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인권단체 만든 탈북자 지성호씨 “꽉막힌 그곳, 세상에 알려야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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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돈을 벌기 위해 석탄을 나르던 날이었다.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연료로 쓰일 석탄을 삽으로 퍼담는 일은 배고픈 소년에겐 결코 쉽지 않았다. 짊어진 석탄 꾸러미가 그날따라 무거웠다. 땀이 비오듯 흘렀고 순간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땐 기차 바퀴에 잘려 왼쪽 팔과 왼쪽 다리가 없었다. 1996년 지성호(28)씨가 16세 때였다. 지씨는 목숨을 걸고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뒤 지난 4월 남북한 청년과 해외 동포가 참가하는 북한인권단체 ‘NAUH(Now, Action, Unity, Human Rights)’를 만들었다. ◇목숨을 건 탈북 여정=사고 직후 마취제도 항생제도 없이 접합수술이 이뤄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다시 한 번 정신을 잃었다. 꼬박 열 달 동안 집에 누워 있은 뒤에야 눈을 떴다. 어렵던 가정형편은 더 어려워졌고, 전 국가적으로 ‘고난의 행군’이 시작돼 배급마저 끊겼다. 그러던 중 지인들로부터 남한과 개방화가 진행 중이던 중국의 소식을 듣게 됐다. 처음으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2006년 4월 지씨는 두만강을 헤엄쳐 건넜다. 중국 라오스 태국을 거친 탈북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한국 땅을 밟기까지 꼬박 다섯 달이 걸렸다. 잡힐 경우를 대비했다. 흰색 가루로 된 독약을 구해 성냥갑만한 통 3개에 담아 몸에 지니고 다녔다. 탈북에 실패해 강제노역소에 가거나 총살당하는 것보다 독약을 먹고 목숨을 끊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중국에서 라오스 국경을 10시간 동안 걸어서 넘을 땐 독약을 삼키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럴수록 목발에 힘을 실었다. 목발을 짚고 1만㎞를 걸었다. 11월 드디어 원하던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북한은 “꽉 막혀 있는 곳”=지씨는 북한을 “꽉 막혀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북한 주민은 정치적 난민이에요. 소통의 창구가 꽉 막혀 전 세계 누구에게도 현실을 알릴 수가 없죠.” 그는 이어 “아이티 대통령은 지진으로 주민들이 고통받을 때 전 세계에 구호 요청을 보내 폭발적인 관심과 도움을 이끌어냈죠. 하지만 북한은 자발적인 외부의 손길에도 여전히 묵묵부답입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에 서 동국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지씨는 지난해 말 입북했다 풀려난 로버트 박과 2009년 5월부터 6개월간 동대문구에 있는 자취방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북한 인권의 실태 알리고 싶어=그는 북한 인권의 실태가 전 세계에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탈북자 10명을 포함해 20여명이 활동하는 NAUH는 그동안 거리 캠페인, 자유아시아방송(RFA) 출연, 2010 남아공월드컵 기간 다큐멘터리 촬영 등의 활동을 벌이며 북한 인권 상황을 알려왔다. 매주 토요일마다 경기도 광명시 사무실에 모여 정보를 나누고 활동 계획을 다듬는 NAUH는 곧 프랑스 방송사의 요청으로 다큐멘터리 촬영에도 들어간다. 지씨는 탈북하다 잡혀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는 ‘친애하는 수령님을 위해 죽겠다’고 말했던 열성 노동당원이셨지만 저를 따라 나오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지금도 탈북을 시도하는 사람 중 60∼70%만 성공하죠. 우리 가족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하루빨리 북한 인권 상황이 개선되고 통일이 돼야 합니다.” 김수현 기자 siempr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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