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서 첫 설 맞는 탈북청년의 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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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던 어머니와 극적 재회“꿈을 향해 뛰는 삶 행복넘쳐요” 북한 함경북도에 살던 16살 소년은 2004년 어느 날 편지 한 통을 건네 받고 깜짝 놀랐다. 4년 전 사라진 어머니가 중국에서 인편으로 보낸 편지였다. 남들이 “죽었을 것”이라고, “그만 잊으라”고 하던 어머니였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뼈에 사무쳤지만 만날 길이 없었다. 그렇게 6년의 세월이 흐른 뒤 어머니가 청년이 된 그에게 탈북 브로커를 보냈다. ‘남한으로 오라’는 전갈과 함께. 청년은 주저하지 않고 ‘사선’을 넘었다. 2010년 2월 초 살벌한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두만강을 건넌 그는 브로커를 따라 중국과 라오스, 태국 등을 거치는 한 달가량의 목숨 건 여정에 올랐다. 죽을 고생 끝에 남한에 온 청년은 지난해 8월 오매불망하던 어머니 품에 안겼다. 10년 만의 모자 상봉이었다. 그리고 남한에서 처음으로 맞은 설날 그는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떡국을 먹는다. ◇10년 만에 만난 어머니와 남한에서 첫 설을 맞는 ‘탈북 청년’ 이명철(23·가명)씨가 1일 오후 서울 한 대안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경기도 부천 집으로 향하고 있다. 1일 만난 이명철(23·가명)씨는 어린아이처럼 설렌 표정이었다. 이씨는 “북한에선 설날에 김일성 동상부터 찾아가 헌화하고 나서야 친척 어른들한테 세배 다니거나 친구들과 어울렸는데, 여기서는 다른 것 신경 안 쓰고 어머니와 오붓하게 설을 보내게 됐어요”라며 밝게 웃었다. 어머니 박명순(45·가명)씨는 그가 12살이던 2000년에 “장사 갔다 온다”며 집을 나선 뒤 행방이 끊겼다. 당시 북한은 심각한 식량난에 수많은 주민이 중국 밀입국을 기도했던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다.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한 이씨의 집안 사정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외할머니와 단 둘이 남겨진 이씨는 어머니의 생사조차 모른 채 근근이 끼니를 때우며 고통스러운 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4년쯤 지나 ‘중국에서 요리사로 일하면서 남한으로 갈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다. 하지만 이후 소식은 다시 끊겼다. 박씨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탈북자 지원단체 등의 도움을 받아 2008년 남한에 정착했다. 박씨는 남한 사회에 차차 적응되자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마침내 모자는 지난해 부둥켜안았다. 이씨는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만나니까 아무 말도 못한 채 어머니한테 안겨 울기만 했어요”라고 10년 만의 만남 당시를 회상했다. 어머니는 이씨한테 “고조(그저) 미안하다. 내가 미안하다…”는 말만 되뇌며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경기 부천에서 어머니와 사는 이씨는 요즘 서울의 한 대안학교에 다니며 대입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공무원이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북에서는 배우는 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공부가 이렇게 재밌는지 몰랐어요. 남한에서는 열심히 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하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씨는 외래어 익히기가 힘들다고 했다. 북한에서 ‘더하기’, ‘덜기’라고만 하던 것을 ‘플러스’, ‘마이너스’라고 하는 등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많다는 것. “대안학교에서 단체로 가본 적이 있는데, ‘그 재미있는 곳’을 어머니는 한 번도 못 가보셨대요.” 설 연휴 계획을 묻자 그는 “어머니와 놀이동산에 꼭 가볼 생각”이라며 상기된 표정이었다. 조병욱 기자 brightw@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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