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탈북자, 걸어서라도 한국 가겠다 |
---|
자유북한방송 2009-03-17 그는 참을 수 없는 듯 끝내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부모형제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처자식과도 생이별하며 약 12년의 세월을 기다린 끝이었다. 최근 중국 모처에서 기자, 그리고 한 탈북자 지원가와 만남을 가진 탈북자 전OO(男. 가명)씨는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 동안 억눌러왔던 한(恨)과 설움이 한꺼번에 북받친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서 어깨를 들썩였다. ‘잠깐 어디 좀 같이 가자’는 보위부의 통지를 받고 길을 떠난 부친은 그 길로 영영 돌아오지 못했고, 남동생은 도강(渡江)하던 도중 급류에 휘말려 사망했으며, 고향인 함경북도 OO군에서 낳았던 첫 딸마저 고난의 행군 당시 잃어야만 했던 그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며 둘째 딸을 낳기도 했던 그의 아내가 어느 날 ‘한국으로 가겠다’는 쪽지 한 장만 남겨둔 채 딸과 함께 홀연히 먼 길을 떠났다가 OO시에서 공안에 붙잡혔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하고서도 그저 무력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였다. 전 씨는 젊은 시절 꿈이 많은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는 10년의 군복무를 마친 뒤 당원이 되어 평양의 연극영화대학에 진학해서 예술인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도 북한에 현존하고 있는 연좌죄가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군 입대는 거부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입당은 물론 연극영화대학 진학도 좌절되었다. 전 씨는 당시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이후 어머니로부터 부친의 사연을 듣고서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여느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혁명의 수뇌부에 대한 충성’을 목숨처럼 당연시했던 그였지만 그의 신념은 그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후 90년대 중후반 북한 전역에 몰아닥친 이른바 ‘고난의 행군’은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거리 도처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굶어죽은 시체들이 늘어나고 장마당에 꽃제비 소년들이 바닥에 떨어진 국수 면 가락을 주워 시궁창 물에 씻어 먹으며 목숨을 잇는 사이, 그의 남동생과 맏딸도 결국 희생자의 대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전 씨는 아내와 함께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했다. 주민들의 대대적인 탈북이 발생하지 않던 탓에 ‘뇌물’이라는 개념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시기라 국경수비대의 단속은 철저했으며, 그들 부부는 국경 인근의 토굴 속에 몸을 숨겨가며 어렵사리 중국으로 탈출했다. 그는 도강 당시 “마치 총구가 내 머리 뒤를 겨누고 있는 것 같이 소름이 끼쳤다”고 회고했다. 비록 무사히 강을 건넜지만 중국에서의 삶 또한 결코 녹녹치 않았다. 도강증을 소지한 북한 주민과 도강증 없이 강을 건넌 소위 ‘비법(非法)월경자’를 가려내는 공안 당국의 날카로운 시선들이 도처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탓에 그는 외출조차 변변히 할 수 없었다. 그는 모처에서 보호를 제공받고 있는 최근을 제외하고는 탈북 이후 단 한 번도 ‘식당’이라는 곳을 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 씨와 아내는 노래방 등을 전전하며 열심히 일해 돈을 모았고, 종래에는 꽤 큰 집도 장만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다. 인근 주민들이 그들 부부가 탈북자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가 12년을 중국에서 살며 한국행을 단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 부부는 3차례에 걸쳐 태국 루트를 통한 한국행을 시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3번의 시도는 모두 무위로 돌아갔으며, 심지어 한 번은 공안 당국에 체포되어 북송되는 끔찍한 경험까지 겪었다고 했다. 도문(圖們) 변방대를 거쳐 함경북도 OO군 보위부로 이송된 그들 부부는 그 곳에서 날아드는 구둣발과 몽둥이세례를 면치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전 씨는 그 곳에서 다시 한 번 그의 인생이 틀어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고문을 위해 문을 열고 들어서던 보위부 간부는 그에게 “그 애비에 그 자식이다”라는 막말을 퍼부으며 전 씨에게 얽혀 있던 비(非)인륜적인 연좌죄를 비로소 객관적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젊은 시절 뜨거웠던 그의 충성에 당과 수령은 대를 잇는 족쇄로 ‘배려’해 주었던 것이다. 전 씨는 또한 그 곳에서 한국으로 갈 의지마저 완전히 꺾였다고 했다. 보위부 간부는 그에게 “지금은 이렇게 풀어주지만 또 잡혀오면 어떻게 될지는 네가 잘 알 것이다”라고 엄히 경고했다. 여섯 달 동안의 노동단련대 수감을 거쳐 풀려난 그는 비록 다시 탈북을 감행하기는 했지만, 그 때 보위부 간부의 경고가 귓전에 맴돌아 두 번 다시는 한국으로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토로했다(브로커들이 태국까지 인솔하는 그룹 중 한 그룹은 희생량으로 삼는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도 그의 한국행을 주저하게 했다). 때문에 두 번째 중국 생활 도중 아내가 어느 날 ‘한국으로 가겠다’라는 말을 꺼냈을 때 전 씨는 엄히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3일 뒤, 결국 아내는 쪽지 한 장만을 남겨둔 채 중국에서 낳은 둘째 딸과 함께 사라졌으며, 소식을 알 수 없어 속만 태우던 전 씨는 훗날 아내와 딸이 공안에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얻은 충격으로 인해 하염없이 방황해야만 했으며, 중국 전역이 떠들썩하던 올 해 설날 명절에는 돈이 없어 하루 두 끼를 굶어야만 했었다는 사연에서 그는 그만 눈시울을 붉힌 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금 그의 목적은 단 하나뿐이라고 했다. “가다가 또 붙잡혀 북송되어 허망하게 인생을 끝내고 싶진 않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서 한국에 가서 처자식의 생사를 알고 또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을 돕고 싶습니다” 지금 전 씨의 앞에는 또 다른 커다란 도전이 남아 있다. 기자와 동행한 탈북자 지원가는 그에게 두 가지 길을 일러주었다. 하나는 혼자 가는 것, 하나는 전문 브로커를 통해 가는 것이었다. 탈북자 지원가는 안전상의 이유로 혼자 가는 길을 권했다. 수천km의 중국 대륙을 횡단해 홀로 베트남과 캄보디아, 태국까지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자 일행과 만나 비로소 한국행의 확신을 다시 얻은 전 씨의 의지는 굳었다. “걸어서라도 가겠습니다” 눈물을 거둔 전 씨는 그렇게 말했다. “부디 일이 잘되셔서 서울에서 꼭 다시 뵙겠습니다” 헤어지기 직전 기자의 말에 전 씨는 다시금 눈시울을 붉히며 고마운 듯 손을 마주 잡았다. 장소 밖으로 나오자 어두컴컴한 거리에는 마치 전 씨가 지난 시간 겪었던 인생의 역경들과 같은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지만, 밤하늘의 별들은 마치 전 씨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비춰주기라도 하듯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영한 기자 jhisa@hanmail.net
신고 0명
게시물신고
|
꼭 성공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도 열심히 할게요.
한국으로 무사히 입국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