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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청년 한명 얻고 100명 성도 잃었지만...
Korea Republic of 관리자 1406 2009-03-16 20:51:49
국민일보 2009-03-15 16:37

“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생한 걸 생각하면, 그저 은혜 갚을 일이 까마득합네다.” 함경도 사투리가 또렷한 백요셉(사진·25)씨는 박필녀(사진·61) 목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요셉이를 위해 고생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지. 요셉이는 앞으로 내가 했던 일의 10배를 할 거야” 박 목사는 최씨의 손을 잡으며 되레 격려했다.

◇강제추방의 대가로 얻은 탈북 청년=박 목사는 지난해 9월 러시아로부터 강제 추방당했다. 탈북자 신분의 백씨를 자신이 목회하던 우수리스크 소망감리교회에 숨겨줬다는 게 이유였다. 러시아 정부는 백씨에게 테러리스트란 혐의를 붙였다. 박 목사와 한국 정부의 도움으로 탈북 청년 백요셉(25)씨는 무사히 한국으로 입국했다. 얼마 전 취득한 주민등록증을 자랑스럽게 내보인 백씨는 지난 9일부터 충북 진천의 한 플라스틱 공장으로 출근한다. 그는 이곳에서 1∼2년간 일하며 생활 기반을 마련한 뒤엔 대학에 진학할 생각이다. 북한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게 백씨의 비전이다. 하지만 박 목사에게는 백씨 한 사람을 얻은 대가가 컸다. 박 목사는 두 번씩이나 러시아 정부로부터 강제 추방을 당했다. 첫번째는 지난해 9월. 블라디보스토크 이민국은 박 목사를 추방하면서 “종교 비자는 안되지만 비즈니스 비자로는 얼마든지 입국이 가능하다”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2개월 뒤 비즈니스비자를 손에 쥔 박 목사는 다시 블라디보스토크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박 목사는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곧바로 경찰에 붙잡혔다. 박 목사는 이미 테러범을 도와준 테러 동조자로 낙인찍혀 있었던 것이다. 수갑을 찬 채 위협에 시달리던 박 목사는 다른 사람 몰래 경찰의 핸드폰을 빌려 우수리스크감리교회의 집사와 통화한 뒤 비행기표를 마련해 한국으로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박 목사는 그때 사도 바울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그렇게 수도 없이 죽을 고비를 넘었던 사도 바울에 비하면 자신이 당했던 수모와 위협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박 목사는 100여명의 성도들과 강제로 떨어진 채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조차 할 수 없다. 보통 러시아에서 탈북자를 숨겨주는 일은 강제추방을 감수해야 할 만큼 위험하다. 이 때문에 백씨는 박 목사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부른다. 백 씨는 “다른 한국 사람 두 명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며 박 목사에게 각별한 감사를 표했다. 박 목사는 “또 다시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요셉이를 숨겨줬을 것”이라며 “그것은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목사는 “요셉이는 내게 입양 아들과 마찬가지”라며 다시 백씨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박 목사에겐 출가한 두 딸이 있다.

◇“우수리스크 교회는 지금 엄마 없는 자식”=박 목사는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도 꼭 러시아에 다시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추방과 함께 공사가 중단된 새 예배당을 꼭 완공하고 싶어서다. 예배당 공사는 현재 내장공사만 남겨놓은 채 멈춘 상태다. “교회는 지금 엄마 없는 자식과 같아요. 그런데도 한 사람도 교회를 안나오는 사람 없이 믿음에 견고히 서 있어요.” 교회 얘기가 나오자 박 목사의 눈엔 눈물이 맺혔다. 보고싶은 마음은 교인들도 박 목사 못지않다. 지난해 12월, 기자가 우수리스크 소망감리교회(아래 사진)를 찾았을 때 교인들은 하나같이 박 목사의 안부를 물었다. “우리 목사님, 언제 오세요?” “우리 목사님, 잘 지내세요?” 교인들은 얼마 전, 러시아 대통령에게 박 목사의 귀국 허가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현재 소망감리교회는 24살의 이유라 전도사와 학생 신분으로 기아대책기구 사역을 하고 있는 송해용 선교사가 맡아 헌신적으로 사역하고 있다.

러시아는 공개 전도가 불가능하고 물가가 비싸 선교사들의 기피지역으로 분류된다. 그럼에도 박 목사는 1993년 우수리스크행을 결심했다. 어릴 적부터 가져왔던 민족 수난에 대한 빚진 마음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역사 시간에 민족 수난의 얘기를 들으면 집에 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요. 제가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결심한 것은 일종의 빚갚음이라고 할 수 있죠.” 러시아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모르던 박 목사는 자신이 전공한 유아교육과 가정 시간에 배워두었던 음식 만들기, 춤 등의 기술을 가지고 무작정 러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고려인들에게 무료로 한글을 가르치고 문화를 가르쳐주면서 교회로 인도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은 100여명의 성도를 가진 우수리스크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한인 교회로 자리잡았다.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음식처럼…”=15년이라는 우수리스크감리교회 사역 기간, 박 목사는 안식년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이 때문에 박 목사는 “그동안 못가졌던 안식년을 이번에 한꺼번에 갖는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소망감리교회 사역으로 바쁘다. 자신을 대신해 우수리스크를 방문해 줄 사람과 우수리스크 청소년들이 한국의 식당이나 공장에라도 취업할 수 있도록 발로 뛰고 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어려움과 슬픔을 겪고 있는 성도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인터뷰를 마치고 점심식사 자리에서 목사는 자장면을 앞에 놓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이 음식이 우리를 위해 희생한 것처럼 우리도 남을 위해 희생하게 하소서.” 그 기도는 우수리스크 성도들과 탈북자를 위해 헌신한 박 목사의 삶, 그 자체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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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1004 달매 이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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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곡 2009-03-23 00:28:52
    고마우이 고마우이,,
    감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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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복 2009-03-30 12:23:56
    백요셉청년을 중국에서 러시아로 넘긴 장본인입니다.
    여러 목회자님들도 피하는 것을 박목사님이 선뜻 나섰다가...
    아무튼 주의 종 다운 자세이며
    좋은 결과가 나게 되리라 믿습니다.
    외교통상부에 의를 제기해놓았으니까요.

    백형제와 우리는 이러한 은혜와 희생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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