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망명 후, 북한의 사상적 기둥은 무너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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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민주화위원회는 고(故)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서거 1주기를 맞아 추모글을 공모했다. 6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추모 행사를 통해 당선작들이 발표했다. 대상에는 안찬일 사단법인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의 '주체사상의 망명, 주체사상의 종언'이란 글이 선정됐고, 최우수상에는 홍원일 북한개혁방송 기자, 우수상에는 이광백 자유조선방송 대표,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가 각각 선정됐다. 수상자들은 추모글을 통해 고 황 전 비서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시에 북한민주화의 뜻을 이어가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안찬일(주체사상의 망명, 주체사상의 종언) 전문보기 "북한 주체사상에는 수령절대주의 허구적 빈껍데기만 남았다" 혹자들은 황장엽 선생님에 대해 이념적 측면에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좀 더 냉철하게 그 분의 선택을 고찰해야 한다. 분명하게 밝혀두지만 북한에서 '수령신화'와 '주체철학'은 동일시될 수 없는 강제 세뇌와 통치 이데올로기로서의 차별성을 지닌다. 물론 여기서 본인이 강조하는 주체철학은 황장엽 선생님의 손을 떠나기 전의 것을 의미한다. 황장엽 선생님의 손을 떠난 뒤 주체사상은 세습을 합리화하는 지배와 권위의 정당화 이론, 동원화·강제화의 폭압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였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북한에서 주체철학은 쓰레기더미를 지나 무덤으로 가고 있었다. 1974년 2월 19일, 김정일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선포했다. 주체사상이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레닌도 스스로 '레닌주의'란 말을 쓰지 않았으며, 스탈린이나 마오쩌둥도 '스탈린주의'나 '마오쩌둥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볼 때 김정일의 김일성 숭배는 이성을 잃은 지경에 도달했다. 이때부터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과에서는 마르크스철학 등이 사라지고 소위 김일성주의 철학이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1997년2월12일, 황장엽 선생님은 망명 동지 김덕홍과 함께 베이징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들어가면서 북한 체제와 영원히 결별하게 된다. 동시에 주체사상도 그와 함께 북한과 결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인간중심철학을 강조하던 주체사상의 창시자가 그 체제를 버렸으니 거기 남은 것은 수령절대주의의 허구적 빈껍데기뿐이었다. 이광백(선생님께 배운 세 가지) 전문보기 "선생님의 망명 후 북한식 조국통일운동은 더이상 할 수 없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은 북한의 비참한 식량난 소식이 전 세계로 전해지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한총련과 학생운동의 주류가 이상적인 사회모델로 여기던 북한 사회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자립경제를 튼튼히 건설한 자주적인 인민의 나라가 아니라, 외부의 지원 없이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는 가장 비자주적인 독재국가라는 것을 더 이상 부인하기 어려웠습니다. 1997년2월, 선생님의 망명은 이를 더욱 또렷하게 증명했습니다. 1997년 4월, 월간조선의 별책부록으로 <황장엽 비밀파일>이 담겼습니다. 총 네 편의 논문이 실렸습니다. 첫 번째 논문은 <개혁과 개방문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역사적 과오를 저질렀다’, 두 번째 논문은 <사회발전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세 번째 논문은 <철학의 사명>, 네 번째 논문은 <사회주의 정치학 요강>이었습니다. <사회 발전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에서 선생님께서는 네 가지를 주장하셨습니다. 첫째, 계급적 편견을 버리고 자본주의의 장점을 받아들여라. 둘째, 계급을 철폐하려면 계급적 이기주의를 버려야 한다. 셋째, 폭력배들에게 평화를 구걸해서는 안 된다. 넷째, 계급투쟁과 무산계급 독재 이론은 파산했다. 하나같이 북한식 사회주의 운동의 사상이론적 뿌리가 되는 내용들을 정면으로 뒤집는 주장들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남한의 학생운동가들 중에는 황장엽 선생이 조선노동당 사상담당 비서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황장엽 선생의 망명은 주류 학생운동이 지도사상으로 받아들였던 주체사상이 인간중심의 철학적 세계관을 수령절대주의와 봉건주의, 계급주의로 왜곡한 독재 사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고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이념을 혁명이념으로 하는 이른바 반미자주, 민족민주, 조국통일운동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학생운동의 분열과 갈등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한편에서는 수백만명의 북한 동포들이 굶어 죽어간 상황에서 김정일 독재의 방패막이가 되는 것은 민족적 죄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정일 독재의 하수인으로 남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을 변절자라며 손가락질했습니다. 