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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인터뷰] 탈북 국군포로 2세들의 절규
주간조선 2009-09-08 10:32:00 원문보기 관리자 831 2009-09-09 00:58:30
“죽을 고생 끝에 아버지의 나라 왔지만 아버지에게도 나에게도 무관심한 조국”

지난 8월 19일 오전 9시.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사 통한문제연구소로 깡마른 구릿빛 피부에 흰색 반팔 와이셔츠를 입은 40대 사내 한 명이 걸어 들어왔다. 한참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이 사내는 거친 북한 사투리로 자신을 “지난 2006년 함북 온성에서 탈북한 국군포로의 유가족”이라고 소개했다. 이튿날 이 사내는 역시 국군포로의 유가족이라고 하는 40대 사내 한 명을 더 데리고 왔다. 이들은 탈북했거나 여전히 북한에 있는 국군포로 가족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서 작심한 듯 털어놓았다.

현재 1만6000명에 이르는 국내 탈북자 중 남달리 주목할 만한 사람들은 6·25 전쟁 때 북한으로 끌려간 국군포로 가족들이다. 국군포로들이 북한에서 가정을 이뤄 대한민국과 인연을 맺은 이들은 국군포로 가족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목숨을 걸고 아버지, 남편의 나라로 찾아온 사람들이다. 이들의 수는 현재 163명에 이른다. 대부분 나이 든 아버지, 남편을 놔두고 혼자 북한을 탈출했거나 이미 북한에서 아버지, 남편을 잃은 유가족들이라고 한다.

이번에 인터뷰에 응한 이수광(가명)·김순영씨(가명)도 북한에서 죽을 고생만 하다 세상을 뜬 국군포로를 아버지로 둔 유가족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이들과의 인터뷰는 지난 8월 19일과 20일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지난 2006년과 2008년 북한을 탈출한 이들은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과 친지들의 안위를 염려해 자신들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고 아버지와 자신들의 이름을 가명으로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인터뷰 내내 거친 북한 사투리를 사용했으나 기사에서는 표준어로 고쳐서 표기했다. 이들은 강인한 인상과 말투에서 풍기듯 사선을 넘어온 대단한 의지의 소유자들로 보였으나 인터뷰 도중 북한에 두고 온 가족 얘기가 나오자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강철환 : 북한에서 국군포로로 있었다는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이수광 : “우리 아버지 이태종(가명)씨는 1931년 경남 함양군 석봉면 구룡리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6·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 18살의 나이로 참전하게 됐다.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고 금화지구(강원도 화천 근처로 추정됨)에 있는 연대 연락병으로 군복무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연대 지부가 북한군에 포위되고 하룻밤 사이에 괴멸되면서 포로로 잡혔다. 당시 계급은 일등병이었다고 들었다. 북한으로 끌려간 뒤 함경북도 새별군(1977년 경원군에서 새별군으로 개칭)에 있는 화면 포로수용소에 있었다. 이후 함북 온성으로 옮겨져 온성탄광에 배치됐다.”

김순영 : “우리 아버지 김원재(가명)씨는 1931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이 터진 후인 1952년 국군에 입대하면서 참전했다. 포로로 붙잡힌 곳은 정확히 듣지 못했다. 다만 저녁이면 중공군이 밀고 올라왔는데 전투 중 그만 파편에 맞아 까무러쳤다고 들었다. 이후 깨어나보니 중공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다음에 평양 근처의 감옥에 있다가 1953년 말쯤에 온성에 있는 북한군 포로수용소로 옮겨졌다고 들었다. 중공군이 끊임없이 밀고 올라온 기억 때문에 살아계실 때 ‘중국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친다’고 하셨다.”

강 : 한반도 최북단 함경북도 온성에는 국군포로와 그 가족들이 많이 산다고 들었다.

이 : “온성에는 두 집 걸러 한 집꼴로 국군포로와 그 가족들이 있다. 우리나라 제일 꼭대기에 있는 온성은 군사분계선에서 가장 먼 곳이다. 훗날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줄도 몰랐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1980년대 말 중국이 잘살게 되고 북한과 교역이 늘어나면서 온성의 생활환경이 오히려 좋아졌다. 국경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탈북해 한국으로 많이 넘어올 수 있었다. 온성에는 남으로 넘어올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추방지역이 지금은 북한에서 가장 가고 싶은 곳이 돼 버렸다. 화가 복이 됐다.”

