 이미 탈북을 한 번, 강제북송을 한 번 경험한 여자였다. "내가 직접 브로커한테 가서 팔아달라고 했어요. 빌린 곡식이 300㎏인데, 갚을 방법이 없었어요. 브로커가 빚 절반을 갚아준대서리…. 그 남자는 같은 동네 사람이요. 집도 중국 집처럼 부자고, 밭도 있고 소파랑 TV, 냉장고도 있어요. 군대도, 보위부도 그 사람이 여자 파는 거 다 알아요." 그런데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다. 왜? "돈이 있는데, 왜 처벌 받겠습니까?" 그날 아침, 윤희씨는 브로커 뒤를 따라 집을 나섰다. 점심을 먹고 강변 야산에 들어가 둘이서 숨어 있었다. 새벽이 되자 "산 아래 북한쪽 군대에서 불빛 신호가 왔다"고 했다. 그리고 달빛에 의지해, 옷을 벗고, 강을 건너 중국 땅을 밟았다. 이번이 두번째다. "이천공육(2006)년도에 처음 팔렸습니다. 산둥성에 서른넷 먹은 한족(漢族) 남자한테 팔려갔는데 6개월 지나니까 어느 날 밤 12시에 공안이 왔습디다. 어떻게 나를 잡아가나 하고 물으니까, 동네 사람이 꼬장질(신고)해서 그리했다는 겁니다." 윤희씨는 곧바로 중국 단둥 교도소에 갇힌 뒤 두 사람씩 수갑에 엮여 신의주로 압송됐다. 북한 보위부에서 보낸 한 달, 그녀는 몸을 떨며 이렇게 증언했다. "성병을 검사한다면서 피를 한 바가지 뽑았다. 여자들은 옷을 모두 벗기고 고무장갑 낀 손으로 성기 속까지 조사했다. 앉았다 일어섰다를 20번 정도 반복하면 안에 있는 게 모두 나온다. 임산부도 있었는데 중국 놈 아이를 가졌다고 강제 유산시켰다. 사람 먹으라고 강냉이 밥이랑 찬 하나가 나왔는데, 한 번 먹고선 중국 감옥에서 먹던 밥이 그리워지더라." 윤희씨는 함북 청진에 있는 탈북자 집단수용소로 끌려가 하루 17시간씩 강제노동을 하다가 풀려났다. 그리고 몇 달 만에 윤희씨는 또다시 브로커에게 몸을 맡겼다. 두리하나선교회 사람이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당신을 한족에게 팔아먹으려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한국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그녀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나 맨 처음에 사 간 한족 남자한테 돌아갈랍니다. 한족이랑 배불리 살면서 돈도 모아서 고향에 있는 가족들한테 보낼랍니다." 그녀는 한국행을 거부했다. 고향에 남은 눈먼 노모(老母)와 남동생을 위해, 그녀는 중국에 남기로 했다. 두리하나선교회는 그녀에게 겨울 옷가지 몇 점을 사주고, 안녕을 빌고, 그녀와 작별했다. 문윤희. 그녀는 지난 10개월 동안 취재팀이 만난 인신매매의 피해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했다. 2008년 1월, 취재팀은 중국 투먼(圖們)의 두만강변에서 얼어 죽은 북한 여성 시신 하나를 발견했다. 신발도 없이 발싸개로 발을 싸매고, 얼어붙은 두만강 한가운데에 엎드려 죽어 있었다. 3월 2일 현재까지 두 달이 지나도록 그녀는 아무도 거두는 사람 없이 외롭게 강에 엎드려 있다. 현지 조선족은 "북한 식량난 이후 10년 만에 처음 보는 시신"이라며 "형색을 볼 때 혼자서 탈북하려다 돌부리에 걸려 죽은 여자가 틀림없다"고 추측했다. 2008년 중국-북한 국경지대. 살아 있는 여자의 인신매매 시장이 수시로 열리고 죽은 여자의 시신은 아무도 거두지 않는다. 중국 등 제3국에 탈북자 4만명… 인권유린 처참 1990년대 초반까지 탈북자들에게 붙은 명칭은 '귀순용사'였다. 미그기를 타고 넘어온 '이웅평'(작고)으로 상징되는 귀순용사는 한국 정부에 의미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체제 우위를 선전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됐다. 1990년대 후반, 북한에 대기근이 몰아닥쳤다. 북한 정부가 '고난의 행군'으로 표현하는 식량난 시대에 300만명(추정)이 넘는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중국-북한 국경지대에 탈북 사태(沙汰)가 벌어진 것은 이 무렵이다. 국경수비대의 삼엄한 경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국경을 넘은 것이다. 그 이후 10년. 식량난은 완화됐지만, 탈북자 행렬은 끊이지 않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 들어온 탈북자들은 1만명을 넘어섰고, 중국을 비롯한 제3국에 체류 중인 탈북자는 4만명(추정)에 달한다. 재중(在中) 탈북자들은 공식적으로 불법입국자들이다.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발각될 경우 북한으로 강제송환되는 신분이다.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해, 동북아시아에 유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귀순용사'는 이제 '탈북자'에서 나아가 "먹고 살 궁리로 새 땅을 찾은" '새터민'으로까지 불리게 됐다. 중국도 북한도 한국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이에 제3국, 특히 중국에 체류 중인 탈북자들의 인권은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있다. 탈북 사태 10년을 맞아 조선일보 특별취재팀이 탈북자들에 대한 보고서를 내놓는 이유다. "한국행 비자 얻으려고 북여자 샀다" 중국의 40대 조선족 윤희씨를 한족(漢族)에게 떠나 보내고서 정확하게 한 달 뒤. 취재팀은 손미영(가명·여·41)씨를 만났다. 미영씨는 조선족 사내 이호영(가명·45)씨가 4000위안(52만7000원)을 주고 산 여자다. 이유가 놀라웠다. 