한총련은 입장이 달라진 두 세력의 주도권 다툼의 장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학생운동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습니다. 우리 지역총학생회연합은 황장엽 선생이 망명하던 그해, 결국 한총련을 탈퇴하고 새로운 학생운동을 개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선생님께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음 세 가지가 생각납니다. 첫째, 사람의 얼마나 크고 위대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인류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을 배웠습니다. 셋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정직함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윤걸(북한 민주화 시작을 알린 종소리) 전문보기 "자기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北정권과 맞서기로 결심한 것이다" 자신의 젊은 날의 피땀이 묻은 온갖 공적, 심지어 사랑하는 온 가족들의 목숨은 물론 자기 목숨까지 희생해서라도 남한사회와 국제사회에 북한체제의 극악무도함을 고발하고 북한정권과 정면 대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는 자살행위보다 더한 '적'인 북한 김정일체제와 그 개인에게도 치명적인 결정타를 안기는 사상적인 '자폭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김정일은 황 선생과 장성택 사이 사돈지간으로 우리식으로 말하면 겹사돈 지간이다. 즉 김정일의 친인척관계이었다. 이로 하여 개인적으로 김정일에게 준 치명적 타격심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이후 황 선생은 가족 친지들에 대한 사죄의 마음과 자신의 결단에 대한 강한 책임감과 일사각오의 정신을 담아 북한 민주화와 남북통일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다시 말하여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의 망명은 북한 사회주의 붕괴의 시작과 북한 민주화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도 같았다. 한국인들의 안일한 태도와 전쟁불감증, 그리고 이를 조장하는 한국 위정자들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은 그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있었다. 그의 충고에 등을 돌리고 있는 동안 김정일 정권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사이버공격과 같은 대남침투전략을 준비해왔다. 그리고 이것은 김정일의 아들인 김정은에 의하여 최근 몇 년 사이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 DDos공격, 농협해킹사건 등 실제적인 안보 위협으로 우리 모든 개인들의 생활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실제적 위협으로 확실하게 다가왔다. 홍원일(주체사상이 무너지던 날) 전문보기 "당국의 선전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그 때 이후로 알게 되었다" 강연회와 학습을 통해서 모이면 쉬쉬하던 황장엽 선생의 가족과 친척에 관한 생사는 선전비서가 강연회를 하는 기회에 장군님의 광폭정치에 의해서 황장엽은 변절자, 민족반역자이지만 가족은 용서해 주었다는 말로 임시 잠잠해지는 듯 했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후 나는 우연한 기회에 함경남도 심심산골 수동탄광에 가서 그곳에서 황장엽의 서기를 하던 사람의 아내를 보게 되었다. 나는 그때에 강연회나 학습에서 하는 말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남조선에서 큰 자리 맡아 한 자리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황장엽 선생은 남조선에 와서 일반 탈북자 취급을 받고 지난 10년 동안 연금되다시피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일반 탈북자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에 참으로 놀랐다.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안전 때문에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 사진을 보니 수심이 깊고 애수에 차 보였다. 북조선 온 나라가 뿌리째로 떠들썩했던 그 사람이 남조선에 와서 그런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주체사상의 대가인 그가 남조선에 가서 장군님의 심려를 끼쳐드렸다면서 사람들의 사상적 동요를 막아보려고, 사람들의 여론을 잠재우려고, 그렇게도 북조선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큰 사람을 남조선에서 그런 취급했다는 사실이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북조선 주민들이 지금까지 그처럼 최악의 조건에서 살면서도 독재 우상숭배에 순종하는 근저가 사실 주체사상 이념을 기초로 한 사상교양의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도 북조선이 세상에서 부러워하는 강성대국, 정치강국이라고 믿어왔던 사람들이 실상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 그 분의 탈출 때부터였을 것이다. 사상적 기둥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허선이 대학생 인턴기자(한동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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