김 : “내가 듣기로도 북한에 끌려온 국군포로들은 거의 온성에 배치했다고 들었다. 우리 아버지는 1954년부터 함북 온성 바로 옆에 있는 새별군의 하면 탄광지구 막장에서 탄을 캤다. 그곳에는 겨울이면 눈이 그렇게 많이 올 수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당시 겨울철 석탄 광차를 뒤집은 다음 겉에 거적을 두르고 그 속에서 겨울을 보냈다’고 말했다.”

강 : 종전 후 남북간 포로교환이 있었다. 북한에 계속 남겨진 특별한 사정이 무엇인가.

이 : “6·25 전쟁이 끝나고 포로 교환할 때 남한으로 간다고 한 사람들을 모두 모아두고 두만강에서 총으로 쏴 죽였다고 들었다. 그 후 총살 소문이 국군포로들 사이에 퍼지면서 남은 사람은 남한으로 갈 엄두를 못 냈다고 한다. 아버지가 왜 남한으로 오고 싶지 않았겠나. 아버지 고향인 경남 함양하고 온성은 거리도 멀고 날씨도 완전히 다른데 온성에 무슨 미련이 있었겠나.”

김 : “나도 아버지로부터 그 얘기를 들었다. 내가 듣기로는 그 자리에서 바로 쏴 죽였다고 들었다. (북한 당국이) ‘전쟁이 끝났다. 국군포로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 보낸다’면서 ‘남한으로 내려 갈 사람 손을 들라’고 해서 몇몇 사람이 손을 들었는데 그 자리에서 다 ‘따바리(기관총)’로 쏴 죽였다고 들었다. 그런 다음 ‘북한에 남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자 모두 부들부들 떨면서 서로서로 남겠다고 손을 들었다고 한다.”

강 : 전쟁이 끝난 후 국군포로들은 대개 탄광에서 일을 했다고 들었다.

이 : “온성은 산 하나 넘으면 탄광이 있다. 온성·상화·풍인·강안 탄광 등이 모두 온성에 있는 탄광들이다. 아버지는 30~40년간을 탄광에서 노예처럼 일만 했다. 매일 저녁 집에 들어오면 등이 가렵다며 긁어달라고 했다. 등짝이 온통 상처투성이다. 막장이라는 것이 어떤 곳은 책상보다 높이가 낮다. 나도 남으로 넘어오기 전에 탄광에서 1년6개월 정도 일을 해봤다. 인차(人車·광부들을 실어나르는 차) 타고 막장으로 1500m쯤 내려가면서 ‘내가 아버지처럼 30~40년을 이곳에서 버틸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김 :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탄광에서 막장을 팠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왜 6·25 때 죽지 않았나, 살아있는 것이 저주스럽고 원망스럽다’는 말을 많이 했다. 1994년에 식량사정이 나빠져 배급이 나오지 않았다. 이후 영양상태도 안 좋고 간에 물이 차서 돌아가셨다.(간염 말기 상태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 나도 탄광에서 9년 동안 일을 해봤다. 60세가 되면 ‘탄광 졸업’을 한다. 한데 졸업하고 2~3년이면 거의 다 죽는다. 근육이 풀어지면서 죽게 되는 것 같다.”

강 : 국군포로가 어떻게 현지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나.

김 : “어머니와 아버지는 온성에서 만나 결혼했다. 어머니도 신분이 좋지 않다. 외할아버지가 전쟁 때 남으로 넘어간 월남자 가족이었다. 원래 외가는 함경북도 김책에 있었고 외할아버지는 (공산당) 시당위원장이었다. 하지만 소련 군대가 들어와 재물을 빼앗고 여자들을 강간하자 공산당에 환멸을 느낀 외할아버지는 미군이 들어오자 깃발을 바꿔 들고 결국 남으로 내려갔다. 이후 외할머니는 김책에서 처단되고 어머니와 외삼촌은 온성으로 추방됐다. 결국 나는 아버지는 국군포로, 어머니는 월남자 가족으로 출생신분이 최악이다.”

