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국군포로 '내 이름은 똥간나' 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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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8-04-18 09:17 신유리 기자 = "총구가 가슴을 겨누고, 굴속으로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열을 맞춰야 하고, 계획(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밤 12시까지 비판서을 쓰고 나서야 '하루 더 살았구나'하는 안도의 숨을 쉰다. 그리고 다시 차디찬 수용소 잠자리로..." 21살 때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붙잡혀 북한에서 반세기가까이 보낸 국군포로 허재석(78)씨. 그는 꿈에 그리던 가족을 만나기 위해 69살 나이에 탈북해 남한에 들어왔지만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은 47년 만에 돌아온 셋째 아들을 반겨주지 못했다. 허씨는 "죽기 전에 북한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6.25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한으로 송환되지 못한 채 북한 탄광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된 국군포로들의 간난, 1990년대 북한 주민들이 겪었던 식량난 등을 담은 380쪽 분량의 수기 '내 이름은 똥간나 새끼였다'를 펴냈다. 1932년 경상남도 진양군에서 태어난 허씨는 1952년 징집돼 참전했다가 1953년 강원도 금성 전투에서 부상해 북한군에 붙잡힌 뒤 포로교환 때도 남한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1956년까지 함경북도 아오지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 허씨는 책에서 "당시 아오지 탄광에는 500명정도의 포로들이 있었다"면서 "아오지 탄광은 메탄가스가 제일 많은 탄광으로, 한번 폭발사고가 나면 굴속에서 작업하는 모든 사람들이 죽음으로 가는 곳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죽음의 굴속으로 들어갈 때는 이번에 들어가면 영영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리가 후들거렸다"면서 "8시간 내내 쉬지 않고 계속 담아 날라야 하루 실적인 8t을 겨우 달성할 수 있었다"며 "지옥과 같던" 당시를 떠올렸다. 허씨는 1956년 6월 북한 당국이 '내각 결정 143호'를 내려 약 450명의 국군포로에게 공민증을 발급한 데 따라 사회로 나와 가정을 꾸렸다. "북한에서는 일반 노동자들의 경우 식구가 5명 이상될 경우 2칸짜리 방을 줬지만, 국군포로인 나는 7남매를 낳아 9식구가 돼도 단칸방에서 생활했다"면서 "모든 국군포로들은 나처럼 좁은 방에서 살지 않으면 안됐고 이것이 국군포로들의 숙명이었다"고 허씨는 적었다. 1990년대 북한에 닥친 식량난 상황에 대해 허씨는 "한번씩 식량구입을 위해 황해도에 갔다온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청진역엔 이름모를 객지 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어 있었다고 한다"며 "북한 정권은 수백만명의 죽음을 가져온 현재에도 사회주의 지상낙원이라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허씨의 회고록은 '도서출판 원북스'를 통해 오는 18일 출판됐다. 허씨는 피랍.탈북인권연대의 자금을 지원받아 이 수기를 냈으며, 이날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리는 이 단체의 창립 7주년 기념식에서 수기 출판 기념회도 함께 열린다. newglas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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