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못 여는 탈북자들에 우리 존재 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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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에 따르면 현재 한국 내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탈북자는 총 17명이다. 중앙부처 중에서는 통일부에서 1명, 그 외에 서울시 2명, 인천시 1명, 경기도에서 13명이 근무하고 있다. 비롯 적은 숫자에 불과하지만 탈북자들도 한국 사회 운영의 한 축을 담당하기 시작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결코 의미없는 숫자는 아니다. 탈북 공무원 중 약 80%는 경기도청과 시에서 근무하고 있다. 경기도는 2008년 10월 탈북자 출신의 김현아 씨를 처음으로 채용한 데 이어 탈북자 공직 채용을 늘려가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대부분의 탈북자 공무원은 한국에 갓 입국한 탈북자들의 한국사회의 적응을 돕는 업무에 배정돼 있다. 이들의 업무 성과에 대한 지금까지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탈북자들의 시각과 입장에서 정착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지난달 25일 '북한이탈주민 성공 비전 캠프'에서 13명의 탈북자 공무원들을 소개하면서 "최선을 다해 탈북자들을 지원할 것이다. 탈북자 중에 대통령도 나올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줬다. '데일리NK'는 탈북 공무원 3명과의 '토크(Talk)'를 통해 탈북자 공직 진출의 의미를 짚어봤다. 지난 11일 평택시청에서 이뤄진 이날 만남에서 3인의 탈북 공무원들은 정착과정에서 겪었던 '좌충우돌 적응기'부터 소명의식을 심어 준 공무원 생활까지 자신들의 경험담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한국에 정착하면서 이해하기 힘든 점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이영순(이하 이) : 공무원이 되기 전 직장에 여자는 저 혼자 밖에 없었어요. 혼자밖에 없으니까 대우가 좋더라고요. 좋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죠. 조향미(이하 조) : 한국이니까 그렇지. 한국 남자들은 북한 남자들과는 다르게 여자를 무서워하잖아. -북한 남자들이 한국 남자보다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것은 사실인 것 같은데... 박영미(이하 박) : 우리 남편은 안 그래요. 이 : 언니 신랑이 특이한 케이스지. 북한 남자들 대부분이 그래. 박 : 맞는 얘기야. 북한은 남자 위주니까.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나는 아직도 북한생활 습관이 몸에 남아 있어서 어디 들어갈 때 남자 분들부터 들어가시라고 자리를 비키면서 배려하면 한국 남자들은 웃더라. 그렇게 안 하셔도 된다고. 조 : 나는 평택시 와서 깜짝 놀랐어. 청소시간에 내가 청소기를 돌리는데, 사무실 사람들이 기겁을 하는 거야. 남자가 이렇게 많은데 정숙 씨가 왜 청소기를 돌리느냐면서 청소기를 빼앗아갔어. 그러면 나는 "북한에서는 원래 남자들은 이런 일 하면 안돼요" 이렇게 말하거든. 그럼 사무실 남자들은 "아! 북한 가고 싶다"라는 '무서운' 우스갯소리를 해. 이 : 한국 남자들은 쓰레기 버리고, 분리수거도 하더라. 저 같으면 제가 하고 말아요. 왜 남편을 시키냐는 생각이죠. 그냥 출근길에 갔다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요? 저는 모든 한국 남자들이 다 이럴까라는 생각을 했죠. 박 : 모든 한국 남자들이 그렇지는 않지. 우리 과장님은 아침마다 사모님한테 꼬박꼬박 아침 대접 받고 나오셔. 드라마 때문에 여성 중심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 같아. 조 : 언니, 아니야, 우리 계장님은 주말마다 텃밭에서 농사를 하시는데 직원들한테도 조그만 밭을 주셔서 농사를 할 수 있게 됐거든. 그래서 정기적으로 농사를 짓는데, 사모님이 농장에 나오는 일이 한 번도 없는거야. 한번은 내가 "사모님 안 나오세요?" 물어보니까, 계장님은 "우리 공주는 교회가야 해. 이런 일 안 해" 이러시는 거야. 그럼 내가 또 "계장님, 사모님 시키세요. 왜 안 시키세요?" 이러지. 우리에게는 너무 낯선 광경이잖아. 박 : 그렇지. 여자는 살림살이에 바깥일도 하고, 남자는 아끼는 그런 사회에서 살았었지. 조 : 남자 손에 물 묻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있었어. 요즘 한국 여자들은 '기'가 세더라고. 이 : 한국 드라마가 여자들을 교육하고 있는 것 같아. - 한국에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점이나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었나요? 박 : 한국말 적응하기가 제일 힘들었죠. 식당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사장님이 창고에서 '봄동'을 가지고 오라고 시켰어요. '봄동'이란 이름이 예쁘잖아요. 새끼 강아지 이름인줄 알았죠. 