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경이 북한에 뿌렸던 금단의 열매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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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효과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비유하면 배우들은 지는 달을 노래했는데, 관객들은 뜨는 해를 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인 1989년 7월 1일. 북한에선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라는 것이 열렸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에 대항해 북한이 유치한 국제행사였다. 물론 이는 사회주의권이 주로 주관하는 행사로 유치하기가 별로 어렵지도 않다. 이런 행사를 준비한다면서 북한은 막대한 외화를 쏟아 부었다. 약 5년 뒤부터 북한에 굶어죽는 사람이 나타날 정도로 경제가 거덜 나게 된데도 이 축전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각설하고…. 7월 1일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식장에 21살의 아가씨가 등장했다. 누구나 짐작하다시피 임수경이였다. 남한 대학생들을 대표한다면서 김일성에게 꽃다발을 주었던 일을 비롯해 그의 행적은 남한에서 다 알려졌으니 또 생략하겠다. 임수경은 축전의 주인공이었다. 북한 사람들 전부가 “미제의 식민지 땅에서 헐벗고 고생하던” 남조선 여학생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별의별 소문들이 북한에 떠돌았다. “남한에선 임수경 같은 얼굴을 미인이라고 한대. 하도 남조선 여자들이 못생겼으니깐 저 정도는 정말 대단한거래.” “임수경이 전대협 임종석의 애인인데, 애인의 지시를 받고 왔대” 등등 소문은 끝이 없었다. 북한에서 금기시하는 청바지를 입고 면티를 입은 이 아가씨는 너무나 자유분방하게 행동했다. 원고도 없이 즉석연설을 하는데 아무리 찾아봐야 독재 사회에서 억눌려 기죽어 살아온 흔적이 없어 더구나 신기했다. 다리 아래서 거지들이 득실거리는 그 땅에서 저렇게 곱게 자랄 수도 있을까 이해되지 않았다. 남한 정부를 마구 비판하는 모습에 북한 사람들은 “어구구...용감하긴 한데 재네 집은 이제 3대가 몽땅 망했다. 어쩔려구 저런 말 함부로 하노”하면서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임수경이 판문점으로 나간다고 했을 때 또 한번 놀랐다. “설마, 그런 일이야 있을려구...” 남한 정부에서 불허한다고 했을 때 “그럼 그렇겠지. 남조선에서 볼 때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역적인데 그걸 분계선 통해 넘어오게 할라고...” 그랬다. 그런데 단식투쟁을 하더니 8월 15일 끝내 넘어간단다. 북한 사람들의 상식에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해 8월15일 임수경과 문규현은 분단선 위에 섰다. 북한의 모든 사람들의 눈이 이날 TV에 머물렀다. 다행히 이때의 북한은 요즘처럼 정전이 되지 않아 누구나 TV를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보았다. “45년의 분단선을 내가 넘는다. 통일을 위해 싸워나갑시다”하고 임수경이 열심히 소리치고 문 신부는 대략 10분 동안 성경구절을 인용해 소감을 밝히기 시작했다. “주저앉은 자에게는 희망을 / 두려운 자에겐 용기를 / 어두운 자에겐 빛을...” 이런 식의 대구법으로 표현되는 구절이었다. 20년이 지났는데도 그 장면들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됨은 충격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종교가 그렇게 나쁜 것이라고 하더니 참 좋은 말들뿐이네...다 맞는 말들이잖아” " 안기부가 보는 면전에서 저런 말들을 하다니. 죽을려고 각오했구나." 우리는 TV를 보면서 이렇게 수군댔다. 이어 임수경이 경찰에게 끌려 화면 밖으로 사라지자 우리는 모두 슬펐다. 한 달 반 동안 너무나 사랑스러웠던 우리의 여주인공이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향해 끌려갔으니깐...눈물을 뚝뚝 흘리는 사람도 엄청 많았다. 그런데 TV와 노동신문에서 임수경이 재판받는다는 소식이 실리기 시작했다. “아니, 저긴 재판이라는 것을 저렇게 공개적으로 하는구나. 우리 같으면 본인은 물어볼 것도 없이 그냥 죽이고 가족은 8촌까지 정치범수용소에 실려 갔어야 할 텐데 어째 하도 유명해 졌으니 저렇게 하는 걸까.” 그러면서 임수경은 저렇게 재판받는 시늉을 하더라도 가족들은 분명히 어딘가 끌려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북한에서 자란 사람들의 상식이다. 