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내부에서 제보 쏟아져… 북(北)주민 소식은 세계에서 가장 빨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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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8-12-07 23:00 국경없는 기자회의 '올해의 매체상' 받은 '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 주민들, 냉전시대에 남한이 투하한 라디오로 방송 들어 노동당 간부 등 엘리트층 변화 겨냥한 프로그램 늘릴것 북한軍 간부가 협박도… 개인·기업인·美의회서 후원 탈북자들이 운영하는 민간 대북 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이 지난 4일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국제언론단체인 국경없는 기자회(RSF)로부터 '올해의 매체상(Le prix du media)'을 받았다. 자유북한방송은 인터넷과 단파방송을 통해 하루 5시간 30분씩 북한 내부 소식과 북한의 객관적 실상 등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리고 있다. RSF는 "자유북한방송이 북한 내부 통신원 네트워크 덕분에 광범위한 북한 관련 뉴스를 방송에 내보내며, 김 대표는 북한 스타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60년간 체제 선전 방송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본 적이 없는 북한의 청취자들에게 친근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성민(47) 대표는 1999년 2월에 남한에 들어와 탈북자 동지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북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 왔다. 시상식 하루 뒤인 5일 오후, 파리 시내의 한 호텔에서 그와 만났다. ―어떤 동기로 '자유북한방송'을 만들게 됐나. "2003년 탈북자 단체장 식사모임에서 남북한 당국자 간 상호 비방 방송 중단 문제가 화제가 됐는데, 그때 서로들 북한 주민에게 북한의 실상을 알려주는 활동이 중단돼선 안 된다고 합의했다. 그래서 '(정부가 중단하면) 우리가 직접 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이 상 수상을 계기로 접하게 된 유럽의 반응은 어떤가. "유럽의회, 프랑스 외무부 관계자 등을 만났는데 관심이 매우 높았다. 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방송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포스트 김정일 시대는 어떻게 전망하는지, 프랑스 등 유럽에도 탈북자가 유입되고 있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풀면 좋겠는지 등을 물었다. 유럽의회에서도 '그런 취지라면 얼마든지 돕겠다'고들 말했다." ―김 대표가 방송을 맡게 된 이유는 뭔가. "당시에 인기 MC인 강수정씨와 함께 방송에서 '서울말 평양말'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KBS '남북의 창'에도 고정 출연하는 등 방송 전파를 좀 탔다. 이 때문에 그 모임에서 '네가 책임지고 이 일을 맡으라'는 식으로 정리가 됐다. 그래서 사람들부터 모았는데, 탈북자 중에도 홈페이지를 만드는 인터넷 전문가도 있고, 북한에서 아나운서로 일한 경력이 있는 여성, 군 선전장교 출신으로 일해 방송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 진용을 꾸밀 수 있었다." ―방송전파(단파)를 국내가 아닌 외국에서 쏜다는데 왜 그런가. "인터넷 방송은 국내에서도 별 제한이 없지만, 라디오 방송은 정부가 남북한 간의 '비방 방송 금지' 합의에 따라 승인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파 송출은 영국의 민간기업에 위탁하는 방법을 취했다. 영국 회사는 몽골·베트남·캄보디아 등 아시아 기지국을 통해 우리 방송 전파를 북한으로 쏜다." ―북한은 라디오 채널도 고정돼 있다는데, 어떻게 대북 방송 청취가 가능한가. "냉전 시절에 남한에서 공중 투하한 단파 라디오를 신고하지 않고 몰래 갖고 있는 북한 주민들이 의외로 많다. 나만해도 군 복무 시절에 단파 라디오를 6개나 갖고 있었다." ―자유북한방송의 청취율은 어느 정도인가. "미국 의회 산하의 방송위원회가 해마다 중국 연변 등지에서 탈북자 2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하는데, 탈북자의 30% 가량이 '방송을 들었다'고 답한다." ―자유북한방송의 보도 내용을 보면 북한 내부 제보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정보가 가득한데 이런 정보는 어떻게 수집하나. "우리 방송 정보센터 메뉴에 들어가 보면 북한 내부 기밀정보가 굉장히 많다. 