봄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창고에 들어갔는데 '봄동'이라는 이름처럼 '예쁜 것'이 없었어요. 20분 동안 창고 안에서 '예쁜 것'을 찾다가 구석에서 '봄동'이라고 적힌 박스를 봤죠. 그 때는 창피해서 물어보지 않았어요. 이 : 저는 한국 사람들에게 섭섭한 이야기를 들을 때 '내가 북한 사람이라서 그런가?'라는 자격지심이 생겨요. 물론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탈북자들 특유의 마음의 울타리는 아직 다 없어진 것 같지 않아요. 조 : 탈북자라면 그런 것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하고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들죠. 박 : 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탈북자들은 처음에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는데, 제가 조사 받을 때는 광복절이었어요. 북한에서도 광복절을 명절로 쇠니까, 한국에서는 어떤 식으로 광복절을 쇠나 궁금했어요. 바깥을 보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화장실 욕조를 밟고 창문 밖을 봤습니다. 그런데 적십자 표시가 상당히 많았어요. 북한에서는 적십자에서 약도 많이 오고, 의사도 많이 오니까 '십자가' 하면 병원, 의사, 약 이런 인식이 있어요. 북한에서 교육받기를, 한국은 자연보다는 이익을 중시해서 자연을 훼손했고, 그 때문에 오염이 심각하다고 배웠어요. 그래서 환자가 많고, 병원이 많은가보다 생각했죠. 그런데 나와보니 그 적십자가 모두 교회를 상징하는 십자가더라고요. -한국에 들어온 후 처음 꿈꿨던 삶은 어떤 것이었나요? 이 :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죠. 박 : 저는 부자를 꿈꾸지는 않았어요. 일당 5~6만원을 받아 식량을 살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했죠. 그 돈으로 한달은 살 수 있겠더라구요. 게다가, 경기기술교육학교에서는 정해진 시간에 가면 밥도 주고 교육도 시켜줘요. 세상이 얼마나 좋아요. '김정일은 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죠. 또 제 딸은 뷰티숍에서 팀장인데, 가게에서 최연소자에요. 북한에서는 어림없는 일이죠. -한국에서는 '공무원'하면 '철밥통'으로도 통합니다.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점에서 한국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죠. 실제로 공무원으로 생활해보신 소감은? 박 : 공직생활에 대한 선호는 남한이나 북한이나 마찬가지 같아요. 누구나 해보고 싶은 그런 일 아닐까요? 북한에서는 특권층이거든요. 특권을 이용해서 민원을 해결해주죠. 하지만 남한에서는 그런 특권은 없죠. 절차를 따라야하기 때문에. 남북 사람들 모두 공직에 나가고 싶어 한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그런 차이가 있다고 봐요. 이 : 일반 회사에서는 일요일에도 격주로 나가 근무했어요. 하지만 공직에 몸을 담으면서 하루에 7시간 근무하고 월급은 그대로죠. 그리고 '공무원'이라고 하면 인정해주는 사회적 분위기도 있고요. 게다가 정년도 보장되요. 이러다보니 공무원들을 선호하는 것 아니겠어요? 조 : 한 탈북자가 중국의 자녀들을 데리고 오기 위한 수속을 밟기 위해 평택시청을 찾아왔어요. 중국에서 오래 살아 한국말이 서툴렀죠. 오직 한자를 이용한 필담(筆談)을 할 뿐이었어요. 난감했죠. 그런데 한 공무원이 다가가 필담으로 그 탈북자의 민원을 해결해 주더라고요. '이것이 공무원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탈북자로서 공무원에 지원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박 : 탈북자들은 한국의 공공기관에서 상담을 받는 것보다 탈북 선배들의 조언을 잘 수용하더라고요. 제가 정착 후 직업학교 교사생활을 몇 년 하면서 하나원에도 자주 들어가서 교육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제 막 들어오신 탈북자들이 저한테 모르는 것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하셨어요. 저는 그분들보다 선배니까 제가 알고 있는 것을 조언해 줬죠. 그러다보니 '아! 이분들을 위한 멘토가 필요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경기도에서 특별채용 공고가 났을 때 망설임 없이 지원을 하게 됐죠. 조 : 제가 공무원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특별한 것이 없었어요. 아이들을 당당하게 키우고 싶어서 였어요. 평택시 공무원 면접을 볼 때 과장님이 "계약직이라 월급이 많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직업이라 스트레스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원한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으셨죠. 그 때 저는 "시험관 아기로 어렵게 얻은 내 쌍둥이들이 '우리 엄마는 한국 사람들도 하기 힘든 공무원이야'라는 말을 할 수 있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탈북자니까 '명예'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이 : 저는 처음에 공무원을 준비한 것은 아니에요. 