일반 백성들 뿐 아니라 높으신 간부들 역시 본 것이 그런 것뿐이라 그랬는지 임수경 가족은 무사치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1990년대 초반 남북총리급 회담이 열리자 남측을 방문한 북한 기자단이 불시에 임수경 집에 들이닥친 일이 있었다. 진짜 가족이 피해 없이 살고 있는지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 장면도 TV로 방영됐다. 이 장면이 특히 충격이었다. 가족이 아무 문제없이 살고 있다는 것도 당연히 놀라운 일인데 그 ‘역적’의 집안에 그 귀한 천연색텔레비(컬러TV), 소파, 냉장고 등 없는 게 없었다. 냉장고를 열었을 때 통조림이나 우유 등이 쏟아 나오는 모습에 북한 주민들은 그만 눈이 돌아갔다. 그래도 못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 우리가 불시에 방문할 것을 알고 미리 쇼를 벌인 것이겠지...” 실제 13차 축전 때 북한 당국은 평양시 가정들에 통조림 2개 씩 나누어 주었다. 그것도 길 옆에 있는 집들만...외국인들이 언제 불시에 들어올지 모르니 통조림은 축전이 끝날 때까지 먹지 말고 잘 보관해두라고 지시를 내렸다. 외국인이 들어오면 먹으라고 통조림을 내놓으면서 우린 이렇게 잘 산다고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워낙 쇼 프로그램에 잘 길들여져 있는 평양 사람들은 당연하게 아무런 불평도 없이 지시를 받아들였다. 물론 이때는 경제사정이 좀 나을 때라 축전이 끝나고 회수해가진 않아 다행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외국 참관단이 온다며 나누어주었던 것을 이들이 간 다음에 다 도로 빼앗았으니깐... 임수경이 1심에서 15년 형을 받았다고 했을 때 “그래도 살려는 두네. 참 관대한데”하고 생각했던 마음이, 점차 감형되면서 5년까지 줄었다고 했을 때 귀를 의심했다. 그때 북한은 상점에 가서 “칫솔도 떨어지다니, 이거 사회주의 나라 맞어”라고 말 했다고 온 가족과 함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는 그런 나라였다. 그런데 적국에 가서 자기 나라 그렇게 욕하고 발칵 뒤집어놓고도 5년 밖에 안받았다는 것은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것만큼이나 믿기 힘든 일이었다. 좀 지나더니 북한 언론 매체들에 임수경이 감옥에서 썼다는, 조카딸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는 편지와 일기 등이 실리기 시작했다. 북한 주민들의 감성을 자극해 남조선이 나쁘다고 하려는 시도였지만 북한 사람들의 속마음은 정작 다른데 가 있었다. “아니, 책도 읽고 편지도 쓰다니. 세상에 저런 감옥도 있는가.” 우리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점차 반신반의하던 북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남조선이 뭔가 우리가 배운 것과 다른 ‘이상한 나라’라는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북한 모든 언론매체들은 매일같이 “임수경을 석방하라. 남한의 인권 유린을 규탄한다.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 철폐하라”고 떠들어댔다. 감히 말을 못했지만 누구나 속으로 “우리는 저런 말할 자격이 코털만큼도 없을 텐데”하고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임수경은 북한 사람들을 계몽시켰다. 그녀가 철없을 나이인 21살에 어떤 생각을 품고 평양에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을 통해 북한 사람들이 남한을 천국으로 인식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북한 당국은 임수경을 통해 ‘남조선 인민들이 북조선을 동경하며 김일성을 존경한다. 남조선은 파쇼 국가이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했을 것이다. 남한의 많은 언론들은 “임수경이 가서 적국에 이득을 주었다”고 떠들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 틀렸다. 의도가 어쨌든 결과는 전혀 엉뚱하게 나타난 것이다. 북한 보위부 요원들도 바보는 아니다. 이들은 마침내 임수경이 저절로 굴러들어온 ‘행운의 홍보수단’이 아니라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훔쳐간 ‘도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에도 북한에는 많은 전대협 소속 남한 대학생들이 들어왔다. 그러나 북한은 더는 이들이 돌아간 다음까지 보도하지 않았다. 그냥 돌아갔다는 것까지 알려주고 끝났다. 그나마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이런 대학생들도 발길이 끊겼다.