이 : “우리 아버지도 온성에서 어머니와 만나 결혼하고 북에서 6남매를 키웠다. 당시 북한에는 남자들은 모두 전쟁에 끌려가서 죽고 남아있는 사람은 노인과 부녀자들밖에 없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만나게 된 것 같다. 또 결혼해서 애를 낳아야 일을 시킬 것이 아닌가. 한번은 내가 아버지한테 ‘살기도 힘든데 왜 자식들을 많이 낳았냐’고 물어봤다. 아버지는 ‘형제가 많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고 낫지 않겠냐’고 대답했다.”

강 : 국군포로 혹은 그 가족으로서 경제적·사회적 불이익은 없었나.

김 : “우리 아버지는 집에서 술만 마시면 고향(충북 보은) 얘기를 했다. 하지만 만약 밖에서 고향 얘기가 나오면 ‘말 반동(불순한 언행)’이라고 뺨을 후려 맞았다. 국군포로 가족들은 주기적으로 하는 ‘자수활동’이란 행사도 있었다. 간첩활동을 한 사람을 잡아내려는 것이다.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매주 목요일이면 한 주일 동안의 자기 비판서를 써야 했다. 2장을 써서 당 조직과 보위부에 각각 1장씩을 바쳤다. 우리 아버지는 60세까지 살다 죽었지만 국군포로라는 이유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 : “어머니는 아버지의 출신성분 때문에 자식들이 불이익을 받을까 염려해 애를 많이 썼다. 어머니는 학급 모자위원장도 했고 애를 써서 큰형을 인민군에 가게도 만들었다. 북한에서는 군에 들어가는 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군대에 가면 탄광 막장생활도 면할 수 있다. 하지만 큰형이 군사동원부에서 환송회까지 마치고 기차를 타려는데 누군가 형을 불러내 ‘집에 가라’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출신성분이 걸림돌이 된 것이다. 어머니는 그 당시 너무 충격을 받아 ‘자살하겠다’고 했다. 어머니가 죽겠다는 것을 말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이후로 우리 가족은 화목한 날이 없었다.”

강 : 국군포로 가족이라는 출신 성분이 인민군 입대에도 영향을 미치나.

이 : 우리 큰형은 우여곡절 끝에 3년 만에 인민군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인민군대에 가도 국군포로 자식들은 모두 건설대로 배치된다. 총을 쥐어주면 총부리를 거꾸로 돌릴 것을 염려한 것 아니겠나. 큰형은 군복 입고 함남 단천에 있는 검덕광산에서 복무했다. 둘째형도 10년 동안 평양~희천(묘향산) 고속도로 닦는 데서 복무를 했다. 셋째형도 사리원 도로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나는 비록 몸이 허약해 군대를 안 갔지만 우리 형 3명은 모두 10년 동안 총 한 방 못 쏘는 군대로 가서 일을 한 것이다.”

김 : “북에서는 남자가 군대에 다녀오지 못하면 대접을 못 받는다. 우리집에서도 나와 형들을 인민군대에 보내려고 ‘사업(로비)’을 많이 했다. 결국 사업 끝에 큰형과 둘째형이 군대에 갈 수 있게 돼 온 집안에 경사가 났다. 하지만 큰형은 군복만 바꿔 입은 채로 함북 무산광산으로 배치됐고 둘째형은 자강도에 있는 희천발전소로 끌려 갔다. 그러자 아버지가 ‘이거는 아닌 것 같다’며 나는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주: 북한은 형식적으로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강 : 북에 있을 때 국군포로인 아버지의 출신성분을 원망하지 않았나.