다만 한국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차근차근 준비해서 사회복지사 관련 자격증을 많이 땄습니다. 또, 당시 일하고 있었던 운전학원 강사 직업도 안정적이라고 생각했었다. 저는 우연한 기회에 채용신청을 하면서 공무원이 됐습니다. -공무원으로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어떤 것이 있었나요? 이 : 탈북자들이 원래 마음을 잘 열지 않아요. 의심부터 하죠. 북한에서는 이웃끼리 서로 감시해서 고발하잖아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왜 이렇게 잘해주지?'라는 의심을 갖죠. 그래서 상담하기가 힘들어요. 한 탈북자가 한국 상담사랑 상담을 하다가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제가 맡은 적이 있어요. 제가 그 탈북자에게 "저도 탈북자에요"라고 말하니까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그동안 쌓여왔던 말을 다 해줬어요. 참 뿌듯했죠. 박 : 저는 탈북자들에게 직업교육부터 연결시켜줘요. 그들의 성향을 파악해서 직업을 연결시켜주면 "감사하다"면서 다시 찾아오시거든요. 또, 학부모들에게 장학금 정보도 알려줘서 장학금을 받게 해준 적도 있어요. 저의 도움으로 탈북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면 그보다 기쁜 일이 있을까요? 조 : 우리 지자체에는 보육지원 수당이 있어요.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들은 잘 몰라요. 저는 평택시에서 일하니까 잘 알고 있죠. 한 달에 15만 원 정도 밖에 못 받지만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그 돈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르실 겁니다. 그런 보육지원 프로그램을 탈북자들한테 알려주면, 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계속해요. 또, 과장님은 제가 탈북자들의 상담을 듣고 고충을 해결해주는 모습을 보고 "정숙 씨 덕분에 내가 기분이 더 좋네" 이러세요. 탈북 공무원이 시청에 있다는 것이 탈북자들에게는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르실겁니다.
-탈북 공무원 17명 중 13명이 경기도·시 공무원이라는 것 알고 계셨나요? 박 : 전혀 몰랐죠. 김문수 도지사님이 탈북자들에게 유별난 관심을 갖고 계시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탈북자들에 대한 직업교육, 산학 협력, 탈북자 상담창구 마련 등 탈북자들에 대한 배려가 깊은 것 같아요. -탈북자 분들 사이에서 김문수 지사 인기가 높겠군요? 조 : 당연하죠. 우리는 우리를 알아주는 것 자체만으로 감사하죠. 인기 많아요. 한 탈북자는 대통령 감이라고 칭찬도 했는데. 박 : 우리랑 말할 때도 북한 사투리로 말할 때가 있어요. 친근하죠. 2만 명이 넘는 탈북자 중 저희를 뽑아준 경기도에 대해서도 감사하죠. 조 : 저희가 한국에 정착할 때는 하나원 나와서, 경찰이 우리를 집까지 '떨구는' 것이 끝이었어요. 된장을 어디서 사는지도 몰랐어요.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것인지 막막했죠. 그래서 공무원이 된 후에는 이제 막 입국한 탈북자들이 우리와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게 배려하는 공무원이 돼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 일 하라고 김 지사님이 우릴 뽑아 놓은 것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이제 막 정착하고, 또 정착할 탈북자들에게 조언 한마디씩 해주시죠. 박 : 한국은 사람이 사회를 만들고 그 사람을 교육이 만들어요. 이 사회에서 그만큼 교육이 중요하죠. 스스로 깨닫고 배우는 것, 그리고 아이들 교육시키는 것에 힘썼으면 좋겠어요. 이 :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5년 정도면 다들 자기 길을 찾아 가더라고요. 북한의 식구들을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본인의 정착이 중요하잖아요. 식구들을 생각하면 밥이 안 넘어가겠지만. 북에 송금하다 빈털터리 되면 통일 후에 가족과 만나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어요. 우선은 본인의 정착에 힘을 기울였으면 좋겠어요. 조 : 저는 정착을 하신 탈북자들에게 한 말씀 드리고 싶네요. 한국에는 우리 같이 임대주택도 못 받는 사람들이 많아요. 서울역에 가보면 노숙자들이 많죠. 그 만큼 우리를 받아준 대한민국에 도움을 주는 일을 많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요양원 청소 등의 봉사활동이나 다른 탈북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 등 통해 사회에 기여 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용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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