국가정보원도 우리 방송을 주요 정보 소스의 하나로 여긴다. 북한 소식은 내부 제보자들이 제공하는 것들이다. 우리 쪽에 사례를 전제로 정보 제공을 제안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요즘엔 우리 쪽에서 북한 내 정보원에게 기획취재를 주문해 생산하는 정보도 많다." ―그런 정보를 어떻게 전달받나. "중국과 북한 국경지대에선 중국의 휴대폰이 터진다. 북한 정보원이 중국 휴대폰을 활용해 정보를 제공하고, 동영상 자료는 CD 등에 담겨 국경을 넘어온다. 북한 내 최상급 정보는 몰라도, 일반 주민 동향 소식만큼은 우리가 아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언론 매체일 것이다." ―생명의 위협도 적잖게 당했을 텐데. "한번은 입수된 김정일 지시문을 보니, '대북 방송하는 자들을 용서하지 말라. 직접 나서지는 말고 제3자를 동원해 응징하라'는 메시지였다. 하루는 내가 북한에서 근무하던 부대의 보위대 부부장이 직접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와 '나 ○○○부부장이야, 나 알지?' 하면서 협박하기도 했다. 이한영(김정일의 처조카로 남한에 귀순했다가 1997년 북한 공작원에 피살) 사건이 떠올라 전율을 느꼈다. 그후 가스총을 항상 휴대하며 사무실 책상 밑에도 가스총과 전기봉을 붙여 놓고 있다." ―전파 송출료와 직원 월급 등 자금은 어떻게 마련하나. "개인 후원자가 5000명 정도 되고 기업인 후원자도 많다. 미국 의회 산하 국제민주화 기금 지원도 받는다. 일본에는 자유북한방송 후원회가 결성돼 있다. 방송국 개설 후 한 번도 적자를 본 적은 없다. 직원들이 처음엔 월 30만~60만원씩 받고 일하면서 새벽에 신문을 배달했다. 요즘은 형편이 좀 나아져 월 100만원씩 준다." ―본인의 탈북 경위는. "아버지가 북한 작가동맹 시(詩)분과 위원장이었고, 나도 그 영향을 받아 김형직사범대학 어문학부에서 시를 전공했다. 군 입대 후 군단 선전대 작가로 활동했는데, 당시 선전대에서 사용하던 악기가 북한제라 문제가 많았다. 선전대장이 부하들과 짜고 개성 학생소년궁전에 있던 일제 악기를 훔쳐 왔는데, 그게 발각돼 대장이 강제제대 당하고 노동당에서 출당됐다. 이후 내가 대장대리 임무를 맡았는데 '내가 투서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무리 해명해도 믿지 않고 '배신자'로 낙인 찍히는 현실에 환멸을 느껴 탈북을 결심했다." ―북한 김정일의 건강 상태에 대한 정보는 없나. "김정일의 건강 상태는 사단장급 인민군 장성도 전혀 정보를 모른다. 북한 내 한 정보통은 '현재 김정일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장성택뿐이다. 장성택이 하는 말이 곧 장군님 말이다'고 한다. 장성택이 '이건 장군님 뜻'이란 식으로 대리 통치를 한다는 얘기다. 김정일이 갑자기 죽으면 군부 세력이 전면에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장성택으로선 김정일의 유고(有故) 상태를 최대한 감추고 자기 체제 구축에 필요한 시간을 벌려고 할 것이다." ―앞으로 자유북한방송의 활동 계획은? "지금까지는 북한의 일반 주민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을 주로 편성했는데, 앞으로는 군 장교, 노동당 간부 등 북한 엘리트층을 위한 교양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려고 한다. 체제 개혁의 주체는 그 사회의 엘리트가 될 수밖에 없다. 현재 북한 엘리트 그룹은 김정일 체제가 붕괴되면 다 죽는 줄 알지만, 러시아나 동구권 사례를 보면 그렇지 않다. 똑똑한 엘리트층엔 부자가 되는 등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동구권 혁명 1세대의 육성 인터뷰 등을 통해 북한 엘리트층에 그런 메시지를 전달할 생각이다." 김성민 대표 김형직사범대학 어문학부 졸업 후 군(軍)에서 작가로 활동하다 1996년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중국에서 북한 보위부대원에게 체포돼 평양으로 압송되다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공개 총살을 면했다. 남한에 들어온 뒤 중앙대학 예술대학에 입학, 동국대 북한학과 재학생들과 제휴해 '백두 한라회'라는 봉사단체를 만들었고 시집(詩集) 형태의 졸업 논문을 제출해 '탈북자 출신 1호 시인'으로 화제를 모았다. 이후 대학 교수였던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황장엽씨의 요청으로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직을 맡은 뒤 '북한 민주화운동 투사'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만5000여 남한 탈북자 사회에서 '마당발'로 통하며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파리=김홍수 특파원 hongsu@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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