이 : “어렸을 때 아버지를 무척 원망했다. 모든 것이 다 아버지 탓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어머니도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조금씩 이해를 하기 시작했다. 1997년쯤 식량사정이 안 좋을 때 아버지가 누나 집에 가서 식량배낭을 들고 오다 누군가에게 타살됐다. 목이 졸린 흔적이 있고 식량배낭이 없어진 것으로 보아 강도들에게 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보위부에서는 ‘노인네가 기력이 없어 쓰러져 죽었다’고 말했다. 물론 지금은 대한민국에 넘어와 아버지 때문에 오히려 떳떳하고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김 : “출신성분 때문에 당 일꾼(공무원)인 ‘가시아버지(장인)’가 5년간 결혼을 반대했다. 아내와는 학교 동창인데 19살에 눈이 맞아 1993년에 결혼했다. 처남들도 내가 ‘반동(국군포로)’ 집안 출신이라서 출세에 지장을 많이 받았다. 남한으로 건너온 이후로는 아내와 딸과는 전화로 연락을 하고 있다. 온성에는 중국 휴대폰으로 남쪽과 연결시켜주는 브로커들이 많다. 북한 보위부에서는 내가 아직 중국에 있는 줄로 알고 있다. 하지만 만약 우리 딸이 학교에 들어가면 반역자의 손녀에 반역자 딸이라고 또 괄시를 받게 될 것이다.”(이 말을 하며 김씨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강 : 탈북은 어떻게 감행하게 됐나.

이 : “중국 옌지(延吉)에 있는 이모와 내왕이 있었다. 이모의 도움으로 아버지 고향인 함양의 삼촌들과 연락이 닿았다. 그 후 삼촌의 도움으로 한 1년간 잘 먹고 잘살았다. 그러다 보니 욕심이 생기더라. 보위부를 통해서 중국 비자를 신청했다. 담당관한테 북한 돈 30만원을 뇌물로 건네줬다. 북한 돈 30만원이면 1년 동안 먹고살 수 있는 돈이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 담당관은 ‘너는 친척들이 다 남한에 있어 안 되겠다’고 했다. 러시아 벌목공으로 가볼까도 생각했다. 운전기술도 있어서 자신이 있었다. 각 도에서 뽑힌 30명 가운데 선발됐는데 출신성분 때문에 또 떨어지고 말았다. 그 후 탈북을 감행했다. 중국 옌지에 있는 이모집으로 건너간 뒤 육로로 태국으로 넘어갔다가 한국으로 들어왔다.”

김 : “1차 핵위기 때인 1994년쯤 처가를 통해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처단할 사람은 국군포로 가족들’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국군포로들이 일하는 탄광은 전쟁이 터지면 폭파시키거나 수장(水葬)시키도록 돼있다. 탄광 요지요지에다 ‘따바라(기관총)’를 걸어두고 꼭대기에는 저수지를 만들어 놨다. 식량 사정이 안 좋아 다 굶어 죽게 생겼다. 일단 중국 옌볜(延邊)으로 무작정 넘어 가서 식량을 구해왔다. 그때 같이 중국으로 넘어갔던 사람이 식량을 나누지 않았다고 위에다 고발을 했다. 다행히 처가 쪽에서 먼저 알려줘 눈이 펑펑 오는 날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무작정 튀었는데 결국 다시 잡혔다. 북한에서 몇 번 감옥을 들락거리다 중국을 통해 라오스로 들어가 한국으로 왔다.”

강 : 국군포로에도 등급별로 대우가 다르다고 들었다.

이 : “국군포로에는 3가지 부류가 있다. 1부류는 북한에 끝까지 대항하고 정권의 전복을 시도한 사람이다. 사실 이런 사람은 거의 다 죽었다. 2부류는 북한에 비록 적극적인 반항은 안 했지만 대한민국을 적대시하지 않는 부류다. 마지막 3부류는 북한 체제에 동조한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국군으로 있다가 인민군에 재입대한 사람들을 말한다. 3부류 국군포로 가운데는 최고사령부 운전기사까지 한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탄광이나 막장 같은 것은 전혀 모르고 북한 정권에 동조했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한국으로 넘어오면 3억~4억원가량을 받는다고 들었다.”

