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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0대 탈북남매, 15개월째 산속 원시인 생활…신뢰못할 남한 정부
쿠키뉴스 2010-06-06 10:51:00 원문보기 Korea, Republic o 관리자 942 2010-06-08 20:54:27
지난 4일 서울 낙성대동 관악구민운동장 뒤쪽으로 뻗은 삼성산 길을 15분 정도 올라갔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힐 무렵 산길에서 떨어진 곳에 비닐과 천을 엮어 만든 허름한 천막이 보였다. 주변에는 바닥이 새까맣게 그을려진 냄비와 낡은 주전자가 굴러 다녔다. 걸레 같은 옷들이 널려 있었고 펼쳐 놓은 이불은 누렇게 변색돼 있었다.

“계세요?” 천막 앞에서 수십 번을 외쳤을까. 산 중턱에서 해진 검정 몸뻬를 입은 40대 여성이 풀과 나물을 손에 쥐고 천막으로 다가왔다. 쾨쾨한 냄새가 진동했다. 오랫동안 머리를 감지 않아 덥수룩했고 얼굴도 까맸다. 그는 2008년 3월 8일 동생 김원배(가명·39)씨와 함께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 김정수(가명·44)씨였다.

이들은 왜 산속에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것일까. 입을 열게 하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정수씨는 주머니에서 깨알 같은 글씨가 적힌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탈북일지였다. 그는 종이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강한 억양의 북한 사투리였다.



“미국에 가는 줄 알았는데….”

정수씨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다.

이들은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태어났다. 나이가 들수록 먹을 게 없어 정말 힘겹게 살았다. 정수씨는 “나무껍질과 잎을 뜯어 먹었죠. 그대로 살다간 죽겠다 싶었습니다”고 말했다. 주민들 사이엔 ‘남한이나 미국 가면 원 없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남매는 1996년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면서 압록강을 건넜다. 국경을 넘고 나서야 ‘이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중국 지린에 터를 잡았다.

남매는 그곳에서 평생 배필도 만났다. 원배씨는 택시 운전을 하며 한푼 두푼 돈을 모았다. 하지만 탈북자 꼬리표 때문에 쉽지 않았다. “원배는 운전면허 얻기가 힘들어 툭하면 택시 회사에서 잘렸고 벌금을 많이 냈어요.”

이들의 얼굴에 수심이 더 깊어진 것은 2005년이었다. 원배씨의 아들(당시 9세)이 간질병에 걸렸고, 설상가상으로 다리도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병원비는 한화로 2000만원에 달했다. “조카가 ‘고모, 병 좀 고쳐줘’라고 울며 말했어요. 수술이 다급했지만 가족이 버는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정수씨는 큰돈을 벌기 위해 중국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미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탈북 브로커를 수소문했다.

몽골로…그리고 한국으로…

2006년 7월 남매는 몽골 자민우드에 도착했다. 아들을 지린에 남기고 온 원배씨는 매일 아들을 그리워했다. 중국 만주와 접경인 그곳 군 초소에서 탈북자 30명과 함께 생활했다. 그곳에서는 배가 고플 때마다 만두를 줘 탈북자들은 초소를 ‘만투구리’라고 불렀다.

정수씨는 미국으로 떠날 날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림은 1개월, 1년을 넘어 22개월까지 지속됐다. 그는 그곳에서 한국 대사관 사람들, 미국 대사관 직원을 두루 만났다. 그 과정에서 남매는 미국에 가는 것이 결정된 것으로 믿고 있었다.

2008년 5월 28일, 드디어 몽골 울란바토르 칭기즈칸 공항에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정수씨는 ‘미국 가서 얼른 돈 벌어 부칠 테니 잠시만 기다려. 고모가 꼭 고쳐줄게’라고 되뇌었다. 하지만 비행기가 도착한 곳은 한국이었다. 정부 관계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은 “일단 여기서 생활하며 알아보자”고 권유했다.

이들의 한국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조만간 미국으로 갈 수 있으리라고 희망하며 탈북자 쉼터인 ‘평안집’에서 생활했지만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마음이 급했지만 돈 벌 기회도 없었다.

