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밤 문화와 팝송(클랩튼의 공연을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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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3개로 17곡 연주 : 20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세 번째 내한 공연을 가진 에릭 클랩턴(66). ‘키 투 더 하이웨이’에서 ‘원더풀 투나잇’까지 2시간여 동안 기타 3개로 17곡을 연주하고 노래한 뒤 앙코르 곡으로 ‘퍼더 온 업 더 로드’를 선사했다. 연합뉴스
20일 저녁 서울 잠실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기타의 신'이 두 시간 동안 선물한 마법에 푹 빠져버린 관객들은 막이 내린 뒤에도 아쉬워하며 자리를 뜰 줄 몰랐다.
뒤에 앉았던 한 커플이 주고받는 말이 들린다. "이젠 한을 풀었어?"하고 여자가 묻자 잠시 뒤 남자가 "너무 짧아"하고 한숨처럼 답한다.
두개의 국경을 넘어 수천리를 지나 14일 싱가포르의 클랩튼 공연장에 나타났던 김정철도 아마 공연 뒤 저런 심정이었을까. 한을 풀었다기엔 너무 아쉬운….
음악마저 이념의 종속품으로 전락시키는 최악의 독재국가에 클랩턴의 광팬이 있다는 것은 부조화의 극단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던 내게는 북한과 팝송의 조합은 어색하지 않다. 독재와 굶주림, 세뇌된 열광이라는 북한 외양의 이면에는 인간 본연의 감성이 죽지 않고 꿈틀대고 있다.
북한에서 기타를 칠 줄 아는 사람은 아마 한국보다 많을 것이다.
저녁 무렵 경제난으로 암흑이 된 북한의 어느 마을을 지나가도 어둠 속 어디선가 기타의 선율을 들을 수 있다. 낮의 고단함을 기타로 위로하는 사람들이 북한에는 정말 많다. 그리고 그 선율은 북한 TV를 지배하는 광적인 선동음악과는 늘 다르다.
나도 팝송에 얽힌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대학 시절, 깊은 밤 머리맡 녹음기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던 '어 타임 포 어스(A time for us)', '디 엔드 오브 더 월드(The end of the world)'와 같은 명팝송들은 기숙사생의 굶주린 잠자리를 위로해 주었다.
김일성 광장의 충성맹세 모임에 나갔다 돌아온 저녁에도, 자본주의 바람을 없애자는 강연을 듣고 내려 온 저녁에도 빠짐없이 팝송을 들었다.
내가 듣던 팝송 테이프의 원본이 어디에서 난 건지는 모른다. 그저 음악이 좋아 서로 돌려가며 복사했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1990년대 후반 북한에서 할리우드 영화 '타이타닉'의 테이프가 비밀리에 퍼질 때 주제곡 '마이 하트 윌 고 온(My heart will go on)'이 누렸던 인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에게 이 노래들은 자본주의나 제국주의와 무관한 단지 감미로운 음악이었을 뿐이다.
그게 벌써 10여 년 전이다. 당시엔 녹음기도 잘사는 집에만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평양 청소년의 절반 이상이 MP3 플레이어를 갖고 있다.
이미 당국의 통제는 불가능하다. 북한 체제를 지탱하는 간부들도 대학을 다니며 팝송을 좋아했던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북한 주민들은 모두 정신적 일탈을 꿈꾸고 있다. 꿈으로만 그치는 일탈을 서방음악을 '황색바람'으로 엄중히 단속하는 북한 통치자의 아들인 김정철이 제일 먼저 실현했다.
14일 싱가포르 에릭 클랩튼 공연장에 나타난 김정철.
“인민은 굶주리는데…”라는 뻔한 말은 굳이 하지 않겠다. 정철이 북한 주민들과 비슷한 음악적 코드를 갖고 있는 것이 차라리 아이돌에 빠지기보단 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철의 취미가 본인이나 아버지를 교화해 주리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정철이 여자를 데리고 공연장에 나타났듯이 김정일도 젊은 시절 정철의 어머니인 고영희와 차 안에서 밤새도록 한국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술을 마시면 러시아어와 일본어로 그 나라 명곡을 부르던 김정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군 공훈합창단에 주기적으로 찾아가 수백 명이 내지르는 광란의 찬양가를 즐긴다. 그리고 인민들에게도 그런 음악만을 강요한다. 지금은 클랩튼을 사랑하는 정철은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까.
정철은 2007년 클랩턴의 평양공연을 추진했는데 클랩턴이 거절했다고 한다. 클랩턴이 독재국가에서 공연하는 첫 유명 음악가로 기록되길 원하지 않아서라는 후문이다.
하지만 유명 음악가의 공연은 평양에서 역시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독재국가이기 때문에 안 된다’가 아니라 ‘독재국가이기 때문에 음악부터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재국가라도 당국이 관객들의 머리 속까지 검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기자와 함께 이날 공연을 본 탈북 예술인은 "북한 주민들이 클랩턴의 영어 가사는 이해하지 못해도 황홀한 기타 연주 솜씨에는 분명히 빨려 들어갈 것"이라고 평가했다.
공연장을 빠져나오면서 평양 시민들과 이런 공연을 함께 즐기는 날이 하루 빨리 찾아오길 기원했다.
그런 날은 상상만 해봐도 흐뭇하다. '원더풀 투나잇(Wonderful Tonigh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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