김 : “함북에 있는 국군포로들은 북한이 죽이지 못해 살려둔 사람들이다. 하지만 평북 같은 데 있는 사람들은 도로관리소 등에서 호의호식한 사람들이다. 심지어 북한 ‘영예군인(상이군인)’ 공장에서 일하다 온 사람도 있다. 영예군인 공장은 탄광이나 농장보다 작업환경이 훨씬 좋다. 결국 이 사람들은 북쪽에서도 대우 받고, 남쪽에서도 대우 받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와 같이 죽은 국군포로들은 북에서도 죽도록 고생만 했고 (자식들이) 남에 넘어와도 제대로 된 대우를 못 받는다. (아버지가) 더 잘 먹다 죽기라도 했으면 내가 말을 안 한다.”

강 : 정부에서 국군포로 가족위로금조로 5000만원가량 지급하지 않나.

이 : “가족 위로금이 아닌 국군포로인 우리 아버지에 대한 보상을 해달라는 것이다. 특히 죽은 국군포로들도 정부에서 합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 살아서 돌아온 국군포로는 나라에서 퇴역식도 다 해주는데 죽어서 유골로 돌아온 사람은 보상도 제대로 안 된다. 산 사람들한테는 보상해주고 죽은 사람한테는 왜 보상을 안 해주나. 정부에서는 ‘죽었는데 어떻게 보상을 해주나’라고 말을 한다. 당신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었는데 나라에서 보상을 안 해주면 기분이 좋나.”

김 : “가족 지원금도 문제가 많다. 피를 뽑아서 (남한의 친척들과) DNA 대조를 한 다음에 대상을 선정하는데 6개월에 2년 동안 분할해서 나눠준다. 한국에 넘어와서 탈북자 정착금 조금 받은 것은 (탈북) 브로커한테 다 주고, 중국에 있던 친구한테 돈을 빌려서 살고 있다. 정부가 나서서 국군포로나 가족들을 우대해줘야 하는데 정부는 그런 데 관심이 없다. 오직 북한 정보 빼먹기에만 열을 올린다.”

강 : 북한에서는 인민군으로 6·25에 참전한 군인들과 그 가족들을 어떻게 돌보나.

김 : “북한에서 비전향 장기수 자식들은 다 호의호식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조선글(한글)’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교육을 시켜서 다 권력기관에 넣어줬다. 솔직히 우리도 아버지 나라로 가면 권력기관에 들어갈 수 있겠구나 해서 왔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국군포로 가족들이 대접을 못 받는다. 오히려 북한에서 호의호식하며 인민군대에서 ‘군인질’ 하던 사람들이 여기서도 강연도 하고 더 잘 되는 것 같다. 하나원에 있을 때 북한에서 호의호식을 하던 탈북자 선배가 강연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 내가 ‘당신은 그 땅(북한)에서 잘 먹고 잘살았잖아, 당신은 입 닫고 사시오’라고 말했다.”

이 : “북한은 참전용사에 대한 대우가 좋다. 참전용사의 자녀들은 머리가 나빠도 다 정권기관(공직)에 들어갈 수 있다. 정권기관에 있으면 뇌물도 받아먹고 생활에 향락을 누릴 수 있다. 북한 정권이 유지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미국에서는 미군 유골을 찾기 위해 유골 하나당 120만달러씩을 지불한다고 들었다. 우리나라는 정부 차원에서 국군포로들을 모시고 오지도 못하니 도대체 뭐하는 건가.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조그만 일만 있으며 현충원에 달려간다. 내 생각 같아서는 (그들에게) 계란폭탄을 터뜨리고 싶다.”


국군포로

15년 전 조창호 중위 이후 74명 탈북
탈북한 국군포로 가족도 총 163명

‘국군포로’는 6·25 전쟁 당시 북한에 항복 또는 패배하여 붙잡힌 대한민국 국군 소속 포로들을 말한다. 김영삼 정부 때인 지난 1994년 43년 만에 조국으로 탈출한 조창호 중위(1호 국군포로, 2006년 지병으로 사망)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모두 74명의 국군포로가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현재는 그 가운데 15명이 사망하고 59명만이 생존해 있는 상태다. 현재 탈북해 국내로 넘어온 국군포로 가족들도 모두 163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지금도 560명가량의 국군포로가 여전히 북한 땅 어딘가에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사회 = 강철환 조선일보 통한문제연구소 기자 nkch@chosun.com
정리 = 이동훈 기자 flatron2@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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