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북한 주민들이 무리로 굶어 죽어갔고 수많은 탈북자들이 등장하면서 북한의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아무리 철부지 대학생들이라고 해도 그런 지옥에 갔다 와서 통일운동을 했다고 우쭐댈 일이 아님을 깨달았던 것이다. 임수경의 방북은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 사건에 등장한 배역들은 생각과는 다른 메시지를 관객에게 던져 주었다. 앞으로 그런 역효과가 또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북한 당국이 다 알아버렸으니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개성공단도 그런 효과를 내는 무대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북한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던 임수경과는 달리 개성에선 남측 기업들이 북한 근로자들의 마음을 훔쳐가는 것을 알면서도 돈이 아쉬워 어쩔 수 없이 타협해버린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개성공단처럼 남한 기업이 북한에 많이 들어가면 갈수록 좋다고 본다. 개성공단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 돈을 얻는다고 분석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어차피 이미 핵무기는 만들어졌다. 나는 역효과의 위력을 눈으로 본 사람이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이런 글을 쓰면 나보고 햇볕정책 지지자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외교정책이 냉전이냐 햇볕이냐로 간단하게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분법론자들은 참 세상 편하게 살고 있다. 지금 남북관계 악화로 개성공단은 존폐위기에 처했다. 그랬더라 하더라도 그 속에서 일하는 3만5000명의 북한 근로자들은 이미 남쪽 초코파이와 라면 맛을 충분히 들였다. 그들이 말을 하지 않고 표현을 할 수 없어 그렇지 마음속에는 남한이 얼마나 북한과는 다른 세상인지 다 알고 있다. 선택의 순간에 김정일을 따라가겠냐고 묻는다면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 보듯 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한다. 개인적으로는 남한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만들어 준 임수경에게 정말, 정말 감사하다. 진심이다. 남한에 온 뒤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기자의 신분을 갖고 그녀의 전화번호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핸드폰에 저장까지 했지만 끝내 전화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직후에 그녀에게 불행이 닥치고 은둔에 들어가고 했으니깐…. 국가보안법은 조목조목 다 위반했을지 몰라도, 북한 주민들에게 있어서 임수경은 대단한 공로자다. 통일이 돼 그녀가 북한에 다시 가도 그때와 같은 환대를 또 받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면 그녀는 몸으로 남조선이 어떤 사회인지 북한 주민들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 현행법을 어긴데 대해선 면죄부를 주고 싶다.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은 다 막아놓으라면서 입으로만 "김정일 타도, 북핵 폐기, 북한 주민 해방"을 부르짖는 사람들보다는 임 씨의 공로가 백배 천배 크다. 그는 적어도 북한 주민들이 속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어 북한 주민들의 정신적 해방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나면 차마 말을 못하겠지만 글로서 한마디 진심어린 충고를 한다면 제발 김정일을 좋다고 하는 무리들과는 어울리지 말았으면 한다. 북한 사람들이 훗날 이를 알면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그녀가 북한 주민들 속에 영원히 ‘통일의 꽃’으로 남아있는 길은 친김정일 세력들과 휩쓸리지 말고 통일을 위한 자신만의 길을 찾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그녀가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 주성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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