산속 생활…신뢰 못할 남한 정부, 고마운 남한 사람

2009년 3월 8일, 무관심에 방치되는 현실이 답답했던 남매는 홧김에 산에 올라가 살기로 결정했다. 정수씨는 “일종의 투쟁”이라고 했다. 그는 “(남한 정부 관계자가) 미국으로 보내준다고 한 지가 벌써 2년이 됐다. 사람을 마주치는 게 싫어졌고 북한말씨를 쓰는 우리가 간첩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들 남매는 산속 쓰레기통을 뒤져 오물을 먹고 풀을 뜯어 먹었다. “모든 게 싫었고 신세지고 싶지도 않았어요. 짐승 같은 생활을 이어간 거죠.” 이들은 서낭당에서 타다 남은 양초를 가져와 불을 밝혔고, 제사할 때 뿌리고 남은 쌀을 긁어와 죽을 쒔다. 등산객이 버린 귤껍질을 먹었고, 다람쥐가 먹다 남긴 도토리라도 주워 먹으려고 온 산을 뒤졌다.

정수씨는 “여름엔 벌레가 극성이었고 겨울엔 추위가 살을 파고들었다”고 했다. 뒤늦게 이들을 발견한 환경미화원들의 제보로 지난 4월 초부터 관악구청에서 한 달에 한 번 쌀과 김치를 지원하기까지 노숙자보다 못한 삶을 살았다. 정수씨는 “동생 때문에 계속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며 울먹였다.

원배씨는 우울증에 걸려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병든 아들이 힘들어하고 있을 것에 대한 자책감도 컸다. 정수씨도 “어디에 있는지,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조카가 마음에 걸린다”며 고개를 떨궜다.

이들은 남한 정부에 대해 심한 섭섭함을 드러냈다. 정수씨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으면 앞으로도 산을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남한 국민에게는 감사하다고 했다. “흙 한 줌, 나무 한 그루도 가져오지 않은 저희를 친절히 대해줘 고마워요.”

왜 이런 일이 생겼나

통일부 관계자들은 “처음 듣는 일”이라고만 답했다.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영환 조사연구팀장이 김씨 남매의 얘기를 듣고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를 알려줬다.

이 팀장은 2007년과 2008년에 이런 경우를 겪은 탈북주민이 있다고 했다. 2007년 1월 26일 개정된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에 관한 법률’이 원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제3국에 상당 기간 체류한 탈북자는 심사를 통해 입국을 결정한다’고 돼 있던 법 조항이 ‘해외에서 10년 이상 체류한 경우에는 보호 대상으로 인정되지 않을 수 있다(제9조 4항)’로 개정됐기 때문이란다.

이 팀장은 “당시 탈북자를 받으려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탈북자 지원 혜택도 줄었다. 2007년 초 탈북자 사이에서는 ‘한국에 가도 안 받아준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말했다.

그는 김씨 남매가 2006년 7월 주몽골 한국 대사관을 통해 입국을 타진하다 이듬해 ‘한국에서 안 받아줄 것’이란 소문을 듣고 미국으로 가는 절차를 밟았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는 “몽골에서 22개월을 보냈다는 정황을 봐도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한국 대사관의 보호를 받다 미국으로 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미국은 난민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만 받아주는데 한국 정부의 보호를 받던 사람은 난민 입증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팀장은 “남매가 미국으로 가는 수속이 잘 진행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이용상 기자 joj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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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할말없음 2010-06-09 04:16:51
    참 할말없네요 무었이라 말하면 도대체 좋을지 ~`여건이 우찌됬든 환경에적응되 살아야되는거 아닙니까? 그래 미국이나 다른나라가면 그냥 앉혀놓고 밥먹여주는데가 있나요? 안타갑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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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굶주림 2010-06-12 15:52:37
    아이고 굶어서 먹고 살기 위해 왔으면 이땅에서도 감사하고 얼마든지 살아갈길 열립니다. 어느 나라가 문제가 아니라 개인이 어느곳에서 정착하는가 에 달려 있습니다. 북한사람 망신 다 시키네 고생아직 더해야 겠쑤 지금 이시각도 우리의 북한 형제는 한톨의 쌀을 위해 두만강을 넘다가 총에 맞아 죽는데 대한민국에 어찌 자기 혼자 힘으로 왔는겨?? 정부에서 받아주고 고마운줄 모르는구먼 집에서 새는 바가지 들에나가면 안새겠쑤 미국가서도 꼬라지 데모나 하고 살면 참 보기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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