그는 미영씨를 '대한민국행 비자를 얻기 위한' 도구로 구입한 것이다. "북한 여자가 남한에 가면 한국 사람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면 결혼비자로 한국에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다." 2007년 11월 21일 밤 40대 여자 브로커 손을 잡고 미영씨가 두만강을 건넜다. 칼바람이 불었지만 아랫도리는 맨살이었다. 다음날 호영씨 집에서 미영씨를 함께 만났다. 그녀 아버지는 "중국이 조선보다 낫다"고 했다가 어디론가 끌려갔다. 평양에 살던 가족은 모두 함북으로 쫓겨났다. 언니 가족은 예전에 탈북했다가 중국 국경수비대에 잡혀 북송됐고, 형부는 6개월 고문 끝에 죽었다고 했다. "나랑 한국 가서 돈 벌고 삽시다." 호영씨가 말을 꺼냈다. 여자는 단칼에 거절했다. "중국에 혼자 남은 어린 조카를 꼭 찾아서 돌보기 위해 이번에 강을 넘었습니다. 고아가 된 조카에겐 유일한 혈육이지 않소. 꼭 찾아서 내가 언니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무슨 남한에 가겠습니까? 내가 거기 가서 뭐 하겠습니까?" 취재팀 눈치를 보던 그녀가 느닷없이 큰 소리로 울었다. "모르는 줄 아십니까. 당신들 특무 아닙니까, 중국 나온 동포들 잡아넣는 특무." 그녀는 취재팀을 비밀경찰로 알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 한국 보내주겠다' 해서 기자회견시킨 다음에 달랑 잡아서 끌고 갈 거 아닙니까." 여자가 울부짖었다. "나는 주머니에다 독약을 넣고 다니면서 그 자리에서 먹고 죽겠습니다." 열흘 뒤 미영씨는 호영씨 집에서 도망가 버렸다. 사내는 화가 잔뜩 났다. "북조선 사람은 다 이렇단 말이야. 짐승도 이렇게 배신을 하진 않는단 말입니다." 남자는 한국으로 가는 인간 티켓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자가 중얼거렸다. "이제 곧 26살짜리 처녀가 넘어올 겝니다. 때려서라도 한국으로 보낼 거란 말입니다." 굶어 죽어가는 가족 위해 4만6000원에 중국으로 '조선의 딸들'이 팔려간다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대 두만강. 2007년 10월 22일 새벽, 하얗게 뜬 달빛을 받으며 문윤희(당시 25세·가명)씨가 강을 넘었다. 낯선 사내 손에 이끌려, 폭 40m도 되지 않는 검푸른 강을 건넌다. 그녀는 팔려가는 길이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중국 농촌 노총각한테 씨받이로 팔려가는 길이다. 사내는 북한의 인신매매 브로커. 매서운 강바람에 갈대가 비명을 지르는데 중국쪽 강둑에 올라선 그들, 아랫도리에 입고 있는 옷은 팬티뿐이다. 바지와 신발은 보자기에 들어 있다. 야밤에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강 건넌 탈북자임이 금방 드러난다. 두만강을 건너는 사람들, 그래서 아랫도리는 입지 않는다. 브로커는 강을 건너 북한으로 돌아갔고, 은신처로 안내된 그녀에게 물었다. "왜 넘어왔어요?" 윤희씨가 대답했다. "아버지는 미공급(未供給·1990년대 후반 식량난 시절) 때 상(喪)하고, 어머니는 못 먹어서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꿔다먹은 '강냉이, 콩, 쌀' 같은 곡식 빚이 300㎏이라고 했다. 심청이처럼, 눈 먼 어머니와 남동생을 위해 그녀가 팔려간다. 브로커는 몸값으로 곡식 빚 절반을 갚아줬다. 350위안. 한국 돈 4만6000원에 '조선의 딸들'이 팔려간다. 중국~북한 국경지대 인신매매 현장이 조선일보 특별취재팀에 의해 확인됐다. 1990년대 후반 북한의 식량난 이후 급증한 탈북 사태(沙汰)가 인신매매라는 반(反)인권적인 형식으로 악화됐음이 확인된 것이다. 특별취재팀은 2007년 5월부터 10개월 동안 중국, 러시아, 라오스, 태국 등 세계 9개국을 돌아다니며 탈북자들의 삶을 취재했다. 한국, 북한, 그리고 중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이들은 강제북송의 공포와 가난이라는 현실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세계가 중국 정부에 탈북자의 인권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왜 세계가 그토록 탈북자들의 인권에 주목하는지, 그 이유를 조선일보가 집중보도한다. 탈북자 도우려면 오늘도 두만강을 넘어 조선의 딸들이 팔려간다. 많은 이들이 중국의 윤락가 혹은 농촌으로 끌려간다. 남자의 성적(性的) 노리개로 살아야 한다. 농촌의 씨받이로 지내야 하는 것이다. 팔려온 여성을 빼내려면 상당한 지원금이 필요하다. 은신처를 마련하고 이들에게 음식과 옷을 제공해야 한다. 한국 등 제3국으로의 탈출 기회도 제공해야 한다. 팔려온 여성들에게 희망이 필요하다. 지원을 원하는 독자는 탈북지원단체 두리하나선교회를 방문하면 된다. 전화 한 통으로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문의전화: 1577-9121 홈페이지 http://blog.chosun.com/ontheb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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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사람들에게 알려 중국에서 난민으로 인정을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좀더 많은 사람들이 한국으로 오는길을 만들어줘야합니다..
TV -> 특집/다큐멘터리 -> 특집 에 들어가면 볼수있습니다. 현재 1.2부만 시청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